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 동안 에디터의 희로애락을 책임진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이하 <모솔연애>) 시즌 2가 막을 내렸다. 1급수보다 더 투명하게 비치는 마음이 뭉클하기도 했고, 세상 당혹스러운 언행 때문에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출연자는 모두 하나의 이유로 거대한 용기를 낸 사람들이다. ‘모태솔로 탈출’이라는 일생일대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방송을 보며 왠지 마음이 착잡했던 사람, 분명히 있을 터. 이번 <모솔연애> 시즌2 지원자는 1만 7천 명에 달한다. 국회미래연구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 다섯 명 중 한 명은 성인이 된 후 연애 경험이 전혀 없다. 모태솔로는 더 이상 웃음으로만 소비될 키워드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이다. 연애가 진정으로 필요하지 않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연애를 바라는 마음을 숨겨 온 모솔이라면, 이번 모태솔로 탈출 프로젝트에 동참하자.
어디서 만나야 할까
얼굴도장 찍을 수 있는 곳
가장 기본적이지만 무엇보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질문. 어디서 이성을 만나야 할까? 사실 모태솔로뿐만 아니라 현대인 대다수가 이 문제에 직면한다. 집, 회사 혹은 학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쳇바퀴 일상 때문이다. 일이나 공부에 매진하느라, 자기 앞가림만 해도 에너지가 고갈되는 바람에, 집에서만 놀아도 충분히 재밌고 즐거워서. 이유야 제각각이겠지만 반복되는 굴레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이성과의 접점은 생길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모솔이 시도하는 방법 중 하나가 소개팅 앱이다. 아무래도 손쉽게 해볼 수 있으니까. 나쁜 선택은 아니다. 접근성이 좋다는 건 분명한 장점이고, 이 방식이 잘 맞는 사람도 많다. 다만 소개팅 앱이 첫 시도를 하기에 적합한 수단인지는 의문이다. 이쪽 세계에서는 외모와 몇 줄의 소개만으로 나를 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 스와이프는 순식간이고, 대부분은 아무 반응 없이 지나간다.
모솔은 대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필요 이상으로 크다. 앱에서 휘몰아치는 거절은 모솔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가혹함의 정도를 넘어설 확률이 높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지만, 모든 실패가 자산이 되지는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채 맞는 연속된 무응답은 애먼 자존감만 깎아내릴지 모른다.
결국 품이 많이 들더라도 오프라인 쪽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다. 포인트는 일회성이 아니라 여러 차례 만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자주 마주치는 상대에게 호감을 느낀다. 완벽한 첫인상을 주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다시 만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솔연애> 역시 관계를 창출하기 위해 합숙이라는 강제적인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러닝 크루, 커피 모임, 목공 클래스 등 정기 모임에 들어가는 게 베스트. 이왕이면 평소 궁금했거나 실제로 관심 있는 분야를 선택하면 좋다. 단, 이성 간의 만남이 주된 목적으로 보이는 모임은 피하자. 여기서 무조건 연애 상대를 찾고야 말겠다며 앞서가게 만들 테고, 조급한 마음은 되던 일도 그르쳐 버린다. 매주 같은 시간에 얼굴을 마주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니, 당장은 이성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법을 익히는 수련 과정이라 생각하자. 물론 그 와중에 기쁜 소식이 생길 수도 있고.
모솔인 거 말해도 될까?
말 안 해도 다 안다
모태솔로를 향한 시선이 따스하지만은 않다는 건 모두가 안다. 미디어 속 모솔은 외모든 성격이든 뭐 하나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기 일쑤고, 온라인에는 몇 살까지 연애를 못 하면 마법사가 된다는 식의 비웃음 섞인 농담이 판을 친다. ‘연애 못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라는 인식은 알게 모르게 커져 왔다.

