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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퀸시 존스 전에 모타운이 있었다 (+영상)
2026-06-18T09:28:16+09:00

장르가된 레이블이 있다.

기억 저편에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마이클〉은 그의 존재감이 지금도 실재함을 다시금 선명하게 드러냈다. 전설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잘 어울리는 아티스트, 하지만 이 한 단어로 스타성과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재능을 모두 담아낼 재간은 없다. 영화적 완성도를 떠나 그를 오롯이 떠올릴 수 있는 두 시간을 선사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이클>이라는 영화의 진짜 성취다. 

그 시간 속에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이름이 있다. 모타운(Motown)이다. 영화에는 어린 마이클 잭슨과 형제들이 모타운 레코드의 수장 베리 고디(라렌즈 테이트 분)와 함께 메가 히트곡 ‘I Want You Back’을 녹음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는 이 레이블을 배경으로만 소비한 채 빠르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기억하자. 세상을 뒤흔들고, 지금까지도 여진이 이어지는 그 거대한 이름의 시작에는 모타운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동차 산업의 중심에서 피어난 소울

디트로이트 키즈 베리 고디

모타운은 자동차 산업의 심장으로 불렸던 디트로이트에서 걸음을 뗀다. 디트로이트는 인근 미네소타 지역의 풍부한 철광석과 자동차 프레임 제작에 쓰이던 광대한 삼림 자원을 기반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룬 도시. 여기에 미국 교통의 중심지라는 지리적 이점까지 더해지며, 올스모빌, 캐딜락, 포드, GM 등이 1900년대 초 출범하며 부흥기를 맞는다.

이후 산업 구조의 변화와 함께 쇠락의 상징처럼 불리게 됐지만, 이 도시가 남긴 가장 찬란한 유산 중 하나가 바로 모타운. 이름 역시 자동차 도시라는 별칭 ‘모터 타운(Motor Town)’에서 가져왔다. 딱딱한 기계 산업과 소울 가득한 음악은 마치 극과 극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타운은 디트로이트라는 뜨거운 도시 정체성 그 자체와도 같다.

모타운의 창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는 1929년, 제조업이 주를 이루던 이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한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페더급 권투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에게는 뜻밖의 이력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한국 전쟁 참전을 위해 미 육군에 징집됐다는 것. 1952년 5월 한국에 도착한 그가 판문점 인근의 제3보병사단 제58 야전포병대대에 배치됐다는 이야기다. 그의 한국 전쟁 복무는 1953년 4월에 마무리됐다.

귀국 후 베리 고디는 참전 수당을 밑천 삼아 자신이 사랑하던 재즈 음반 전문점 ‘3-D 레코드 마트’를 열지만, 가게는 2년 만에 문을 닫는다. 넘치는 음악적 열정으로 포드 자동차 생산 라인에서 일하면서도 꾸준히 곡을 써 나갔고, 1957년 재키 윌슨의 ‘Reet Petite’를 발표하며 마침내 성공이라는 결실을 맺는다. 음악 산업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단초였다.

그는 가족에게 800달러를 빌려 1959년 1월 R&B 레이블 탐라 레코드를 설립, 같은 해 9월 팝 시장을 겨냥한 모타운을 출범시키며 본격적인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인종 그 너머를 위해

마케팅까지 잘해

모타운은 레이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어느 순간 그 이름은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렸으니까. 이들은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티스트들을 발굴하며 리듬 앤 블루스, 소울, 팝을 결합한 이른바 ‘모타운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마침내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무려 110곡의 빌보드 톱10 히트곡을 배출하며 미국 대중음악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모타운의 의미를 단순한 성공 수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베리 고디 주니어가 회사를 설립하던 당시만 해도 미국에는 흑인이 소유한 음반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음악 산업에는 뚜렷한 인종 장벽이 존재했다. 라디오 방송국 역시 인종에 따라 사실상 분리된 상태였다.

R&B 곡들은 팻 분이나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백인 아티스트가 커버해야만 백인 관객에게 닿을 수 있었다. 성공하려면 흑인 중심의 R&B 시장과 백인 중심의 팝 시장 모두를 공략해야 하는 상황, 모타운은 바로 그 장벽을 넘어선 레이블이다.

