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류업계와 애주가를 당황케 한 보건복지부의 발표가 있었다. 다가오는 11월부터 국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주류의 전면 라벨에 경고 문구와 그림이 들어가야 한다는 방침이었다. 경고 문구 및 그림 삽입의 의무화만이 내용의 전부였다면 이렇게까지 화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전면’에 있기 때문이다.
술병과 라벨이 품은 함의는 생각보다 깊다. 그 자그마한 면적에 주류의 역사와 시대의 풍조, 예술의 흐름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으니까. 브랜드의 얼굴과 다름없는 전면에 경고 문구를 얹는 일이 왜 결코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닌지, 바틀과 라벨이 걸어온 연대기를 찬찬히 짚어본다.
우리는 왜 술병을 버리지 못할까
예쁘다는 이유 하나로도 족하다
중고 거래 플랫폼에 유명 위스키나 와인의 이름을 검색하면 수만 원대 가격이 매겨진 판매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알다시피 개인 간 주류 거래는 불법. 그렇다고 이 글들을 신고할 필요는 없다. 오가는 물건은 술이 아니라, 안이 텅 빈 공병이니까.
집에서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방 한구석이나 장식장에 다 마신 술병이 하나쯤은 있다. 우리는 왜 술 한 방울 없는 병을 버리기는커녕 모셔두는 걸까?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귀한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전리품이 되기도 하고, 좋은 사람과 함께한 시간을 떠올리는 기억의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디캔터로 활용하거나 플라스틱 용기를 대신하는 등 실용적인 쓰임새를 위해 보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장식이다. 술병의 유려한 실루엣과 라벨이 자아내는 무드 덕분에 그 자체로 그럴듯한 오브제가 되니까. 그대로 두어도 근사하지만, 화분으로 쓰거나 조명을 더해 새로운 소품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비단 공병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날 술은 마시는 것을 넘어 수집하고 전시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특히 비싸고 희소성이 높은 술은 쉽사리 ‘뚜따’하지 못하는 만큼 진열장 명당에 오래 머무른다. 이 때문에라도 병과 라벨의 디자인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남들의 시선도 시선이지만, 오며 가며 매일 마주해야 하는 공간의 오브제가 예쁘지 않다면 그것만큼 신경 쓰이는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주류 용기 경고문구·그림 의무화 논쟁이 유독 뜨거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라벨 교체 비용이나 가격 인상 같은 현실적인 문제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거센 반발을 자아내는 근본적인 요인은 미관의 상실이다. 술병과 라벨은 그저 액체를 담고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브랜드의 개성과 정체성, 그 술이 품고 있는 세계관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시각적 얼굴이다.
진화하는 병과 라벨
주류 역사의 한 페이지
요즈음의 위스키와 와인은 대부분 유리병에 라벨을 붙이는 방식을 채택한다. 병의 모양, 라벨 디자인에 따라 매력도 가지각색. 하지만 태생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건 아니다. 미적 감각보다는 위변조를 막기 위한 장치에 가까운 존재였달까.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와인과 위스키는 오크통째 유통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중간 상인이 물이나 주스, 심지어 정체불명의 화학 물질을 섞어도 알 방도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게 바로 생산자 직접 병입 방식이다. 위스키 업계에서 맨 먼저 변화를 시도한 건 올드 포레스터였다. 이들은 증류소에서 직접 밀봉한 유리병에 버번을 담아 판매하며 품질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다. 올드 포레스터의 광고에는 원숭이들이 병을 따려 쩔쩔매는 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마개만 온전하다면 내용물의 품질을 신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재치 있게 보여줬다.
와인 쪽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 명문 샤토 무통 로쉴드는 1924년부터 중간 상인에게 맡기던 병입을 거부하고, 직접 와인을 채우고 자체적으로 라벨을 붙여 출하하기 시작했다. ‘이 와인은 샤토에서 병입했다(Ce vin a été mis en bouteille au château)’라는 문구와 함께. 그때부터 라벨은 평범한 종이 쪼가리가 아닌, 생산자가 품질을 보장하는 일종의 보증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디자인이 기능을 따른 사례도 있다. 전 세계로 수출되던 스카치위스키의 파손율을 낮추기 위해 병 모양을 사각형으로 바꾼 조니 워커가 대표적이다. 포르투갈 와인 브랜드 마테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이 사용하던 플라스크에서 영감을 얻은 납작하고 둥근 병 디자인을 시그니처로 내세웠다. 일반 와인병과 달리 바닥에 내려놓아도 구르지 않고, 수송 박스에 쌓기도 용이한 기능 중심의 설계였다.
위스키 저술가 노아 로스바움은 위스키 라벨이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을 비추는 매개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라벨만 봐도 시대상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모든 위스키에 의료용품 표기가 강제됐던 시기는 술 제조와 판매 자체가 불법이었던 금주법 시대였다. 세대 갈등이 극에 달했던 1960년대엔 짐 빔이 라벨을 반으로 쪼개 기성세대의 취향과 젊은 층의 감성을 한 병에 욱여넣기도 했다. 술병 하나에 시절의 감각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예술을 담는 캔버스
대중과 예술을 잇다
시대를 민감하게 포착하던 술병과 라벨은 20세기 중반을 지나며 아예 독립된 예술품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앞서 언급한 샤토 무통 로쉴드가 있었다. 이들의 라벨은 당대 최고 아티스트를 위한 캔버스나 다름없었는데, 피카소부터 샤갈, 앤디 워홀, 이우환 등 내로라하는 예술가의 작품이 무통의 와인을 장식했다. 때문에 해당 빈티지의 품질 평가와 별개로 특정 예술가가 참여한 연도는 수집가 사이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기도 한다.

