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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MZ세대의 이직기 : 개인적이지만 보편적인
2023-02-07T06:03:10+09:00

‘God생’이 아닌 ‘인간다운 생’을 살아갈 용기.

2023년 1월

당신의 일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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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회사에서는 매주 쟁점 토론을 벌인다. 아무도 주제를 제시하지 않으면 시선이 내게로 쏠린다. 선배들에게 ‘역시 MZ세대는 달라’라는 말을 들으면 질색하는 제스쳐를 취했는데, 막상 발언권이 주어지면 기대하는 만큼의 신선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은 가벼운 압박감을 느낀다. 구성원 중 20대가 나 홀로인 상황에서 내 세대의 대변인이 되는 느낌이랄까. 실제로는 한 명이 대변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다른 의견이 나올 텐데 말이다.

아무튼 어느 날은 ‘갓생’을 꺼내 들었다. 세간에서는 트렌드로 치부하지만 결국 병리적인 사회현상이 아닐까 싶다고도 덧붙였다. 이야기가 드문드문 오가다 각자 20대 시절을 회고하더니, 나에게 따뜻한 조언을 해주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이럴 의도는 아니었기에 머쓱하면서도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다 신경 쓰지 말고 본인이 좋아하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죠 ~.”

하지만 저 말을 듣고는 궁금했다. 요즘 세대들이 ‘다 신경 쓰지 않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지.

학창 시절부터 많은 돈을 원했다. 돈은 부모의 간섭없이 내 의지대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멋진 옷과 신발뿐만 아니라 특별한 경험과 배움까지 살 수 있는 것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원한다는 것은 지금 나에게 없다는 뜻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호프집과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 달에 두 번 쉬면서 치킨과 커피를 날랐다. 통장에 찍힌 건 푼돈이었다. 하지만 돈을 걸며 납득할 수 없는 요구를 하는 부모에게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는 오직 인서울을 위한 재수를 포기한 계기가 됐다. 단맛을 맛본 경험은 실체 없는 미래를 기다릴 수 없게 했다.

경기도 소재 놀이공원에 입사했다. 4대 보험 가입은 처음이었으니 첫 직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름의 선 기준이 있었다. 20대 초반 고졸 여성이 쉽게 진입할 수 있고, 지방 인의 꿈인 ‘서울’ 혹은 근교이며, 또래가 많이 일하는 업종에, 월 170만 원 이상의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곳. 인터넷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대라면 꼭 해봐야 하는 일’ 제목 글에서 놀이공원 아르바이트가 항상 포함된 점도 결정에 영향을 줬다. 이런 방식으로라도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에서다. 주변 내 또래가 통상적으로 거치는 일련의 과정은 당분간 내 삶에 없을 테니까.

시간과 맞바꿔 먹는 돈

‘환상의 나라로 오세요 ~ 즐거운 축제가 열리는 곳 ~. ’희망찬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을 지나 들어온 조용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나에게는 지극히 현실인 곳이었다. 배정받은 부서는 놀이공원에서는 식품 및 음료를 취급하는 F&B 부서, 그중에서도 예상에 없던 워터파크 내 음식점이었다. 비인기부서일뿐더러 덥고 습한 환경 때문에 직원들 사이에서는 ‘절대 가면 안 되는 매장’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교육에서 고객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말하는 법을 이틀간 배웠지만 딱히 쓸모는 없었다. 근무 시간의 절반은 서서 같은 말이나 행동을 반복하면 됐다. 주변에는 반복되는 단순노동이나, 자신의 응대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온 고객이 웃으며 돌아가는 과정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아쉽게도, 나는 이쪽에서 의미를 찾는 재능이 없었다. 시계를 볼 때마다 고작 10분밖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내 1시간이 8천 원도 안 된다는 것에 속상해하며 하루를 보냈다.

다시 돌아온 현실의 시간은 너무 느리게 갔다. 그럴 때면 손님이 버리고 간 영수증 뒷면에 퇴사하면 그간 모은 돈으로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어 내려갔다. 일종의 마약 같았다.

기계의 부품이 된 듯했다. 몇몇 동료들은 사직서에 ‘노동강도에 비해 급여가 너무 적다’는 문구를 넣었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출근하면 들리는 ‘어제 새로 온 친구가 퇴사해서 또 새로운 인력배치를 요청해야 한다.’는 매니저의 토로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휴일엔 도망치듯 서울로 갔다. 그동안 고향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언젠가는 여기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돌아온 현실의 시간은 너무 느리게 갔다. 그럴 때면 손님이 버리고 간 영수증 뒷면에 퇴사하면 그간 모은 돈으로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어 내려갔다. 일종의 마약 같았다. 그렇게 돈을 위해 약 2년을 버텼다.

