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성수동에서는 특별한 만남을 기념하는 자리가 열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스카치위스키 발렌타인(Ballantine’s)과 골프웨어 브랜드 말본(Malbon)이 협업을 발표한 것이다. 오직 한국만을 위한 새로운 블렌딩인 데다가 한정판으로 출시돼, 위스키 애호가들의 관심을 단숨에 끌어낼 수 있었다.
위스키와 골프.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 조합이 어쩐지 낯익은 이유를 아시는지. 알고 보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가 입증하는 단짝이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가 자랑해 마지않는 두 존재는 어떤 관계성으로 지금까지 함께하게 되었을까?
스코틀랜드를 지탱하는 두 축
진흙 속에서 피는 꽃
1457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독특한 법을 하나 제정한다. 바로 축구와 골프를 금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494년의 왕실 재무 기록에서도 낯선 문구가 등장한다. ‘국왕의 명에 따라 아쿠아 비테를 만들기 위해 존 코어 수사에게 맥아 8볼을 지급함’. 아쿠아 비테(Aqua Vitae)는 생명의 물을 뜻하는 라틴어로, 이를 게일어로 옮긴 우스게 바하(Uisge Beatha)가 훗날 위스키의 어원이 된다.

15세기에 적힌 두 기록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위스키와 골프 각각에 있어 최초의 공식 기록이라는 점이다. 물론 인류 최초의 위스키, 처음으로 행해진 골프처럼 이들의 기원이 스코틀랜드라고 주장하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아쿠아 비테에 대한 기록은 1405년에 아일랜드에서도 발견되었고, 골프와 비슷한 놀이는 네덜란드에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둘을 공식적으로 서술한 내용이 스코틀랜드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정론에 가깝다.
두 번째 공통점 역시 흥미롭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성행을 입증하는 자료라는 점이다. 골프 금지령은 내전과 주변국 간의 전쟁으로 국방이 중요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활쏘기보다 골프 삼매경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내려졌다. 더불어 맥아 8볼로 만들 수 있는 술의 양은 개인이 마시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다. 측량하는 방식에 따라 400병에서 많게는 1,500병까지 만들 수 있다고 할 정도. 즉 두 기록은 ‘이때 시작됐다’가 아니라 이미 성행하는 와중에 적힌 것이다.

왜 스코틀랜드였을까? 그 답은 결핍에서 찾을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해안가 지역에는 바다와 육지 사이를 연결하는 모래 언덕 지대, 링크스(Links) 지형이 존재한다. 이곳은 모래땅인지라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집을 짓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이 쓸모없는 땅이 골프장으로 발전한 것이다. 바닷바람이 조형한 불규칙한 모래 언덕을 그대로 살려 만든 링크스 코스는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코스가 되었다.
위스키 역시 부족함을 원천으로 삼았다. 스코틀랜드는 서늘하고 습한 기후 때문에 밀농사가 어려운 곳. 그렇기에 척박한 기후에서도 버틸 수 있는 보리를 키워냈고, 남는 보리는 자연스럽게 술이 되었다. 땔감도 마찬가지였다. 부족한 땔감을 땅에서 캔 이탄으로 대체했고, 그 연기로 맥아를 말렸다. 이것이 스카치를 대표하는 향 중 하나인 스모키의 탄생 비화다. 스코틀랜드의 결핍을 먹으며 자란 위스키와 골프는 어느덧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위스키와 골프의 첫 만남
성공해서 만나자
사실 두 문화가 처음부터 붙어 있었던 건 아니다. 18세기 골프 클럽 회원들이 라운딩을 끝내고 즐긴 술은 다름 아닌 와인이었다. 세계 4대 메이저 골프 대회 중 가장 오래된 디 오픈의 우승 트로피 이름이 클라레 저그(Claret Jug)인 게 그 흔적이다. 참고로 클라레는 프랑스 보르도산 와인이라는 뜻. 당시 위스키는 밀주이자 농가에서 증류하는 술이었기 때문에, 클럽하우스 테이블에는 오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위스키가 클럽하우스의 문턱을 넘어서게 된 건 19세기가 되어서였다. 당시 위스키는 여러 긍정적인 상황이 겹치면서 입지를 키우는 중이었다. 1823년 주세법 개정으로 합법 증류소가 늘어났고, 블렌디드 스카치위스키가 등장하면서 누구나 마시기 편한 술이 되었다. 그러던 중 해충 필록세라가 창궐하면서 유럽의 포도밭을 휩쓸었고, 와인과 브랜디가 공급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빈자리를 스카치가 채우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골프 역시 근대의 틀을 갖춰가고 있었다. 1860년 디 오픈이 시작됐고, 위대한 골프 선수이자 현대 그린키핑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드 톰 모리스가 코스 관리의 기초를 닦았다. 같은 땅에서 태어나 각자 장성한 두 문화는 19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18홀과 19홀이 품은 함의
음주가 허용되는 스포츠가 있다?
요즘 위스키 좀 마셔 본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인도 위스키. 다양한 브랜드 사이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골퍼스 샷(Golfer’s Shot)이다. 골프의 샷이면서 동시에 위스키의 샷까지 품어낸 언어유희가 유쾌할 따름. 이들의 대표적인 라인업으로는 골퍼스 샷 18홀이 있다.