그래서인지 이성에게 자신이 모솔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과거 이야기만 나오면 어물쩍 대화를 피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전여친과 전남친의 서사를 창조하기까지 한다. 이해한다. 누군가는 모솔을 연애 상대에서 배제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꼬리가 길면 밟힌다. 거짓말의 경중을 떠나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걸 들키는 순간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어긋나기 마련이다.
혹여 들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숨길 게 있으면 대화가 조심스러워지고, 대화는 겉돌게 된다. 게다가 모솔인 이상 이성을 대할 때 미숙함이 삐져나올 수밖에 없다. 모솔이라는 사전 정보가 있다면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문제인데, 괜히 능숙한 척하다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식의 선입견을 만들 수도 있다.
어쩌면 연애 경험이 없다는 게 정말로 약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솔이 쉽게 간과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모두가 약점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남몰래 짝사랑하는 상대가 지금은 완벽해 보이겠지만, 그 사람에 대해 깊이 알아갈수록 단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응당 사람은 그렇고, 인간관계 역시 그렇다.

약점을 드러내면 손해라는 것도 항상 맞는 말은 아니다. 되레 상대방이 결점을 드러냈을 때 호감도가 높아졌다는 정반대의 연구 결과까지 있다.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일 수도, 어쩌면 호감을 높이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어떤 종류의 약점인지에 따라 다를 수야 있겠지만, 모솔 정도는 귀엽게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골몰할 테지만,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자. 연애 안 해본 게 범죄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진지해질 필요도 없다. 망설이면서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상대가 더 긴장한다. 고해성사하듯 무거운 분위기가 아닌, 취미를 소개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하면 된다. ‘연애를 안 해봐서 서툴 수 있다’라는 식으로. 상대가 반응을 보이면 적당히 민망해하고 넘어가면 끝. 참 쉽다.
솔직히 외모도 중요하다
기본은 합시다, 우리
모태솔로 중 상당수가 연애에 실패하는 원인을 외모에서 찾는다. 개중에는 타고난 외적 조건을 한탄하며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지 말자. ‘겉모습보다 내면이 중요하다’ 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이성과의 만남, 특히 첫인상에 있어 외모는 분명 중요하다.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모솔조차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니까.
다만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다. 외모는 타고남과 관리가 합쳐진 결과물이다. 성형을 하지 않는 이상 이목구비를 극적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까지의 외적 매력은 관리를 통해 끌어올릴 수 있다. 해봤자 얼마나 바뀌겠냐고 생각했다면, <모솔연애>에서의 메이크오버를 보자. 다이어트처럼 시간이 걸리는 변화도 있었지만, 달라진 스타일이야말로 사람을 완전히 바꾼 요소였다. 게다가 머리나 옷을 바꾸는 정도는 단시간에도 따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껏 겉모습에 일말의 관심도 없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잘 꾸밀 수는 없다. 당장은 멋지게 변신한다기보다 감점 요인을 제거하는 방식을 택하자. 눈에 띄는 순간 합격 목걸이는커녕 바로 불구덩이로 빠질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거다. 이는 보통 청결과 관계돼 있다. 두피 관리, 세안과 보습, 코털 정리, 입냄새 케어, 깔끔한 손톱. 이 정도는 마주하는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다음 단계는? 말 그대로 ‘꾸민다’라는 표현에 가까운 무언가를 시도해 볼 때. 머리 모양을 바꾸고, 패션을 갈아엎어야 한다. 다만 취향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화려함보다는 깔끔함을 추구하기를 추천한다. 명품보다는 체형에 맞는 무지 티셔츠가 낫고, 어울리지 않는 향수를 뿌릴 바에 바디 워시나 로션으로 체취를 관리하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체형에 맞는 옷을 고르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어깨너비와 기장을 한 번 재두고, 옷을 살 때 상세 페이지의 실측 사이즈와 맞춰보면 된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들이는 노력에 비해 인상을 크게 바꿀 수 있는 항목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눈썹 정리가 있다. 직접 할 필요도 없이 머리 자를 때 부탁하면 된다. 자고로 기초 공사가 잘 이루어져야 건물이 튼튼하다. 나중에 본인만의 스타일을 찾아나갈 그날을 기약하며.
대화가 끊기는 진짜 이유
소통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이상형을 물으면 열에 일고여덟은 이렇게 말한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요.” 말이야 쉽지,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눈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이성과 교류한 경험 자체가 손에 꼽는 모솔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말실수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티키타카는 고사하고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정도.
모태솔로의 대화는 왜 끊기는 걸까? 모든 모솔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대화 패턴은 확실히 존재한다. 바로 취조실 타입이다. MBTI가 뭐냐, 취미는 뭐냐, 이상형이 뭐냐. 범죄자 신문이라도 하듯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답변은 거들 뿐. 대답을 듣기 위함이 아니라 질문하는 행위 자체가 목적으로 보일 정도다. 그러다 질문거리가 마르면 이야기는 즉시 단절돼 버린다.