이를 위해 음악뿐 아니라 유통과 마케팅 전략까지 치밀하게 설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바니 에일스의 영입이다. 고디는 대형 유통사와 팝 라디오 업계에 폭넓은 인맥을 가진 백인 사업가 바니 에일스를 영업 책임자로 기용하며, 모타운 음악이 백인 청중에게까지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초기 모타운 앨범 표지에는 아티스트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슬리 브라더스의 앨범엔 해변의 백인 연인 사진이, 미라클스의 앨범엔 원숭이 만화가 실렸다. 청취자들은 그들이 흑인인지 백인인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아티스트와 청자 사이에는 음악만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모타운의 음악 스타일은 창립자 베리 고디의 핵심 철학인 ‘젊은 미국의 사운드(The Sound of Young America)’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흑인 음악 특유의 리듬과 감성 위에 백인 대중이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팝의 멜로디와 세련된 구성을 결합하고자 했다. 인종과 세대를 넘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 그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모타운은 리듬 앤 블루스와 소울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후렴과 팝적인 편곡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전통적인 흑인 화음과 가스펠의 정서를 유지하면서도 경쾌한 비트와 대중적인 감각을 더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모타운 사운드’를 완성한 것이다.

모타운은 음악을 넘어 시대의 목소리를 기록한 곳. 워싱턴 행진 두 달 전인 1963년 6월 23일, 베리 고디의 팀은 디트로이트 ‘자유를 향한 행진’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연설을 녹음했다. 약 12만 5천 명이 우드워드 애비뉴를 따라 코보 홀까지 행진했고, 킹 목사는 1만 4천 명의 군중 앞에서 훗날 “나는 꿈이 있습니다”로 유명해질 연설의 초기 버전을 낭독한다. 이 녹음은 그해 8월 <위대한 자유를 향한 행진>이라는 앨범으로 발매됐다.

이후 모타운은 블랙 포럼(Black Forum)이라는 별도 레이블까지 설립하며 음악을 넘어 흑인 문화와 민권운동의 목소리를 품어내기 시작한다. 랭스턴 휴즈, 스토클리 카마이클, 아미리 바라카 등의 음반을 발매하며 흑인 문화와 민권 운동의 기록자 역할을 맡는다.

자동차 공장 시스템을 도입하다

앞서간 아티스트 케어 법?

1960년대를 거치며 수많은 스타를 탄생시킨 모타운. 스모키 로빈슨 앤 더 미라클스, 글래디스 나이트 앤 더 핍스, 포 탑스, 마사 앤 더 밴델라스,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다이애나 로스와 더 슈프림스, 템테이션스, 그리고 잭슨 파이브까지. 지금 돌아봐도 미국 대중음악사의 핵심 이름들이 대부분 이 레이블을 거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타운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뛰어난 송라이터들이 있었다. 스모키 로빈슨은 아티스트이자 탁월한 작곡가였고, 노먼 휫필드 역시 모타운 사운드를 구축한 핵심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전설적인 작곡팀 홀랜드-도지어-홀랜드(Holland-Dozier-Holland)는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더 슈프림스의 성공을 결정적으로 이끌었다.

1960년 배럿 스트롱의 ‘Money’가 첫 히트를 기록했고, 1961년 마블레츠의 ‘Please Mr. Postman’은 빌보드 핫 100에서 모타운 최초의 1위 곡이 됐다. 스모키 로빈슨 앤 더 미라클스의 ‘Shop Around’는 백만 장 이상 팔리며 모타운 최초의 골드 레코드를 달성했다. 1966년에 이르러 모타운은 연간 2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미국 최대 흑인 소유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흥미로운 건 베리 고디 주니어가 자동차 공장 생산 라인에서 얻은 경험을 음악 산업에 그대로 접목한 점이다. 작곡가, 가수, 안무가, 스타일리스트를 한 건물에 모아 완성품을 찍어내듯 스타를 만들어냈다.

펑크 브라더스라는 전속 세션 밴드가 모든 녹음을 뒷받침했고, 아티스트들은 음악 훈련은 물론 예절, 무대 매너, 인터뷰 방식까지 체계적으로 교육받았다. 단순한 음반사가 아닌 ‘스타 공장’이었다. 오늘날 K팝 기획사 시스템의 원형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단, 그 시스템이 촘촘할수록 아티스트의 창작 자유는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맹점도 분명 존재했다.

