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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안방에 있는 미닫이 창문을 양손으로 밀며, 그녀가 말했다. 열린 창문의 너비만큼 햇빛이 방바닥을 따라 일직선으로 곧게. 골목길 옹기종기 모인 내 또래 아이들의 웃음 가득 조잘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창 너머 방안을 한가득 채우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눈을 감고,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깥공기를 크고 깊게 가슴 끝까지 들이쉰다. 다시 최대한 창문을 끝까지 연다.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말없이 밖을 한참이나 넌지시 바라본 엄마는 짧은 소감을 내게 물었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집이지. 우리 딸, 해 들어오는 집이라 너무 좋지?”
멍하니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나는 어색함을 느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엄마의 표정이었으니까.
그때의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으니까 부모님은 꼬박 10년이 걸렸다. 한층 올라오기까지.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엄마가 말하는 ‘해가 들어오는 집’이라는 것보다, 10년을 살았던 동네의 친구들과 헤어져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학교에 가는 길을 다시 익히고, 처음 보는 낯선 동네 어른들께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생경하고 싫었다.
그럼에도 물음에 부정하지 못하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어린 나이에도 엄마가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만큼이나 좋아하시는 게 어린 내 눈에도 보이니까. 내가 느끼는 하찮고 소소한 작은 투덜거림들을 안으로 밀어둔다. 그리고 최대한 내가 지금 본 표정과 말투를 흉내 내 따라 하며, 그보다 더 신나고 활기찬 목소리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낮에도 켜야만 하는 형광등, 신선한 공기보다 가라앉아 있는 바깥 땅의 흙먼지가 더 많이 들어와서 열어도 금방 닫아야 하는 창문, 때문에 열지 않는 날이 더 많았던 시간, 갇혀있는 공기와 습기 그리고 닿지 않는 해가 만들어내는 천장 구석진 모서리에 피어난 알록달록 곰팡이, 그 곰팡이를 제거하려 희석한 락스물을 분무기에 담아 뿌리면 코를 찌르던 락스냄새, 창문 주변 들이치는 비와 습기가 들어 올려 일어나고 부풀은 벽지, 장판을 들추면 시멘트바닥과 섞인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
하지만 해가 들어오는 2층 주택 남향받이 집은, 낮에는 불을 굳이 켜지 않아도 밝다. 내 방 작은 쪽창을 열면 내 큰 목소리가 뒷집에 사는 다영이 귀에 닿고, 안 방 큰 창을 열어 앞집 제종이를 부를 수 있다.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온종일 동네를 뛰어다닐 수 있는 소통과 연결의 문이다. 환기가 되고, 해가 구석진 곳까지 잘 찾아 들어오면 곰팡이도 없다. 그래서 그 특유의 냄새도 없다. 이사를 하고 난 뒤, 엄마가 웃는 날이 많아졌고, 전보다 건강하고 활기찬 사람이 됐다. 덕분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집안 분위기도 들어오는 빛만큼 밝아졌다. 나는 아직도 활짝 열린 현관문으로 들이치던 금빛 보름달 아래, 달달달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파란 날개 선풍기 옆에서 우리 네 가족 도란도란 모여 앉아 수박을 먹던 이사 간 그 해, 여름날 밤의 향기를 기억한다.
그래도 나의 유년시절이 녹아 있는 반지하 그곳. 시간이 오래 지나서도 그 동네는 개발되지 않은 채 그때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최근에 살던 그 동네를 찾아가 한 바퀴 돌고 왔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 지하철 역에서 내려서 10분간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더운 날씨 탓에 비지땀이 흘렀다. 30여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탓에 다소 온도차가 느껴지긴 했지만, 내가 살던 그 집도 그대로 있었다. 지금이라도 주인집에 살던 동네 오빠의 이름을 부르면 내려와서 놀아줄 것만 같았다. 연탄불 떼던 그 시절의 겨울에 시간 맞춰서 아빠가 새벽에 연탄을 갈고, 작지만 그래도 있었던 마당에서 강아지를 처음으로 키워보고, 유치원에 입학하던 날 새로 산 책상 앞에 앉아서 잠옷 바람으로 찍은 사진이 지금도 앨범에 꽂혀있다. 대문 사진을 찍어 동생에게 전송하며 어딘지 알겠냐고 물었다. “거기는 뭐하러 갔어?” 나는 ‘갑자기 생각나서’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20대 시절의 기억을 잠시 떠올린다. 수중에 융통할 수 있는 보증금이 얼마 되지 않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내가 가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선택지는 반지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인중개사를 만났다. 반지하이긴 해도 매물로 나온 지 얼마 안 됐으며, 계단도 고작 3칸밖에 내려가지 않아 해가 잘 들어온다고 했다. 방범창도 잘 되어있고 월세가 다른 곳보다 훨씬 저렴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일단 약속을 잡고 방을 직접 보면 분명 괜찮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래, 계단 3개 내려간다는데, 3개인데 뭐.’ 결국 나는 그렇게 약속을 잡았다. 아직 가진 것이 녹록지 않았던 그 시절, 사실 따지고 보면 보증금과 월세를 감당하기엔 반지하만 한 것이 없다. 보증금부터 월세까지 주변 시세보다 대체로 저렴한 편이고, 작은 차이지만 지상보다 평수는 아주 조금 넓다. 경험에 비추어 약간의 불편함만 감내하면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보증금과 월세를 감당하기엔 반지하만 한 것이 없다. 경험에 비추어 약간의 불편함만 감내하면 된다.
