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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의 외로움을 위로해줬던 그것들 ① – 80/90년대
2023-02-22T17:55:36+09:00

나름의 낭만이 있었던 추억의 ‘라떼 시절’ 성인물들.

성적 욕망의 표상, 포르노에 대한 정당한 가치판단은 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그 자체로 자명하거나 선험적인 것이 아닌 점을 인정한 다음에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성적(性的) 행위를 묘사한 소설, 영화, 사진, 그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포르노. 참으로 양가적인 대상이다. 천박하다고 욕하면서도 도대체 뭔가 싶어 보게 만드는 이율배반적 관음증을 유발하고, 좋다고 보면서도 쉬쉬하게 되니 말이다. 혹자는 포르노를 보면 비정상적 성 관념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도대체 포르노 좀 마음 편하게 볼 수는 없을까.

이러한 정신 분열적 현상이 성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욕구와 그것을 건전하게 다스리려는 사회적 제재의 충돌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모두가 알다시피 포르노로 통칭하는 성적인 콘텐츠의 내용과 수위, 소비·생산·유통 방식은 정치적 의지나 사회적 인식, 경제적 조건, 지역 등 여러 요인에 다양하게 조절되고 통제된다(유교 성리학으로 성에 대한 금기가 절정에 달했던, 조선 시대 양반들이 즐겼던 춘화(春畵)는 오늘날의 ‘야애니’보다 여러 면에서 수위가 훨씬 높다).

그 말인 즉, 포르노의 역사와 이를 둘러싼 사회·문화·정치적 배경을 돌이켜 본다면(포르노의 역사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른 글을 통해 다룰 예정이다), 우리가 가진 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고 통제받고 변해왔는지를 좀 더 면밀히 반추해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적 욕망의 표상으로서의 포르노에 대한 정당한 가치판단은 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그 자체로 자명하거나 선험적인 것이 아닌, 여하한 조건들 속에서 ‘만들어진’ 자의적인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 다음에 가능할 것이다.

서설이 다소 길었다. 각설하고, 과거 우리의 적적함을 달래주고 휴지 산업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한 성인물들을 살펴보며 아련한 추억을,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성의 의미와 실천을 고민해보자.

성인용 콘텐츠 부흥의 견인차, 비디오테이프

80년대는 본격적으로 성인물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성인물을 널리 이롭게 하는데 가정용 비디오테이프 ‘VHS’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1985년 한해에만 연간 2,000여 개의 비디오 대여점이 생겼는데, 이는 가정용 비디오테이프의 폭발적 인기를 가늠하게 해준다.

비디오테이프를 매개로 한 성인물은 집에서 남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볼 수 있고, 이전까지 주로 소비됐던 성인 잡지와 달리 복제가 가능했으며, 무엇보다 다양한 국적과 포맷의 성인물을 더 리얼하게(?) 즐길 수 있게 해주었기에 성인물 소비의 ‘계몽’을 불러일으켰다.

마침 당시 국내외 다른 여러 상황도 뒷받침되었다. 짧게나마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으로 섹스에 대한 관대함이 주어졌고, 일본에서 본격화된 AV(성인용 비디오를 뜻하는 ‘Adult Video’의 축약어)와 미국에서 가정용 캠코더 보급으로 급증한 홈메이드 포르노 같은 신문물이 알음알음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1982년 <애마부인>을 시작으로 에로영화 산업 발전과 비디오테이프 보급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물론 전 세계 포르노 시장 규모가 1,500억 달러(약 169조 원)에 달하는 오늘날에도 포르노를 제작과 배포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마당에, 당시 포르노의 유통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80년대에는 해외 성인물의 희소성이 매우 높았는데, 세운상가나 용산전자상가 혹은 으슥한 굴다리 밑 보부상들에게서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을 주고 구매를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렵게 구하더라도 막상 틀어보면 ‘뽀뽀뽀’나 ‘전원일기’가 나오는 등 ‘눈탱이’를 맞는 경우도 많았다. 간혹 학교에서 부모님이 장롱에 숨겨놓은 비디오테이프를 가져와 싼값에 빌려주는, 시대를 앞서 공유경제를 실천한 마음씨 착한 친구도 있었다.