18홀과 관련해 골퍼와 위스키 마니아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위스키 한 병이 정확히 18잔이라, 홀마다 한 잔씩 마시기 위해 18홀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너무나 낭만적으로 들리는 만큼 사실이길 바랐겠지만, 아쉽게도 이는 소문일 뿐이다. 골프의 고향이라 불리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가 18홀을 채택했고, 이를 다른 클럽들이 모방하면서 일반적인 관행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낭설은 여전히 ‘믿고 싶은 이야기’로 남아 있다.
스포츠 도중에 술을 마신다는 개념이 이상할 수 있다. 하지만 골프는 비교적 음주에 자유로운 종목이다. 골프 규칙을 다 뒤져봐도 경기 중 음주를 금한다는 조항은 없다. 프로 대회도 마찬가지. 선수들이 경기 중에 알코올을 멀리하는 건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과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힙 플라스크에 위스키를 담아 버디를 잡을 때마다 한 모금씩 나누는 버디 주스(Birdie Juice) 문화가 생기기도 했다.
사실 위스키와의 관계성에서 18홀보다 더 중요한 홀이 있다. 바로 19홀이다. 코스는 18홀까지인데, 19홀은 뭘까? 이는 실제로 게임을 진행하는 홀을 의미하지 않는다. 18홀을 마친 골퍼들이 클럽하우스에 모여 술을 마시며 그날의 경기를 복기하는 시간을 ‘19번째 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뒤풀이. 골퍼 사이에서는 그 어떤 홀보다 중요하다는 진심 섞인 농담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19홀에서 위스키만 마시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가장 많은 잔을 채우는 주종은 오히려 맥주일 것이다. 그럼에도 19홀이 위스키를 연상시키는 이유는, 수많은 위스키 브랜드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발렌타인과 말본의 협업은 19번째 홀이 메인 콘셉트였고, 블레이드 앤 보우(Blade And Bow)는 2024년 프로 골퍼 윈덤 클라크와 함께 ‘The 19th Hole’ 캠페인을 열었다. 심지어 19th Hole이라는 이름의 버번 브랜드까지 존재할 정도다.
위스키는 골프를 좋아해
구애의 역사는 계속된다
위스키는 왜 그토록 골프에 공을 들였을까? 기본적으로 필드를 즐기는 사람들은 위스키가 겨냥하는 소비자층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시간 역시 중요하다. 골프는 반나절을 통째로 쓰는 스포츠고, 위스키는 그 어떤 주류보다도 시간을 두고 마셔야 하는 술이다. 90분짜리 축구 경기에 위스키를 끼워넣기엔 애매하니까. 게다가 스코틀랜드라는 교집합으로 정통성까지 챙길 수 있으니, 골프장이야말로 위스키가 활약할 수 있는 완벽한 무대였다.

이렇다 보니 위스키 브랜드들이 일찌감치 대회장으로 몰려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월드 시니어 챔피언십에 티처스(Teacher’s)가 후원을 한 게 무려 70년도 더 전의 일이다. 1960년에는 아예 골프 대회에 이름을 내걸기까지 했다. 잉글랜드 웬트워스에서 열린 발렌타인 토너먼트가 그 주인공이다. 수십 년 전 토너먼트를 지원한 발렌타인은 2026년에도 말본과 손을 잡으며 골프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골프의 모습을 입어버린 위스키도 있다. 올드 세인트 앤드류스(Old St. Andrews)의 제품은 병부터가 골프공이다. 표면의 딤플까지 고스란히 재현해 멀리서 보면 술인지 골프용품인지 헷갈릴 정도. 맥기본(McGibbon’s)은 한술 더 떴다. 골프백과 클럽 헤드 모양의 도자기 병에 위스키를 담아 팔았는데, 어찌나 많이 팔렸는지 1990년에는 영국 여왕 수출상까지 받았다.

지금도 위스키와 골프는 그 관계성을 이어간다. 가장 저명한 두 골프 대회, 디 오픈과 US 오픈이 각각 공식 위스키를 두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로크 로몬드와 듀어스를 곁에 둔 프로 골프 씬은 여전히 순항 중. 어느덧 두 문화가 진득하게 인연을 맺어 온 시간도 한 세기를 훌쩍 넘겼다. 불의의 사고로 둘 중 하나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위스키와 골프의 동행은 이어지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