그렇게 만난 중개사 아주머니는 “이 집이에요. 정말 계단 3칸만 내려가면 되죠?”라는 말을 시작으로 내가 당장 이 집을 계약해야 할 이유 수백 가지를 나열할 기세였다. 이 정도는 반지하라고 하기도 애매하다는 둥, 완전 지하도 아니고 창문도 커서 해도 잘 들어온다는 둥, 결로도 곰팡이도 거의 없으니 이 정도면 괜찮다는 맺음말까지.
‘이 정도’라는 반복된 단어가 귓가를 맴돈다. 멋쩍게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코가 기억을 한다. 맡아봤던 익숙한 냄새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난날의 기억을 소환한다. 누가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나는 이미 어디부터 봐야 하는지, 또 무엇을 집중적으로 체크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창문 주위와 구석진 천장 모서리, 현재 세입자의 장롱 뒤 벽지, 침대 헤드 뒤 벽지, 혹시 모르니 방범창은 한번 흔들어보며 결속은 잘 되어 있는지, 창문 앞에 다른 집이 있어서 담벼락으로 막혀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한 명쯤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중개사는 조심스레 내 표정을 살피며 다시 연신 말을 이어갔다. 도배랑 벽지는 집주인이 다시 해준다고 했고, 방범창도 현재 세입자가 들어오면서 바꾼 것이라 튼튼했다. 창문 앞은 도로변이 아닌 담벼락이라 지상에서 누군가 나를 엿보기도 쉽지 않아 보였고, 매연이 집안으로 들어올 일도 없었다. 그녀는 ‘여자분이시고 하니 차라리 이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라며 설득에 여념이 없었다. 내 눈치를 조금씩 살피던 그녀의 눈을 피해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꼴깍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사실 완전히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중개사 아주머니의 말도 일리는 있다. 어쩔 수 없다. 타협을 해야 한다.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조금 살다가 열심히 돈 모아서 올라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앞섰다. 어차피 이 집에서는 잠만 잘 건데, 해 들어오고 창문 열 수 있는 게 뭐가 중요하냐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녀가 수없이 덧붙이던 ‘이 정도, 이 정도’라는 단어를 한참 되뇌다 나는 결국 전화를 걸어 계약 의사를 전했다.
“아휴, 잘 생각했어요. 요즘 집 구하는 거 쉽지 않아. 이 정도면 위치도 좋고 맛집도 주변에 많고 지하철역도 가까워서 좋아요.”
또 그놈의 ‘이 정도.’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려는 것을 이내 꾹 참고 관뒀다.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걱정과 달리 다행히 결로는 없었고, 곰팡이가 심하지 않아서 괜찮았다. 무엇보다 그 집이 주는 포근함과 아늑함, 집주인 아주머니의 세심한 배려, 그리고 나의 경제적 상황으로 4년의 시간을 보냈다.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기생충>의 리뷰를 보다 ‘반지하’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대해 작가가 고민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때서야 절반은 지상에, 절반은 지면 아래 지하에 위치한 이 주거환경이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주거형태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경험이 있어서 그랬는지 새삼 더 놀랐다.
이 독특한 구조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이유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냉전의 분위기가 한창이던 1968년. 소위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북한의 대남 공작원 31명이 침투한 ‘1.21 사태’가 그 시작이었다. 이념이 대립하며 매 순간 전쟁의 위협에 몸서리쳐야만 했던 1970년. 정부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연면적 200㎡의 건축물에 의무적으로 지하층을 만들 것’을 건축법으로 재정했다. 비상시 지하실 공간을 방공호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이곳이 처음부터 주거용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사람이 살 수 있게 창문을 달고, 지하를 절반 정도만 걸쳐 만들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반지하다.
당연히 이곳이 처음부터 주거용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촌향도 현상으로 수도권 인구가 폭증하면서 벌어진 주택난이 도화선이 됐다. 집주인들은 애초에 주거용으로 설계된 공간이 아닌 지하실까지 불법으로 세입자를 받기 시작했다. 이를 묵인하던 정부는 1975년에 결국 지하실 거주를 합법화시켰다. 그나마 사람이 살 수 있게 창문을 달고, 지하를 절반 정도만 걸쳐 만들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반지하다.
일단 배경은 차치하고서라도, 앞서 언급했던 것에 덧붙여 반지하는 위치 특성상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비교적 -창문이 크다면 더욱 용이하고, 개인과 가족의 사생활 또한 드러나기 쉬운 구조다. 그래서 대부분 반지하 구조의 집은 먼저 방범창을 필수로 설치하고, 다시 밖에 발을 설치한 뒤 집안에 또 버티컬이나 커튼을 설치한다. 내가 방범창 결속이 잘 되어있는지 흔들어보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집 밖에서 일어나는 화재와 홍수 같은 사고에는 쉽게 대처하기 어렵다. 나를 보호하려던 도구가 도리어 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칼이 되어 돌아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나를 보호하려던 도구가 도리어 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칼이 되어 돌아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반지하는 그나마 낫다. 배수가 잘 되지 않고 지대가 낮은 지역이면 침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재는 괜찮지만 25년 전 마포구 성산동 일대의 침수, 안양시 만안구 하천범람으로 리어카에 온갖 생필품을 싣고 대피하던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한 번도 거주해본 적이 없는 주거형태일 수도 있다. 반면 누군가는 이렇게 많은 불편을 감내하며 반지하라는 공간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한 요소의 범위가 본인의 ‘생명’과 ‘안전’까지 포함돼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쉽지 않다. 아니,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올여름, 서울 강남 도심지역의 물난리로 반지하에 거주 중인 사람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사건만 보더라도 정답은 비교적 명확해진다. 타인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3대 요소 중의 하나인 ‘주(住)’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이 주거환경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