90년대로 가며 차츰 이러한 불법적인 비디오테이프의 양과 종류가 많아졌지만, 이후 상술할 인터넷의 보급과 DVD의 발달로 인해 비디오테이프를 매개로 한 성인물의 번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또한, 당시 유입되던 홈메이드 포르노나 AV가 국내 성인물 풍토를 비정상적으로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홈메이드 포르노의 경우는 최소한의 작품성이나 스토리 없이 철저히 동물적인 성행위만을 담아내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일본 AV의 경우는 야쿠자 및 극단적인 상업주의와 결합해 도를 지나친 선정성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성에 관한 모든 것을 철저히 금기시하고 통제해오며 성인물에 대한 합리적 논의의 장을 마련하지 못한 한국에서 이러한 성인물의 음성적인 유입이 향후 불법적이고 변태적인 성인물에 대한 의존증과 모방으로 이어졌다는 평가이다.

그나마 80-90년대에 정신줄 부여잡고 더 많은 이들에게 향유됐던 비디오테이프 기반 성인물은 속칭 ‘빨간 딱지’ 에로영화였다. 

박스오피스 1위까지 차지했던, 한국 에로영화의 전성기

당시의 에로영화는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당시 에로영화들은 포르노라고 부르기 무색할 정도로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이름난 에로영화들은 나름 치밀한 스토리 전개와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도 겸하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90년대까지도 에로영화만을 취급하는 극장이 꽤 있었으며, 극장 간판과 길거리 극장 전용 벽보판에 적나라한 홍보 그림과 포스터가 걸려있을 정도로 에로영화의 인기는 뜨거웠다. 그만큼 당시는 한국 에로영화의 전성기였으며, 극장과 비디오테이프 시장 모두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는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성인물이었던 탓에 누구나 떳떳이(?)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도 인기에 한몫했다.

안소영 주연의 1982년 개봉작 <애마부인>의 개봉은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개봉 4개월 만에 31만 5천 명의 경이적인 관객 수를 확보하고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등  소위 ‘대박’을 친 <애마부인>을 기점으로, 충무로에는 에로영화로 한몫 크게 챙길 수 있다는 기대가 부풀어오기 시작한다.

이후 90년대까지 <애마부인>을 비롯하여 <산딸기>, <뽕>, <정사수표>, <변강쇠>, <씨받이>, <젖소부인 바람났네> 등의 작품은 많게는 10편이 넘는 시리즈로 개봉하며 그 명맥을 이어갔고, 안소영을 비롯해 진도희, 오수비, 진주희, 이수진, 강수연, 이미숙, 김부선(!) 등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굵직한 스타들의 탄생을 알리기도 하였다.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당시 에로영화들은 포르노라고 부르기 무색할 정도로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통상 ‘하드코어’와 ‘소프트코어’로 나뉘는 포르노에서 한국 에로영화는 소프트코어로 분류할 수 있는데, 심지어 정사 장면도 많지도 그리 많지도 않고 노출 수위도 매우 약한 편이다(심지어 에로영화인데 주요부위 노출이 아예 없는 작품도 있다). 오히려 요즘 나오는 19금 영화들의 정사신이 더 야하게 느껴질 정도.

또한, 이름난 에로영화들은 나름 치밀한 스토리 전개와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도 겸하고 있었다. <애마부인>의 안소영은 1982년 제18회 백상예술대상 신인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었으며, <뽕> 1편에서 열연한 이미숙 그리고  <씨받이>의 강수연 및 임권택 감독은 그 이름만으로도 영화의 작품성을 가늠케 한다.

반작용도 따랐다. 이러한 영화들에 흥행에 편승해 철저히 비디오용으로만 제작된 에로영화들도 우후죽순 출시한다. 이와 같은 부류의 에로영화들은 앞선 유명 에로영화와 같은 작품성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여배우의 가슴으로만 승부수를 띄워 에로영화 시장의 물을 흐린 주범이라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에로영화에 따르는 규제도 성인물 산업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해석된다. 영상물등급위원회(*1976년 한국공연윤리위원회, 1986년 공연윤리위원회, 1997년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가 지금까지도 집요하게 고수하고 있는 ‘음모 노출 금지’, ‘체액 표현 금지’, ‘사회 정서에 반하는 내용 금지’ 등의 과도한 규제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수요(위)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작품에 따라 일관성 없이 적용되며 에로영화 제작을 사양산업으로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성인물의 새로운 차원을 연 ‘야겜’과 ‘동급생’

90년대의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동급생>이라는 게임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90년대 가정용 컴퓨터 보급과 함께 성인물의 새로운 차원을 연 기념비적 미연시 게임이다. 성교육과 연애 공부를 <동급생>을 통해 배웠다는 이들도 꽤 많을 것이다. <동급생>의 성공 이후 이를 벤치마킹한 ‘야겜’(에로게)들이 90년대 대거 출시되었으나, <동급생>의 아성을 따라갈 만한 작품은 몇 없었다.

