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소주를 외면하고 있다. 알코올을 멀리하고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흐름이 찾아오자, 소주는 모든 주류 중에서 맨 먼저 표적이 됐다. 소주 판매량은 최근 급감했고, 대학가의 학생들조차 초록 병을 찾지 않는다. 술이 미식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분위기 역시 한몫을 했다. ‘희석식 소주는 싸구려 술’이라며 수많은 애주가가 다른 주종으로 눈을 돌렸다. 그야말로 소주의 수난 시대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이 소주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지금도 어느 식당과 술집에 가도 소주를 찾을 수 있고, 해외에서도 한국 술이라 했을 때 1순위로 떠올리는 건 소주다. 희석식 소주는 정말 부정하고 부끄러워해야만 하는 존재일까?
대한민국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다
지치고 힘들 때 내게 기대
인류 문명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를 꼽자면 단연 술이다. 인류가 300만 년을 이어온 수렵 채취를 멈추고 농사를 시작한 이유가 술 때문이라는 주장이 존재할 정도니까. 고단한 인간의 삶 속에서 술은 잠시나마 현실의 무게를 잊게 해주는 신의 선물이었다. 오늘날의 절주 트렌드는 어쩌면 우리의 삶이 술이라는 위로 없이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윤택해졌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귀한 액체가 모두에게 평등했던 것은 아니다.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에게 곡물로 술을 빚는 건 사치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흉년이 들 때마다 맨 먼저 내려진 것이 금주령이었던 이유다. 특히 과거의 소주는 쌀 10kg을 쏟아부어야 겨우 1L를 얻을 수 있는 고도의 기술과 자본의 집약체, 즉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우리나라의 소주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일제는 집집마다 술을 빚던 가양주 문화를 금지했고, 근대식 연속증류 방식으로 생산한 주정을 물에 희석해 만든 신식 소주를 들여왔다. 값비싼 술이었던 소주를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게 되자, 서민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소주를 찾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희석식 소주의 시초가 되었다.

분명 희석식 소주는 뼈아픈 역사의 흔적이다. 이 때문에 국산 주류가 설 자리를 잃었고, 수많은 전통 양조법이 흔적도 없이 소실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결핍의 시대를 버티게 해준 생존 도구이기도 하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고 소주 소비량이 급증한 것도, 정부가 소주 가격에 민감하게 개입하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싸구려 술이라고 폄하하기엔, 소주에는 한국 현대사의 땀과 눈물이 너무나도 깊게 배어 있는 것이다.
맛없다고 놀리지 말아요
비어 있어 아름다운 여백의 미학
희석식 소주를 향한 가장 흔한 비판은 ‘맛’이다. 개성 있는 향도, 원재료의 풍미도 느껴지지 않는 알코올 그 자체라는 혹평을 달고 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비어 있음이야말로 소주가 가장 평등한 술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와인이나 위스키처럼 맛이 권력이 되는 술은 필연적으로 장벽을 세운다. 포도의 품종을 공부하고 오크통의 숙성 연도를 따지는 행위는, 때때로 취향이라는 명목하에 계급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소주는 공부가 필요 없다. 대기업 회장이든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든 초록 병 앞에서는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나누게 된다. 그저 함께 잔을 부딪치며 느슨해지는 시간을 즐길 뿐이다.
소주가 선사하는 평등함은 음식에도 공평하게 적용된다. 애주가나 전문가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주류는 대체로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다. 때문에 단독으로 즐기기에는 훌륭하지만, 페어링에 있어서는 상성을 타기 마련이다. 반면 백지에 가까운 소주는 어울리지 않는 짝을 찾는 게 더 어렵다. 한식은 물론 중식이나 양식, 회나 기름진 음식 등 안주를 한껏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의 스펙트럼은 소주를 따를 자가 없다.

우리는 왜 술을 마시는가? 전 세계를 막론하고 음주의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인 유대’를 위함이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소주가 분명한 강점을 지닌 술이다. 누구와 함께해도 어색하지 않은 보편성, 어떤 음식과도 어울리는 범용성,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접근성까지. 거기에 지갑 사정을 어루만지는 배려심까지 갖추지 않았나. 적어도 한국의 술자리에서 소주를 고르는 건 적잖이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다.
소주가 세계에서 주목받는다
Z세대의 파티 드링크가 된 사연
그렇다면 소주는 한국인끼리만 통하는 로컬 전용 술로 소비될 운명인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최근 그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소주가 국경을 넘어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 주인공은 한때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지금은 조금 잠잠해진 과일소주다. 근 5년간 과일소주의 수출액은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특히 미국에서는 파티용 술로 새롭게 부상하는 중이다.