잭슨 파이브에서 잭슨스로

전설이 된 이름

1968년, 인디애나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잭슨 파이브는 모타운과 계약을 맺는다. 고디는 어린 마이클 잭슨에게서 ‘차세대 슈퍼스타’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본 인물이었다. 가족 그룹이라는 친근함, 어린 천재 보컬의 압도적인 재능, 강렬한 퍼포먼스, 그리고 흑인 음악의 기반 위에서도 백인 대중시장까지 파고들 수 있는 팝 감각. 그 모든 요소의 중심에는 어린 마이클이 있었다.

잭슨 파이브는 마이클, 재키, 티토, 저메인, 말론 잭슨 형제가 1965년 결성한 그룹이다. ‘I Want You Back’, ‘ABC’ 같은 연속 히트곡은 모타운 사운드를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특히 ‘I’ll Be There’은 모타운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자리를 무려 11년 동안 지키며 그룹의 대표곡으로 남는다. 데뷔 후 첫 네 개의 싱글을 모두 빌보드 1위에 올린 최초의 팀이라는 기록 역시 이들의 이름 아래 새겨졌다.

하지만 화려한 성공 뒤에서는 긴장감도 함께 커지고 있었다. 잭슨 형제들, 특히 마이클은 점점 더 큰 창작의 자유를 원했지만 모타운은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레이블 시스템과 불공정한 수익 배분 등의 이유로 결국 1976년, 모타운과의 7년 계약이 종료되자 형제들은 재계약 대신 에픽 레코드로 향한다.

문제는 이름이었다. ‘잭슨 파이브’라는 이름의 권리는 모타운이 보유하고 있었다. 결국 형제들은 새로운 이름인 ‘더 잭슨스’로 다시 출발해야 했다. 영화 속에서 잭슨 파이브가 갑자기 잭슨스로 불리게 된 배경이다. 모타운은 마이클 잭슨의 재능을 가장 먼저 발견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그 재능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벗어나야 했던 시스템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이클의 뿌리는 한 곳이었다. 1983년 모타운 25주년을 기념하는 <Motown 25: Yesterday, Today, Forever> 공연은 많은 이들을 전율케 했다. 바로 이 무대에서 그는 자신의 시그니처가 된 문워크를 처음 세상에 선보인다. 아무리 거대한 스타가 되었더라도 그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모타운이 있었음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낡지 않는 이름 모타운

모두가 춤출 수 있는 낭만

모타운의 전성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균열은 1967년부터 서서히 시작된다. 디트로이트에서는 경찰의 급습을 계기로 대규모 폭동이 벌어졌고, 6일 동안 이어진 혼란 속에 43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모타운 역시 협박 전화를 받을 정도로 긴장감 속에 놓여 있었다. 같은 해, 레이블의 핵심 히트 메이커였던 홀랜드-도지어-홀랜드(Holland-Dozier-Holland)가 저작권료 분쟁 끝에 회사를 떠나며 모타운의 중심축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후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움직인다. 1969년 로스앤젤레스에 지사를 세웠고, 그 당시 새로운 스타였던 잭슨 파이브의 주요 작업 역시 LA에서 진행됐다. 1972년 6월 14일, 모타운은 모든 사업 운영을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한다고 공식 발표한다.

LA 시기의 모타운은 음악을 넘어 영화 산업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레이디 싱스 더 블루스>, <마호가니>, <더 위즈> 등은 작품들이 잇따라 성공을 거두며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시기의 모타운을 두고 본질적인 무언가가 사라졌다고 회상한다. 디트로이트에 뿌리를 둔 정체성, 노동자들의 에너지 속에서 태어난 독특한 현장감이 점차 희미해졌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1988년, 베리 고디는 결국 MCA 레코드에 레이블을 매각한다. 이후 모타운은 폴리그램과 유니버설 뮤직 그룹을 거치며 오늘날까지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1985년 에스더 고디 에드워즈가 설립한 이 박물관은 과거 ‘Hitsville U.S.A.’라 불렸던 모타운 본사 건물에 자리하며 수많은 전설이 탄생했던 그 공간을 추억하는 중이다.

가족에게 빌린 800달러로 시작했던 작은 레이블이 30년 만에 미국 음악 산업의 역사를 바꾼 거대한 기업이 된 일. 모타운이 남긴 유산은 단순한 기업의 성공담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타운 음악은 노동계층의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 낙관을 이야기했고, 흑인과 백인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함께 듣고 춤출 수 있는 음악이 됐다. 그것은 단순한 히트곡의 집합이 아니라, 미국 사회가 변화하던 순간을 함께 공유하고 또 같이 나아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