일본 게임 업체 엘프(elf)에서 1992년 선보인 <동급생>은 MS-DOS 기반 도트 그래픽이 표현할 수 있는 (노가다의 산물인) 최상의 그래픽을 선보인다고 평가받는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미소녀 캐릭터들을 보고 있자면 왜 일본 애니 덕후가 되는지 이해가 갈만하며, 게임의 궁극적인 목적인 미소녀들과의 정사 장면은 실제 ‘야동’보다 수위가 높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한국에는 정식발매되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들여온 건지 무려 한글 패치까지 된 불법 복제물이 대거 유통됐다. <동급생>을 처음 접했던 중학생 무렵, 게임을 보유하고 있던 친구는 거의 모든 학생으로부터 떡볶이, 라면, 과자 등 엄청난 뇌물 공세를 받았고, 간택된 이들은 <동급생>이 담긴 플로피 디스크를 신줏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집으로 들고 갔던 기억이 있다.

<동급생>에 대한 후한 평가는 단지 외설적인 부분에만 있지 않다. 지금으로 따지면 약간의 오픈월드 요소도 있고, 여성 캐릭터와의 성공적 만남을 위해서는 스탯을 고루 올려야 하는 RPG 육성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대화 선택에 따라 여성 캐릭터의 반응이 달라지는 등 분기 요소까지 겸해 게임 자체의 완성도도 높은 편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성격 급한 남학생들은 주요 장면만 모아 놓은 컬렉션을 감상하거나 공략집으로 스피드 플레이를 하긴 했지만.

또 다른 <동급생>의 의미는 게임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태도이다. 90년대 중반으로 향하며 한국에서도 점점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상이 강조되기 시작했는데, 다른 미연시 게임들과 달리 <동급생>의 여성 캐릭터들에게서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궁극적인 목표는 섹스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반감되는 점은 있지만 말이다.

<동급생>의 성공에 힘입어 엘프는 <동급생2>와 <하급생>, <노노무라병원 사람들>, <애자매>, <드래곤 나이트> 등의 성인용 미연시 게임을 후속작으로 출시했는데, <동급생2>는 한국에서 정식 발매되기도 하였다. 당연히 19금 장면은 모두 삭제된  앙꼬없는 찐빵으로 출시되어 별 재미를 보지 못했고, 저작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시절이라 그런지 체감상 99% 유저들은 불법 복제본으로 플레이하였다.

<동급생>의 인기가 워낙 어마어마해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지만, 마니아들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나름 명작들도 존재했다. ‘야겜’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지만, 가이낙스(Gainax)에서 1993년 출시한 명작 <프린세스 메이커 2> 또한 잼민이들의 ‘해피타임’을 책임졌던 게임이다. 일명 ‘dd 파일’이라 불리는 시스템 파일을 삭제하면, 주인공의 전라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방식이었다.

90년대 말 컴퓨터 그래픽의 발달에 힘입은 고차원(?) 성인용 게임도 등장했다. <미행> 시리즈가 대표적인데, 여성 캐릭터의 뒤를 쫓아 미행하다가 정사를 치르는 내용의 정신 나간 세기말 막장 감성을 보여준 3D 게임이다. 실제로 이러한 성인용 미연시 게임들은 게임 완성도와 상관없이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에로게 게임이 미성년자도 구하기 쉬울 정도로 관련 법규가 엉망이었으며, 강간이나 로리타 성향의 갈 때까지 간 내용들이 일부 청소년들의 실제 성범죄로까지 이어져 점점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물의와 함께 단기간에 급증한 야겜 회사들의 과열 경쟁으로 <동급생>과 같은 공전의 히트작은 다시 나오지 못했고, 90년대 말 인터넷 보급의 확대는 더 자극적이고 사실적인 성인물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과 성인물의 폭발적 확산

90년대 말 수면 위로 떠오른 문제들은 단지 예고 수준에 불과했다.