일본의 프리미엄 위스키 히비키의 바틀과 라벨은 하나의 전통 공예품에 가깝다. 이들은 서양식 위스키병을 흉내 내는 대신, 고유의 계절감과 시간의 철학을 병 디자인에 입체적으로 투영했다. 이십사절기를 상징하는 24개의 면으로 병을 정교하게 깎아내고, 그 위에 일본 전통 수제 종이인 와시로 만든 라벨을 붙였다. 라벨에 새겨진 브랜드명(響) 또한 서예가가 정교하게 써낸 작품에 가깝다.

기존의 문법을 완전히 탈피한 사례도 있다. 스웨덴의 크래프트 맥주 옴니폴로의 이야기다. 이들은 전면을 가득 채우던 맥주 이름이나 도수, 스타일 같은 정보의 비중을 확 줄였다. 대신 공동 창립자이자 그래픽 아티스트인 카를 그란딘의 사이키델릭하고 간결한 팝아트 작품으로 병과 캔 전체를 꾸며냈다. 술을 마시는 경험 자체를 시각 예술의 감상으로 확장한 실험이었다.

실제로 미술관의 문턱을 넘은 케이스도 있다. 이탈리아 예술가 포르투나토 데페로가 설계한 캄파리 소다가 그 주인공이다. 종이 라벨 없이 원뿔형 유리로 제작된 이 병은 산업디자인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데, 2008년에는 이를 재해석한 설치 작품들이 밀라노 트리엔날레 박물관에서 전시되며 디자인 오브제로서 지닌 가치를 다시 한번 조명했다. 나아가 잉고 마우러 스튜디오에서는 열 개의 병을 엮어 만든 조명 작품 ‘캄파리 라이트’를 출시하며 술병의 예술적 활용 범위를 한층 넓혔다.

건강과 미학, 그것이 문제로다
중용이 필요한 순간
술병과 라벨은 소비자가 브랜드를 만나는 첫인상. 업계와 애호가들이 이번 이슈를 둘러싼 논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음주 운전 예방과 공공 건강을 위해 경고를 강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명분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술의 미학적 정체성이 훼손되는 부분 역시 절대 쉽게 넘어가선 안 될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나라 전통주 시장 역시 이번 사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통주는 선물용으로 소비되는 비중이 큰 만큼 패키지 디자인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양반탈을 형상화한 병 디자인으로 유명한 명인 안동소주, 감각적인 라벨 디자인으로 젊은 층을 사로잡은 토끼소주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어느 누가 떡하니 경고 문구가 붙은 제품을 축하와 감사를 위한 선물로 건네고 싶겠는가. 이는 결국 영세한 양조장의 판매에 직격타를 입힐 게 뻔하다.

해외 상황은 어떨까? 미국, 프랑스, 호주 등 많은 국가 역시 음주 관련 경고 문구를 의무적으로 표시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는 임산부 경고용 픽토그램을 함께 사용한다. 하지만 어느 나라도 이러한 내용이 바틀 전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하지는 않는다. 본래 올해 5월부터 강력한 주류 경고 라벨 규제를 펼치려 했던 아일랜드조차 2028년으로 시행을 연기한 상황. 당시 일부 와이너리는 경고 문구를 준수하느니 아일랜드 시장에서 철수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간 술병에 쌓여온 미학적 가치는 공공 보건이라는 거대한 명분 앞에 그리 쉽게 묵살될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일방적인 강제가 아닌, 규제와 예술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조율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야만 먼 훗날 우리의 방 한구석 장식장에도, 어느 박물관의 쇼케이스에도 이 시절의 문화를 증명할 근사한 공병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