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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서울의 바에 주목하는 이유
2026-10-15T14:53:34+09:00
서울의 바

늦깎이에서 선두 주자가 되기까지.

관광객들이 여행지를 선택하는 기준에 최근 새로운 요소가 하나 더해졌다. 그 도시에 가볼 만한 바가 얼마나 있는지다. 여러 바를 옮겨 다니며 다양하게 잔을 즐기는 바 호핑에 적합한 동네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다른 이유는 다 제쳐두고 바 하나만 보고 목적지를 정하는 사람까지 있다.

그리고 지금, 서울 역시 바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방문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름난 바가 여럿 모인 청담동에서는 세계 각지의 외국인 관광객이 칵테일 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수십 년간 소주가 장악해 온 나라에서, 서울의 바는 어떻게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인정까지 받게 됐을까.

아시아로 판이 넘어왔다

하나의 중심지가 된 서울

얼마 전 마카오에서 올해의 아시아 50 베스트 바 리스트가 발표됐다. 영예의 1위를 차지한 주인공은 바로 광저우의 호프 앤 세서미(Hope & Sesame). 세계 29위로 데뷔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아시아 정상을 거머쥐었다. 게다가 중국 본토 바가 1위에 오른 첫 사례이기도 하다. 이 한 곳의 행보만 봐도 지금 아시아 바 씬이 얼마나 빠르게 바뀌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서울의 바 호프 앤 세서미 바 레오네
©호프 앤 세서미, 바 레오네

사실 더 큰 사건은 그전에 있었다. 지난해 홍콩의 바 레오네가 아시아를 넘어 월드 50 베스트 바에서 1위를 기록한 것이다. 2009년 시작된 이 리스트에서 아시아 바가 세계 정상을 차지한 건 사상 처음 있는 일. 오래도록 런던과 뉴욕이 휘어잡던 판에 아시아가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바 문화의 뿌리는 서구에 있다. 아시아의 바 역시 오랜 시간 미국과 유럽의 형태를 그대로 가져오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가와 지역의 정체성을 녹여낸 공간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호프 앤 세서미 역시 광둥요리와 화교 사회 음식에 대한 기억을 잔에 옮겨내는 공간을 표방한다. 기존의 바 문화와 지역성의 결합은 지금껏 없던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냈고, 이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씬에 새로운 바람이 될 수 있었다.

서울은 어떨까? 3년 연속 한국 최고의 바로 호명된 제스트, ‘서울에서 가장 쿨한 신규 칵테일 스폿’이라는 평을 받은 M+MS를 포함해 총 네 군데가 올해의 아시아 베스트로 자리매김했다. 이 외에도 공간과 찰스 H, 르 챔버, 소코가 100위권에 안착하는 쾌거까지. 순위 변동이야 있었지만 대부분 자신의 자리를 지켜냈다.

서울의 바 제스트
제스트는 2026년 한국 최고의 바로 선정됐다. ©제스트

데이터만 놓고 보면 가장 두드러지는 도시가 서울은 아니다. 방콕은 50위권에 여덟 곳을 진입시켰고, 홍콩과 중국 역시 각각 일곱 곳이 들어섰다. 하지만 올해 리스트는 무려 22개의 도시에 걸쳐 있다. 신규 진입만 열네 곳. 이제는 하나의 도시가 결과를 견인하기보다는, 아시아 곳곳이 중심이 되어 함께 문화를 끌어간다. 서울 역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여러 중심축 중 하나가 된 것이다.

후발주자 서울의 성장기

플레어에서 싱글몰트까지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은 플레어 바가 주름잡고 있었다. 당시 바텐더의 덕목은 마술이나 다름없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겸비하는 것. 1992년 양재에 1호점을 낸 미국식 패밀리 레스토랑 T.G.I.F가 실어 온 문화였다. 미국에서 이 유행이 자리 잡은 게 1980년대 중반이었으니, 세계 기준으로 따지자면 한참 뒤처진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 플레어 바의 인기가 한풀 꺾이자 그 빈자리를 채운 건 또 다른 새로움이었다. 하나는 2000년대 후반의 믹솔로지다. 바텐더들이 신선한 과일과 허브를 직접 다루기 시작한 것인데, 지금이야 당연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당시엔 적잖이 낯선 광경이었다. 칵테일에 풀이 들어간다며 신기해하는 손님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서울의 바
©영화 <Shaken & Stirred>

다른 하나는 싱글몰트 전문 바의 태동이다. 양주를 파는 룸살롱이나 모던 바와 구별되려면 무언가 다른 게 필요했고, 그 자리를 싱글몰트가 채웠다. 위스키를 병으로 사서 마시는 대신 수십 종을 갖춰두고 잔 단위로 골라 마시게 하는 방식. 특정 브랜드 몇몇만 구비하는 경우가 태반이던 시절이었기에, 다채로운 위스키 라인업은 확실한 차별점이 될 수 있었다.