밀레니엄 시대에 가까워지며 주류를 차지한 ‘야설(야한 소설)’, ‘야사(야한 사진)’, ‘야동(야한 동영상)’은 지금까지도 꾸준한 수요를 누리고 있는 성인물이다. ‘야설’과 ‘야사’는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 등 PC 통신 시절부터 폭발적 수요를 불러일으켰으며, 초고속 인터넷(ADSL)의 보급 확대는 고화질, 고용량의 ‘야동’이 폭발적으로 공유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인터넷의 전파력 때문에 ‘야동’은 그야말로 전례 없는 성인물의 발전(?)을 이룩하게 되는데,  초창기 ‘소리바다’, ‘웹스터’와 같은 파일 공유 사이트부터 당시부터 우후죽순 생겨난 웹하드 사이트를 통해 천문학적 숫자의 ‘야동’이 전 세계 곳곳에 침투하게 되었다.

게다가 VHS로 제작된 AV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시킨 성인물로 시작하여 DVD 등장 이후 고화질로 인코딩된 ‘야동’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면서, 성인물 수요층의 눈이 높아지고 비디오테이프나 에로영화, 잡지 같은 종래의 성인물 형태가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강제 추방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인터넷 기반 성인물이 주류가 되며 생긴 부작용은 그 파급력만큼이나 심각했다. 특히 ‘야동’의 경우 초창기 소비 방식은 유명 AV 배우들의 유명 품번을 찾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는데, 이후 더욱더 자극적이고 심지어는 몰카와 같이 불법적인 방식으로 촬영하거나 토사물, 배설물, 수간 등을 다룬 그로테스크한 영상이 확산되면서 커다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게 된다. 인터넷에서 돈 냄새를 맡은 포르노 제작 업체들이 더욱 경쟁적으로 창작(?)에 임한 결과이다.

이러한 현상을 부추긴 데는 제도적 미비와 문화적 조건의 미성숙도 한몫했다. 실제로 인터넷상에 유포되는 불법 성인물 및 ‘몰카’와 같은 범죄형 콘텐츠에 대한 제도적 조치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정비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한, IMF와 세기말이라는 시대적 특수성, 해외 문물의 무분별한 도입, 무지성적인 성에 대한 금기시로 인한 반발 심리 등은 여과 없는 성인물 소비와 유통에 한몫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하지만 90년대 말 수면 위로 떠오른 이러한 문제들은 단지 예고 수준에 불과했다. 새롭게 출현한 기술 및 자본과 결합한 2000년대의 성인물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 또 다른 차원의 시장과 성적 욕망을 개방시키게 된다.

… ②편에서 계속

*번외 – 성인 잡지와 만화

80년대부터 비디오 포르노의 두각이 나타났지만,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성인물들도 꾸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 당시로서는 구하기 쉽지 않았던 불멸의 잡지 <플레이보이>와 같은 해외 성인 잡지뿐만 아니라, <선데이서울>, <토픽라이프>, <주간경향>, <주간중앙>, <주간여성>, <핫윈드>, <포토스캔들> 등의 국내 잡지도 나름 선전을 하였다. 사실 누드 사진은 전무하고 대부분 약간의 노출이 있는 옷이나 수영복을 입은 여성들의 사진이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감지덕지하던 당시였다.

성인 만화책 또한 부족한 성인물 시장에서 단비 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성진국’ 일본의 <크라잉 프리맨>은 성인 만화 필독서나 마찬가지였고, 한국에서도 이현세의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김삼의 <대물>, <야행> , 한희작의 <데카메론>, <압구정 아리랑> 등의 성인 만화가 인기를 끌었다. 이 역시도 과한 선정성을 보이지는 않았으며,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같은 작품은 사회 고발과 여성주의적 코드까지 등장하며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다만, 19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다른 유형 매체와 마찬가지로 성인 만화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온라인상에 불법으로 스캔한 만화책이 유포된 탓도 있지만, 당시 신선한 주제나 작화가 부족했다는 회고도 있다. 양영순의 1995년 작 <누들누드>가 다소 높은 수위의 작화로 큰 인기를 끌어 1998년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되었으나, 이후 한국 성인 만화의 이렇다 할 흥행작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