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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오스틴으로부터 탄생한 맥주 브랜드, 브로큰 스컬 IPA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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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은 몰라도 스티브 오스틴(Steve Austin)이라는 프로레슬러의 이름은 남자라면 분명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길거리를 오가다가 검은색 배경에 흰색의 커다란 폰트로 ‘What?’이라는 알파벳이 새겨진 티셔츠 쪼가리 정도는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을 터. 이 티셔츠의 주인공이 바로 프로레슬링 역사상 헐크 호건, 드웨인 존슨과 함께 가장 위대한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스티브 오스틴이다.

착한 놈도, 나쁜 놈도 아닌 모두까기 성향의 기믹을 가진 오스틴은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배드애스(Badass) 캐릭터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과격하지만 동시에 거침없는 행보로 사이다 같이 시원한 매력을 발산했고, 이러한 캐릭터를 수식하기 위해 다양한 심볼이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팬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다름 아닌 ‘맥주’일 것이다.

오스틴은 경기 외적으로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발휘하는 타고난 엔터테이너였다. 그런 그의 인-링(In-Ring)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맥주. 사각 링 모서리의 링포스트에 올라가 양손으로 캔맥주를 부딪쳐 거품을 터뜨리며 맥주를 들이키는 이 퍼포먼스는 오스틴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포인트다. 오스틴은 과거 1990년대 ECW에서 활동했던 샌드맨(Sandman)이라는 프로레슬러의 경기장 입장 신에서 영감을 얻어 이 퍼포먼스를 자신의 것으로 새로이 만들었고, 평소에도 엄청난 맥주광으로 알려진 그의 실생활 이미지와 겹쳐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건 브로큰 스컬(Broken Skull)이라는 맥주 브랜드를 만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유명세에 비해 오스틴이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게 된 건 비교적 늦은 2015년의 일이었다.

엘 세군도 브루잉 컴퍼니

브로큰 스컬 맥주를 이야기하려면 일단 시계추를 2011년까지 돌려야 한다. 현재 오스틴의 브로큰 스컬 IPA, 그리고 라거를 생산하는 양조장은 엘 세군도 브루잉 컴퍼니(El Segundo Brewing Company, 이하 ESBC)로, 2011년에 설립된 소규모 독립 양조장이었다.

ESBC를 설립한 오너이자 헤드 브루어인 롭 크록설(Rob Croxall)은 원래 항공우주기기 분야에서 꽤 오랜 시간 몸담아온 인물이었다. 어중이떠중이 기업도 아니고 TRW와 노스롭(Northrop)이라는 굴지의 기업들을 거치면서 30대 초반에 상당히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었다고. 하지만 크록설은 에일헤드(Aleheads)와의 인터뷰에서 “13년 동안 단 하루라도 ‘멋지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수제 맥주를 좋아했던 크록설은 대학 시절부터 홈 브루잉에 푹 빠졌다. 홈 브루잉 기간만 거의 10년에 가까울 정도로 그는 단순한 마니아 수준을 넘어, 언젠가는 맥주를 자신의 업으로 삼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결국 노스롭을 뛰쳐나와 이 길을 걷게 된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을 것이다.

IPA에 빠진 라거의 아이콘

소규모 독립 양조장으로 시작한 ESBC와 스티브 오스틴이 조우한 건 2010년 초중반의 일이었다. 당시 오스틴은 몇 개의 영화, 그리고 <스티브 오스틴의 브로큰 스컬 챌린지>라는 리얼리티 TV 쇼 촬영 문제로 텍사스가 아닌 캘리포니아주 LA의 마리나 델 레이에 거주하고 있었다. ESBC의 양조장도 마침 이 근방이었다.

사실 그동안 오스틴이 WWE 무대에서 보여준 퍼포먼스 과정에서 주로 들고나왔던 맥주는 버드와이저 라이트였다. “평생을 걸쳐 라거만 마셨다”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무렵 오스틴은 시에라 네바다 페일 에일을 접하면서 취향의 폭을 에일로 넓혀가고 있었는데, 이때 ESBC를 만난 것이 중대한 기점이 됐다. ESBC의 시트라 페일 에일과 메이베리 IPA는 오스틴의 원픽이었고, 그는 차량으로 불과 15분 거리에 있는 양조장 탭룸에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을 정도로 단골이 됐다. 이후 그들의 만남이 비즈니스 이야기로 흘러간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ESBC의 공동 설립자인 톰 켈리(Tom Kelley)는 오랜 시간 맥주 브랜드 론칭을 꿈꿔오던 오스틴이야말로 새로운 사업 파트너로서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결국 그렇게 스티브 오스틴의 이름을 건 맥주 브랜드 개발이 시작됐다. 오스틴은 ESBC와의 미팅을 통해 많은 맥주를 시음했고, 이 과정에서 명확한 호불호의 취향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전달했다. 크록설은 실제로 “오스틴은 정말 좋은 미각과 명확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미디엄 바디에 쓴맛은 다소 절제되고, 대신 선명한 홉 향 같은 부분들은 바로 그가 찾던 포인트다”라며 오스틴의 취향을 설명했다.

아로마로 대표되는 IPA의 특징 대신, 홉 본연의 향에 더 집중한다는 오스틴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크록설은 캐스케이드와 치누크 같은 클래식한 아메리칸 홉을 메인으로 하는 레시피를 만들었다. 여기에 시트라 홉으로 트로피컬한 아로마를 구현하며 어느 정도 트렌디한 절충점을 찾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들의 컬래버레이션 IPA는 중후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쓴맛, 쉬운 목 넘김이라는 매력적인 특징을 갖게 됐다.