외국 소비자들은 과일소주를 가볍고 부드러운 보드카처럼 느낀다. 알코올의 독한 맛과 향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입문용 주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것이다. 와인이나 맥주 같은 전통적인 주류보다 RTD(Ready-to-Drink)를 찾고, 저도수에 상큼 달달한 술을 선호하는 요즘의 글로벌 주류 트렌드와도 완벽히 맞물린다.
거기에 자몽 맛 소주에 자몽 과육을 추가한다든지, 다른 음료나 술을 섞어 칵테일처럼 즐기는 모습도 눈에 띈다. 칵테일을 마실 거라면 보드카나 진이 낫지, 왜 소주를 선택하냐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고도수 술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은 알코올 특유의 타는 듯한 느낌을 가리기 위해 강한 시럽이나 주스를 섞어야 한다. 하지만 소주는 그 자체로 부드러워 약간의 변주만 더해도 편하게 마시기 좋다. 술이 앞서기보다 섞이는 재료의 풍미를 끌어올리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소주의 약점으로 여겨졌던 향취의 부재는 되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되었다. 당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소맥과 폭탄주가 이를 증명하지 않았나. 그리고 그 가능성은 멈추지 않고 진화 중이다. 최근에 출시된 두쫀쿠 맛 제품만 봐도 소주가 얼마나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품어내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으로도 소주는 더욱 무궁무진한 색채로 덧입혀질 예정이다.
강경 소주파를 위한 실전 음용 가이드
소주에도 개취가 있다
브랜드마다 뭐가 다를까?
희석식 소주는 어느 브랜드든 생산 방식이 거의 동일하다.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더하는 식이다. 베이스가 되는 주정은 대부분 같은 곳에서 공급받기에, 브랜드들은 주로 물을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운다. 물론 물은 모든 주조의 핵심이지만, 소주의 경우 물만으로 유의미한 맛의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결국 어떤 감미료를 선택하고, 배합 비율을 어떻게 가져가는지가 미묘한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최근의 제로 슈거 열풍 역시 냉정하게 보면 마케팅에 가깝다. 소주 업계는 그 전부터 이미 과당을 꾸준히 줄이고 대체 당을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로 타이틀을 단 제품과 일반 소주의 성분을 살펴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소주 칼로리의 80% 이상은 당이 아닌 알코올 자체에서 나온다. 그러니 당이나 칼로리를 고려하기보다 본인의 입맛에 가장 잘 맞는 제품을 선택하는 게 더 합리적인 음주법이다.
차갑게 마시는 게 다는 아니다
소주는 차게 마시는 게 기본값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가게에 따라 얼음 바구니에 담아주거나 살얼음이 된 슬러시 소주를 구비해두기도 한다. 낮은 온도가 소주 특유의 알코올 향을 눌러 깔끔한 목 넘김을 선사하기 때문. 반면 제주도에서는 실온에 보관한 노지 소주가 보편적이다. 차가운 기운에 가려졌던 단맛과 알코올의 질감이 선명해져서 소주 본연의 맛을 즐기는 사람에게 적합한 방법이다.
재밌는 사실은 과거에는 소주를 니혼슈처럼 데워 마시기도 했다는 점이다. 냉장 시설이 부족하고 소주의 도수가 30도에 달하던 20세기 중반에는 소주를 중탕해 마시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높은 도수의 날카로운 타격감을 온도로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다만 도수가 낮아지고 감미료가 첨가된 오늘날의 소주는 데워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굳이 시도하지는 말자.

진짜 고수는 이렇게도 마신다
짜배기
일종의 한국식 온더록스. 맥주잔이나 글라스에 얼음을 채우고 소주를 부어 마시는 방식이다. 단순하지만 주당 사이에서는 즐겨 마시는 이가 더러 있고, 아예 잔술로 짜배기를 판매하는 가게도 간혹 존재한다. 얼음이 녹으면서 도수가 낮아지고, 특유의 향이 연해져 단숨에 들이키기 좋다. 소주의 양은 자유이니 컨디션에 따라, 기분에 따라 조절하도록 하자.
물 첨가
일본에만 미즈와리가 있는 게 아니다. 소주에도 충분히 물을 타서 마실 수 있다. 비율은 입맛에 맞춰 조절하면 된다. 제일 많이 알려진 비율은 은지원의 레시피. 맥주잔에 절반가량 소주를 채운 뒤 소주잔 한 잔 정도의 물을 섞으면 완성이다. 보다 부드러운 목 넘김으로 술술 들어가지만, 덕분에 순식간에 취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