하지만 천만 원 조금 넘는 돈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었다. 퇴사 후 유럽행 비행기 티켓 예매 창을 띄워뒀지만, 꼬박 모은 돈의 절반이 2주 만에 사라진다는 사실은 창을 닫게 만들었다. 대신 그 돈으로 요가지도자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요가 하면 퉁퉁 부은 다리를 진정시키고자 유튜브를 보고 몇 번 따라 해본 것을 시작으로, 요가원에 한 달 다닌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강사로서의 1시간은 놀이공원에서 3시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당시 내가 하는 것 중 즐기면서 일하며 수입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체로 가장 나은 선택지였다. 발끝에 손이 닿는 데에만 한 달이 걸렸지만, 곧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디저트 카페, 헬스장, PC방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교육을 들었다. 놀이공원에서 일한 경험은 아르바이트 판에서 프리패스 경력이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불평

몇 개월 뒤 자격증을 얻어냈다. 어려워 보이는 동작들도 과거보다 곧잘 해냈다. 그러나 증서가 있다고 해서, 겉으로 동작이 구현된다고 해서 가르칠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직접 행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코로나19로 인도 대신 국내에 구루(요가에서 말하는 스승)가 많다는 제주로 무작정 떠났다. 요가 수업료와 월세, 최소한의 생활비를 충당하려면 또다시 일을 해야 했다.

그동안 모아둔 돈은 영수증 뒷면 리스트를 몇 가지 실행하다 보니 사라져 있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대기업 프렌차이즈 카페에 들어갔다. 설거지를 하다 타이머가 울리면 재료를 채우고, 또 타이머가 울리면 홀에 있는 컵들을 모으고, 타이머가 울리면 또 설거지를 하고…. 다시는 대기업 내 계급 피라미드 맨 아래에 있는 소모품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그것을 자처했다는 자괴감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밤마다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기자’가 눈에 들어왔다. 지역 언론 채용공고였다.

글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동안 막연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간간이 써온 글은 남들에게 보여주기엔 부끄러운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그동안 기자는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그나마 하고 싶은 일에 가까워질 기회였다. 도서관에서 기자와 관련된 책 몇 권을 빌려 읽고 난 후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밤새워 써냈다. 가방끈이 짧은 점이 걸렸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결과는 합격. 당시에는 얼떨떨했다. 대표는 고민 끝에 가능성만 보고 내린 결정이라며, 적어도 10년은 일할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습 기간의 급여는 100만 원이라고 덧붙였다.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마음에 들었다. 실제 업무에 대한 판타지스러운 상상을 펼친 덕이었다.

이름을 들으면 모두가 아는 중앙언론사에서 오래 일하다 직접 회사를 차린 대표는 자부심이 엄청난 인물이었다. 현장기자 시절 특종을 했던 경험을 무용담처럼 풀어놨지만, 최신 업데이트 이야기는 없었다. 현안을 다루는 관점부터 홈페이지 디자인까지도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면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를 시작으로 한 대답이 돌아왔고, 딱 한 명 있던 사수는 별다른 열정이 없어 보였다. 기사를 정해진 틀에 맞춰 작성하는 방법은 잘 배웠다. 딱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아무도 보지 않는 기사를 생산하는 일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타지역 언론사로 이직했다.

저마다의 생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모두가 열심인 세상에서 덜 열심히 살겠다는 용기를 내는 것은 어렵다.

불평만 늘어놓은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일터에 속하고자 하는 욕심은 나를 위해 꼭 필요한 욕망이었다. 일터의 문화와 특성은 삶의 질과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만 덕에 현 회사로 자리를 옮긴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애초 제주 이주 목적이었던 요가 수련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소위 정통파들 사이에서 지식의 밑천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할 때도 있다. 그래도 퇴근 후 똑똑한 선배들의 날카로운 피드백이나 칭찬을 복기하면서 내가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배울 점이 많은 동료와 의견을 자유롭게 낼 수 있는 사내 분위기, 충분한 지지를 보내는 리더,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피드백 등은 긍정적인 연결감을 준다. 나로 인해 회사 내외로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퇴사하면 하고 싶은 일’을 상상하며 현실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라 업무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God생’이 아닌 ‘인간다운 생’을 살아갈 용기

그렇다고 해서 몇 년 뒤에도 같은 직업으로 먹고살지는 미지수다. 지금보다 나를 잊을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언제든 전향할 생각이 있다. 하지만 이 마음은 현재 일을 하면서도 자기 계발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도 이어진다. 그 배경에는 ‘지금 회사에서 주어진 일만 하면 모종의 이유로 나중에 퇴사했을 때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으면 어떡하나’하는 불안이 있다.

퇴근 후 침대에 드러누워 들여다보는 SNS에는 열심히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의 전시들이 넘쳐난다. 그를 보며 조바심이 난다. 그들을 따라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전까지의 시간을 영어 공부, 경제 기사 읽기 따위로 채우고, 퇴근 후에는 달리기를 한 뒤 책을 읽고, 주말에는 디자인 강의를 듣는 데 시간을 들이겠다고 다짐한다. 1~2년 뒤 목표까지 세운다. 나만의 계획을 세우고 지키는 것은 흘러가는 듯한 인생에서 유일하게 통제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번아웃도 잦다. 누군가는 ’SNS를 보지 않으면 된다’고 가볍게 말한다. 그러나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 자체가 불안이기에 이도 저도 못 한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요가는 생산성을 위해 잘 쉬게 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MZ세대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갓생살기’에 동참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이야기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저마다의 생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모두가 열심인 세상에서 덜 열심히 살겠다는 용기를 내는 것은 어렵다. 그러다 결국 한계를 맞닥뜨린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를 인정하면 휴대전화를 잠시나마 덮어두고 여유를 가질 용기가 생긴다.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근육은 이렇게 조금씩 커진다. 그러다 보면 내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힘까지 생기지 않을까? 통장내역과 시간의 흐름을 잊으면서. 과거부터 해온 모든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2023년 1월

당신의 일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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