이 협업의 마지막은 바로 브랜딩이었다. 아이디어는 당연히 오스틴으로부터 왔다. 자신을 상징하던 심볼인 해골을, 그리고 이를 활용한 자신의 TV쇼 및 팟캐스트 네이밍에서 착안한 ‘브로큰 스컬(Broken Skull)’이 낙점됐다. 그리고 프로레슬러 시절 오스틴이 가진 사장에게 반항하는 노동자 캐릭터에서 착안한 콘셉트를 적극 활용했다. 일하는 성인 남녀를 위한 맥주라는 이미지도, 블루 컬러의 캔 라벨 디자인도 모두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WWE를 등에 업고

이렇게 탄생한 브로큰 스컬 IPA는 스티브 오스틴이라는 프로레슬링의 아이콘을 간판으로 내세우고 있었지만, ESBC는 기본적으로 소규모 독립 양조장이었다. 따라서 2015년 11월 13일에 처음 출시된 브로큰 스컬 IPA는 캘리포니아주에서만 유통되는 로컬 맥주로 몇 년간 시간을 보냈다.

그랬던 ESBC와 브로큰 스컬 IPA는 2019년을 기점으로 전국구 맥주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계기는 스티브 오스틴의 WWE 출연이었다. 이미 부상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오스틴이지만, 이미 레전드의 반열에 오르며 스타성을 가진 그는 이따금 WWE의 중요한 무대에서 특별 출연으로 쇼에 참여해 피날레를 장식하곤 했다.

2019년 7월 22일에 열린 WWE의 RAW 리유니온 특집이 도화선이 됐다. 이날 오스틴은 10분 이상의 분량에 걸쳐 브로큰 스컬 IPA를 방송에 노출시켰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방송 중 나가는 하단 배너 광고 분량 중 무려 1/3이 이 브로큰 스컬 IPA에 할애됐다. 캘리포니아주에서만 공급되던 로컬 맥주는 전국구 방송을 탔고, 그동안 버드와이저만 기억하던 프로레슬링 팬들은 오스틴의 상징과도 같은 해골 로고가 새겨진 새로운 캔맥주에 열광했다. 반응은 빠르게 나타났다. 방송 직후 ESBC는 하룻밤 만에 발주량이 100배로 폭증하며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겉과 속이 다른 맥주

브로큰 스컬 IPA는 외부 디자인에서부터 오스틴의 아이덴티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라벨에는 ESBC의 로고와 함께 그의 상징인 깨진 해골(Broken Skull) 디자인을, 그리고 스티브 오스틴의 브로큰 스컬 IPA라는 글자를 굵직한 폰트로 박아 넣었다. 링 위에서 그가 보여준 캐릭터 중 하나인 블루칼라 노동자라는 페르소나를 그대로 반영해 로고 내부의 색상은 짙은 푸른색을 입혔다.

재미있는 점은 이미지와 상반되는 맛이다. 브로큰 스컬은 목넘김이 쉬운 피니시를 지향하는 IPA 맥주다. 물론 시트라, 캐스케이드, 치누크 홉의 밸런싱은 상당히 묵직한 바디감을 만들기도 하지만, 감귤과 자몽의 풍미 덕분에 입 안으로 굉장히 부드럽고 활력 넘치는 탄산감을 전달한다. 쓴맛도 과하지 않아 일반적인 대중의 취향에서 크게 호불호를 타지 않을 맛을 가졌다. 오스틴이 가진 텍사스 남부 사나이의 마초적인 속성, 또한 그가 가진 시원한 라거 맥주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반전의 맛이 있다.

소규모로 시작한 ESBC는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독립 양조장 중 한 곳으로 성장했다. 특히 브로큰 스컬 IPA가 전국구 브랜드가 된 이후, 2019년부터는 연간 100만 리터 이상의 맥주를 생산하는 브루어리가 됐다. 캘리포니아 지역에만 공급되던 이들의 맥주들은 이제 뉴욕을 필두로 뉴저지, 코네티컷, 오레건, 메사추세츠, 오하이오, 텍사스, 워싱턴 DC, 메릴랜드, 위스콘신 등 미국 전역으로 팔려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지난 3월에는 라거 제품인 브로큰 스컬 라거까지 연이어 출시하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스토리텔링이 없어도 될 건 된다

사실 브로큰 스컬 IPA는 독보적인 철학이 있다거나, 혹은 이를 미사여구로 풀어낼 만한 이야깃거리가 담긴 브랜드는 아니다. 단지 맥주라는 심볼을 가진 한 셀러브리티가 좋은 독립 양조장을 만났고, 이후에는 자신이 가진 영향력으로 그 사업 규모를 확장해가는 평범한 배경을 가진 브랜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틴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이미지를 확 뒤집어버리는 반전의 IPA 맥주라는 점은 적어도 프로레슬링 팬 입장에서는 브로큰 스컬을 굉장히 독특하고 매력적인 브랜드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스티브 오스틴’이라는 꼬리표를 떼놓고 보더라도, 브로큰 스컬 IPA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맥주이기도 하다. 브로큰 스컬은 오스틴 개인의 확고한 입맛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크게 호불호를 타지 않을만한 대중적인 접근법을 견지한다. 이만큼 뚜렷한 취향과 대중성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하면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내는 케이스가 과연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있었는지를 상기해보자. 굳이 프로레슬링이나 스티브 오스틴의 팬이 아니더라도 브로큰 스컬 IPA를 한 번쯤은 마셔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