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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사랑, 지금의 사랑
2023-02-22T17:38:23+09:00

30대 남자가 연애하지 못하는 솔직한 이유.

2022년 10월

모릅니다,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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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 사랑이 어딨습니까. 몸이 움직이면 그게 사랑인 거지.” 무리한 스킨십을 거절당한 후 “저 사랑하지 않으시잖아요.”라고 추궁하는 그녀에게 인모는 아무렇지 않게 답한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거절당했다고 민망해한다거나, 집으로 가는 차 안에 흐르는 적막을 불편해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누가 봐도 어색한 상황인데, 인모의 그 뻔뻔함인지 담담함인지 모를 태도가 도리어 더 어색해 보인다.

20대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 영화 <고령화 가족>(2013) 속 인모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단순했다. ‘쓰레기 같은 놈.’ 9년이 지나 30대 중반이 된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도포 자락 입고 버드나무 아래서 수상한 이 세월 개탄하는 선비처럼 독야청청 고매한 태도를 취하기는 쉽지 않다. 인모를 이해한다. 어느 정도는.

순수하게 사랑에 내 모든 것을 걸어 볼 만한 치기를 부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렀다. 

연애가 쉽다. 아니, 어렵다. 굳이 연애를 하겠다면 그간 쌓아온 짬밥으로 적당한 아무나 꼬드겨서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다. 외모는 둘째 쳐도 경제적인 조건도 어느 정도 맞아야 하고, 성격도 맞아야 하고, 취미도 맞아야 한다. 그런데 또 그런 사람을 만나도 불타오르는 감정 같은 건 안 생긴다. 상대방이 살짝 방심해서 슬리퍼 사이로 튀어나온 엄지발가락의 털 한 가닥 같이 아주 조금만 거슬리는 게 있어도 관심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그래서 어렵다.

인모와 공감한다. “(사랑) 그런 거? 젊었을 때. 할 일도 많고, 희망도 많을 때 하는 겁니다.”라는 그의 말. 그때보다 고작 몇 살 더 먹었을 뿐인데,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하나, 계산하는 사랑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연애에 관한 많은 것에 초연해졌다는 것이다. 사실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라 이런 말이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나라 정서상 연애 시장에서만큼은 적은 나이는 아니리라. 아무튼 초연해지는 것인지 정신승리를 하는 것인지는 오은영 박사님도 모를 노릇이겠지만, 연애에 관한 내 감정은 무덤덤한 것이 사실이다. 드물긴 하지만 관심 있는 여성에게 차여도 어릴 때처럼 질질 짜지도 않고, 밀당을 시전하면 안달복달하기보다는 같이 밀어버리고,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고 예전처럼 전력투구하지도 않는다.

어느 날 문득 연애가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라고 느낀 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연애 말고도 삶의 많은 욕구를 충족시킬 대체재가 충분하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이 사회생활 연차가 늘어가며 하나둘씩 가능해졌다. 여행을 가서 좋은 숙소에 머물고, 혼자 캠핑장에서 호젓한 시간을 보내고, 골프 레슨을 받고, 헬스 PT를 받고, 게임 장비들을 사고, 친구들과 좋은 음식과 술을 마시고, 새로 나온 테크 제품을 사며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들이 내가 도저히 외롭다고 느낄 겨를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취미와 소비와 일상 루틴이 틀을 잡아가며 찾아오는 안정감은 20대 때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다. 안정감은 항상 불확실성을 경계한다. 그리고 연애라는 것은 언제나 우발적인 상황을 수반하는 불확실성의 총체이기에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좀 쉽게 말하면 연애가 지금의 안정적인 내 일상을 양보할 만큼 가치가 있는지 기회비용을 따져가며 계산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절세 미녀랑 사귀어도 옆집 순이가 예뻐 보인다는 옛말처럼, 낯선 여성과의 만남은 항상 새롭고 설렌다. 그런데, 잠시 뿐이다. 모든 사람의 근본이 똑같다는 것이 아니고, 연애라는 관계의 시작과 끝이 항상 비슷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그 사람이 예쁘든, 착하든, 다정하든 상관없이 설레고, 익숙해지고, 서운해 하고, 싸우고, 헤어지는 클리셰가 내가 오롯이 나를 위해 투자하며 얻는 재미와 안락함과 신선함을 넘어서기 어려워진다. 