이성 앞에서 긴장하는 건 당연하다. 낯선 상황이니 어설퍼지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연습으로 나아지는 영역이라는 사실. 이 대화의 목적은 ‘나는 너에게 호감이 있다’라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던지는 데 있다. 얼마나 대단한 질문을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방의 답변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핵심이다.
실전 연습에 돌입해 보자.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상대가 러닝이라고 답했다. 여기서 기다렸다는 듯 본인의 취미를 꺼내면 실패. 상대의 답변에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여기서 하나 더 주의할 점이 있다. “어디서 뛰세요?”, “일주일에 몇 번 뛰세요?” 같은 질문은 취조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사실에 대한 질문은 다시금 짧은 사실로 돌아올 뿐이니까.
물어야 할 건 사실이 아니라 이야기다. 사람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말할 때보다, 왜 좋아하게 됐는지 말할 때 훨씬 말이 길어진다. “어쩌다 시작하게 됐어요?”처럼 이유를 묻는 문장을 던져 보자. 상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게 될 테고, 대화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거기서부터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갈 것이다.

한 가지 더. 할 말을 미리 준비하는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 사실에 매몰되면 자기도 모르게 썰 보따리를 풀 타이밍만 재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가 말하는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내가 끼어들 틈만 호시탐탐 노리게 되는 것이다. 그 대화는 당연히 부자연스러울 테고, 상대 역시 불편함을 느낄 게 뻔하다. 준비한 멘트는 ‘하면 좋고, 아님 말고’의 마음가짐으로만.
‘망했다’라는 착각
판단은 내가 아니라 상대의 몫
어찌어찌 이성과 대화를 나누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귀가 후 침대에 누워 오늘을 복기할 때, 긍정 회로와 이불킥 중 어느 쪽에 더 무게가 실릴까?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본인이 상대에게 남긴 인상을 실제보다 한참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모솔은 어떻겠나. 비교할 경험 자체가 없다 보니 상황을 훨씬 부정적으로 왜곡해 기억할 확률이 높다.

제대로 절어버린 농담, 나도 모르게 피해버린 시선, 집에 와서야 발견한 앞니에 낀 고춧가루. 하나하나가 끔찍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건 사건일 뿐 결과가 아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중요하지, 내가 내 행동을 어떻게 느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상대가 나의 연락에 회신하는지, 다음 약속에 응하는지처럼 명확하게 돌아오는 피드백으로 판단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물론 정말로 망했을 수도 있다. 칼 같은 거절 의사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좌절하지 말자. 첫 만남에서 상호 호감이 성립할 가능성은 애초에 낮으니까. 이건 모솔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소개팅만 하더라도 거절이 기본값, 성사되는 경우가 예외에 가깝다.

<모솔연애> 시즌 2의 한 출연자가 인터뷰 중 눈물을 쏟으며 남긴 소회에 핵심이 있다. ‘어린아이는 아프고 무서운지 몰라서 불도, 차도 안 무서워한다. 연애도 아무것도 모를 때 미리 상처받고 내성이 생겨야 했는데, 남들은 다 면역이 생긴 걸 다 커서 하려니 너무 어렵다’.
상처는 아프고 쓰라리다. 하지만 이 아픔의 원인이 내가 못나서라고 자책해선 안 된다. 남들보다 늦게 겪는 것뿐이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는 게 아니다. 스무 살에 지나온 사람도, 서른에 처음 마주하는 사람도 아픈 건 매한가지. 애초에 이 상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는 오지도 않는다. 아플 걸 알면서도 굳이 용기를 낸 당신의 한걸음에 박수를 보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