판이 실제로 뒤집힌 건 2013년이다. 한남동에 자리한 스피크이지 몰타르와 볼트+82, 커피바 K 세 곳이 나란히 인기를 얻으면서 바 문화가 대중에게 열리기 시작했다. 성격은 제각각이었다. 몰타르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스피크이지 형식을 내세웠고, 볼트+82는 벽면을 위스키로 가득 채워 압도하는 쪽을 택했다. 그 뒤로 청담동 바들도 달라졌다. 커버 차지를 따로 받는 게 이상하지 않게 됐고, 풍성한 위스키 목록은 어느 바나 갖춰야 할 기본이 됐다.

사람이 사람을 키웠다

오너 바텐더의 시대

시장이 커지자 바텐더에게 필요한 역량도 달라졌다. 더 이상 눈길을 사로잡는 플레어 바텐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클래식 칵테일을 얼마나 퀄리티 있게 만드는지, 본인만의 시그니처가 있는지가 더 큰 기준이었다. 그리고 2014년 무렵부터는 그 역량을 갖춘 바텐더가 직접 바를 여는 흐름이 시작된다.

그 변화의 한복판에는 청담동의 터줏대감, 르 챔버가 있었다. 르 챔버는 각기 다른 해에 바텐딩 대회에서 우승한 바텐더 세 명이 함께 차린 공간이다. 그중 엄도환 바텐더가 해외 게스트 바텐딩에서 오너 바텐더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 이곳의 출발점이 되었다. 오너 바텐더는 회사에 소속되는 대신 바텐더가 자기 이름을 걸고 바를 차린다는 개념. 당시 서울에는 경영과 접객을 모두 도맡는 바텐더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서울의 바 르 챔버
르 챔버 임재진, 엄도환 오너 바텐더 ©디아지오

르 챔버는 시작할 때부터 그다음을 염두에 뒀다. ‘우리가 잘 안되면 다음 주자가 나타나기 어렵겠다’라는 사명감이 있었다. 첫 마음가짐부터 달라서였을까? 르 챔버는 머지않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다. 2016년 아시아 50 베스트 바에 25위로 첫 진입에 성공한 뒤, 지금까지 매년 리스트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진짜 유산은 순위가 아니다. 업계에서 르 챔버는 ‘바텐더 사관학교’로 여겨진다. 이곳을 거친 바텐더의 수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함께 일하던 박범석, 홍두의 바텐더는 파인앤코를 냈고, 이진록 바텐더는 블러드앤샌드를 차렸다. 비슷한 시기에 자리 잡은 앨리스 청담 역시 같은 역할을 했다. 아시아 베스트 바 2위에 빛나는 제스트의 김도형 대표가 바로 앨리스 청담의 헤드 바텐더였다.

서울의 바 크리켓 서울
©크리켓 서울

오너 바텐더의 바에서 또 다른 오너 바텐더가 탄생하고, 그곳에서 또 다른 바텐더를 발굴하는 구조. 한국 바의 경쟁력은 이 과정을 거치며 끊임없이 성장해 왔다. 올해 르 챔버는 88위를 기록했지만, 그들이 디렉팅한 M+MS가 42위라는 높은 등수로 데뷔했다. 단순 세대교체가 아닌 다른 가능성을 갱신한 것이다. 이것이 국내를 넘어 아시아,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서울의 바들이 만들어진 비하인드다.