운동을 하러 집을 나선 순간 받은 ‘오빠, 오늘 파스타 먹으러 가자.’는 여친의 예고 없는 문자, 일주일 내내 격무와 야근에 시달렸는데 주말에 1박 2일 강릉 여행을 가자는 제안, RTX 40 시리즈를 사려고 모아 놓은 돈을 기념일 선물 사는 데 써야 하는 상황. 누구 말마따나 이 모든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눈이 뒤집어질 여자가 있다면 좋겠지만, 글쎄다. 과연 그게 합리적인 ‘셈’일까. 

둘, 책임지기 싫어요

그런데 조금 비틀어서 보면 내가 그만큼 심적이고 물적인 여유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천방지축 20대 때는 사랑에만 올-인 해도 ‘다음’이 있었다. 강의를 빼먹어도, 한 달 용돈을 다 써도, 체력과 감정을 다 소진해도 그 책임을 대신 짊어져 줄 사람과 시간이 있었다. 떨어진 성적이야 다시 열심히 올리면 됐고, 돈이야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염치 불고하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면 됐고, 소진된 감정은 그 나이대에는 여전히 남아 있던 만남의 기회들(가장 흔한 예로, 소개팅)에 대한 기약으로 회복됐다.

그런데 지금은 그 책임들을 온전히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여자에 ‘미쳐’있다가는 인사고과 물먹기 십상이고, 흥청망청 돈을 써댔다가는 제대로 된 관짝 하나도 마련하지 못하고 비참한 노후를 맞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 지금 이 나이대에 연애를 한다면 결혼에 대한 생각을 아예 안 할 수가 없는데, 한 가족을 책임지는 사람 중 하나가 된다는 것이 부담은 연애를 연애가 아니라 하나의 의무감처럼 느끼게 만든다. 연애에 시간과 감정을 쏟아 조금씩 약해져 가는 신체와 직장 생활에 찌든 멘탈에 부하를 주는 것도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안 그래도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는 부모님과 올라가는 집값, 떡락해버린 내 주식 투자금을 만회할 궁리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은데, 연애를 시작해 또 다른 책임감까지 보태는 것은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앞서 말한 ‘계산’이 더 복잡해진다. 연애애 올인하지 않아도, 사회생활에 필요한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에너지의 디폴트값을 양보하지 않아도 되는 이성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몇 번인가는 20대의 어린 여성과 (운 좋게) 교제를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골치 아플 게 없었으니. 집 얘기, 돈 얘기, 직장 얘기, 이딴 것들 없이 친구 얘기, 연예인 얘기, 남자 여자 얘기 등등 시시콜콜한 얘기만으로도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만 오천 원짜리 삼계탕 한 그릇을 사줘도 행복해했고, 20만 원짜리 캐주얼 브랜드 백을 사줘도 고마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계산’이 필요 없다고 느꼈다. 인모의 말마따나, 생각이 아닌 몸이 가는 사랑이었다.

그래도 책임감은 따라오더라. 어느 순간 며칠간 야근을 하며 연락을 소홀히 하니 투정이 돌아오고,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병환에 주말 약속을 취소하니 ‘읽씹’을 시전하고, 무엇보다 10살 남짓 차이 나는 애인을 어떻게 만났고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이어갈 것인지에 대해 주변에 해명하는 일들이 또 다른 차원의 스트레스로 나를 짓눌렀다. 힘들다. 책임지기 싫다.

셋, 니들이 하는 사랑이 사랑일까

30대 초반에 들어 혼기가 차서 결혼을 하거나, 결혼을 하려고 연애를 하는 친구들을 한심하게 여겼던 적이 있다. 사랑을 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말하는 결혼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하는 연애, 경제적·사회적 조건하에 성사되는 관계, 마침 그 무렵 그 사람이 옆에 있었기에 하는 결혼. 마치 사람을 모아 놓고 사회자가 ‘OO명!’이라고 외치면 부랴부랴 아무나 붙잡고 머릿수를 맞추는 짝짓기 게임 같아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니들이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이 나이에 연애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도 모르고.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솔로 남자들에게 묻고 싶다. 뭐든 다 퍼줄 수 있을 것 같고, 너 아니면 죽을 것 같은, 그런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마지막으로 느낀 게 언제냐고. 그리고 앞으로 그런 사랑을 또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자면, 혹자는 그런 류의 사랑에 ‘순수한’이라는 형용사를 갖다 붙이기도 하는데, 그게 과연 정말 ‘순수한’ 사랑일까? 아니, 애초에 그게 사랑일까?

한때는 뭐든 다 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연애 경험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여성에게 다가갔던 적이 꽤 있었다. 그 마음을 받아줬던 여성도 있었고, 거절했던 여성도 있었는데, 결국 문제는 똑같았다. 대게 그런 류의 접근은 스스로를 살피지 않는다. 자기 몸과 마음이 상하든 말든 그냥 막 퍼준다. 마음이 크기 때문에 페이스 조절도 안 된다. 천천히 조금씩 친밀감을 쌓아가는 게 익숙한 대다수의 여성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문제는 그러한 사랑의 반대급부가 본인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상대방 마음의 크기도 모양도 알지 못한 채 주는 사랑은 ‘저 사람은 내가 이만큼 해주면 행복할 거야.’라는 망상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거나 반응이 신통찮을 때는 자기 자존감에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보기보다는 ‘내 사랑이 모자랐나’라는 식의 더 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연애를 몇 차례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 마음이 반드시 ‘순수’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고, 정의도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사랑에 대한 이상향을 생각하지 않고 뭐든 다 줄 것 같은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배려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계산을 하고 조건을 맞추어 하는 연애가(등쳐먹겠다는 심보는 빼고) 그 어감처럼 나쁜 것이 아닐 수 있다. 상대도 나도 불편하지 않겠다는 심산으로 맺어지기에, 나와 비슷한 조건과 환경하에서 서로 부딪힐 일도 적기 때문에 더 평화롭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어릴 때는 몰랐다. 

그 어리석음의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혼기가 지나고 나니 만날 수 있는 인구군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나이가 들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양보하고 싶지 않은 나만의 원칙들이 늘어가고, 거기다 만날 수 있는 여성의 수도 줄어들다 보니 내 계산과 셈에 들어맞는 여성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옛 어른들 말이 맞았다. 머리 굵어지기 전에 장가가라던 말,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볼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이 나이에 사랑이 어딨겠냐는 소리를 종종 되뇐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가면 사랑이라고. 물론 에로스적인 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몸이 간다는 건 어쩌면 그간 체화된 연애 경험과 지금의 내 상황이 본능적으로 나를 이끄는 것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여러 계산들, 내가 인생에 져야 할 책임들, 큰 트러블 없이 함께 살 수 있는 조건을 맞춰가는 일들. 순수하게 사랑에 내 모든 것을 걸어 볼 만한 치기를 부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렀다. 

그래도, 사랑하고 싶다. 어쩌면 내 계산도 책임감도 바라는 조건도 모두 그만큼 내가 외롭고 힘들기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방어기제이고 변명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연애를 못 하는 구구절절한 이유들을 깡그리 잊을 수 있게 만들어 줄 만한 연애가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있는 곳이 달라지며 그때의 사랑과 지금의 사랑이 달라졌기에, 더 성숙하고 여유 있는 나를 만들어줄 곳을 꿈꾸고 나아가다 보면, 좀 더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오늘도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고, 완연해진 사랑의 계절에 내 연애를 책임져 달라고 슬며시 등 떠밀어본다.

2022년 10월

모릅니다,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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