이제는 무엇으로 겨루나

제스트와 바 참의 방식

2026년 현재, 바가 내세우던 것들은 더 이상 특별한 전략이 아니다. 지역색을 담아내는 일도, 지속가능성을 앞세우는 일도 전 세계가 이미 하고 있으니까. 금년 순위 4위를 기록한 방콕 드라이 웨이브의 오너 바텐더 팜은 ‘미니멀리즘이나 지속가능성 같은 개념은 이미 트렌드가 아니라 기본 요소가 됐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남는 건 뭘까. 아시아 바 씬의 무게중심은 기술에서 경험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잘 만든 칵테일은 더 이상 변별력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손님은 이미 좋은 잔을 전제하고 바에 들어온다. 차이는 그다음부터 생긴다. 서울의 바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 답을 찾고 있다.

서울의 바 제스트
(좌)Z&T (우)제스트의 백 바 ©제스트

제스트는 잔을 비롯한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축에 제로 웨이스트를 둔다. 이는 시그니처 칵테일인 Z&T 한 잔에 응축돼 있다. 농부가 기른 허브를 바텐더가 직접 수확해 담근 진, 캔과 페트병을 줄이고자 만든 토닉워터, 계절마다 바뀌는 제철 과일. 어찌 보면 Z&T는 완성된 결과물보다 만들어지기까지의 맥락과 과정이 더 중요한 칵테일인 것이다.

이들이 만들고 싶었던 건 해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름만 다른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잔뿐만 아니라 공간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했다. 인테리어는 흙과 나무, 돌 같은 자연 소재를 활용했고, 앞치마는 폐플라스틱으로 제작했다. 백 바는 술을 늘어놓는 대신 비워냈다. 전 세계가 제스트를 높이 평가하는 건 제로 웨이스트를 표방해서가 아니다. 그 개념을 여기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서울의 바 바 참
©바 참

바 참은 한국의 익숙한 음식을 칵테일로 옮긴다. 충주김밥이라는 칵테일이 좋은 예시다. 김밥을 이루는 재료를 하나씩 액체로 바꿔놓은 잔인데, 밥은 막걸리가, 단무지는 무 시럽이, 김밥 특유의 향은 참기름과 오이가 맡는다. 모두에게 익숙한 음식을 재해석한 덕분에 칵테일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어렵지 않다.

문턱을 낮추는 건 잔만이 아니다. 서촌 한옥을 고쳐 참나무로 마감했고, 간판도 숨긴 입구도 없다. 스피크이지가 한창이던 시절에 오히려 문을 열어뒀다. 지하로 내려가 책장을 밀어야 들어갈 수 있는 바들 사이에서, 누구나 그냥 걸어 들어오는 바를 택한 것이다. 두 사례가 보여주듯, 서울의 바들은 지금 아시아 바 씬이 요구하는 지점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통과하고 있다.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

앞으로의 30년은 어떨까

지난 5월, 밀라노가 서울의 바텐더 여섯 명을 초대해 게스트 바텐딩을 열었다. 월드 50 베스트 바 7위에 오른 모에비우스 밀라노가 도시 차원의 환대 행사 기간에 맞춰 마련한 ‘Seoul Takeover’다. 모에비우스의 오너 로렌조 쿠에르치는 3년 전 처음 서울에 다녀온 뒤로 휴가 때마다 서울을 찾는다고 말한다. 패션이든 디자인이든 서울은 10년쯤 앞서 있는 느낌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서울의 바 모에비우스 밀라노
Seoul Takeover 행사 현장 ©모에비우스 밀라노

아예 서울의 방식을 차용하는 공간도 생겼다. 싱가포르 지거앤포니 그룹이 올해 문을 연 한국식 칵테일 다이닝 바 BOP는 첫해에 아시아 베스트 52위로 이름을 올렸다. 이곳을 구상한 건 그룹의 공동 오너이자 한국 출신인 우노 장 바텐더. 그가 만든 건 한국 재료를 쓰는 바가 아니라, 끼와 정, 흥이라는 세 단어를 중심으로 한국 사람이 술 마시는 방식을 옮겨놓은 공간이다.

물론 모든 게 순조롭지는 않다. 세계 순위권에 오르는 바가 있는가 하면 문을 닫는 바도 있다. 주세 때문인지 칵테일 한 잔의 가격 역시 쉽게 내려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지금 서울의 밤이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축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서울은 30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오며 타국의 문화를 배워 익히고, 그 위에 고유의 재료와 이야기를 얹고, 이제는 그 방식을 전파하는 자리까지 왔다. 오늘 밤 들어 올릴 칵테일 한 잔의 건배사는, 앞으로도 우상향을 그릴 한국의 바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