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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의 외국 생활, 인문학자가 들려주는 프랑스 집 이야기
2023-02-23T17:21:44+09:00

집 떠나 도달한 그곳, 과연 낙원은 있었을까.

2022년 9월

그곳에 언제나,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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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볼든으로부터 처음 원고 의뢰를 받을 당시 ‘프랑스에서의 40년 일상 속 내가 느낀 집의 의미’라는 주제의 에세이를 부탁받았다. 에펠탑, 샹젤리제 거리, 센 강의 야경, 로댕 미술관에서 루브르에 이르는 크고 작은 박물관들.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할 파리의 대표적 전경과 ‘파리지앵’으로서의 삶 속에서 내가 느낀 ‘집’에 대한 주관적 감상을 버무린 글을 기대했다면, 우선 사과부터 드리겠다. 

파리에서 40년 가까이 인문학자로 살며 가지게 된 직업병 때문인지, 그보다는 나의 경험을 프랑스 사회 전체의 경험과 연결하고자 하는 뜻이 앞섰다. 그렇게 고집을 부려 완성된 것이 이 졸고인데, 내 나름의 그럴듯한 변명이 있다. 개인의 경험이 근간을 이루는 글은 확인된 정보나 지식보다는 대개 세간에 떠도는 풍문들을 얼기설기 엮으면서ㅡ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ㅡ객관화를 가장하는 데 필요한 각종 양념(편견, 선입견, 왜곡 등)을 가득 치게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 주변의 이목을 끌기 위한 잡설에 그치는 경우가 흔하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조금이라도 의식하려고 노력하면서 그간 파리에서 살면서 듣고, 보고, 생각하는 ‘집’에 대해서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파리에서 집이라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집과 건물의 크기, 구조, 형태, 거주지의 생활 환경, 도시의 공간적 모양새와 기능, 그리고 정치, 사회, 문화적 맥락 등을 동시에 입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오랜 시간 한국을 떠나있었기 때문에 이 글을 통해 한국의 주택 문제에 대해서까지 왈가왈부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일 것이다. 다만 다른 영토, 다른 문화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접해봄으로써 더 나은 ‘집’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구상에 일말의 영감이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팬데믹과 ‘파리지앵’들의 집

파리 사람들이 선호하는 집은 무엇일까. 공교롭게도 코로나 초기의 몇몇 에피소드에서 대다수 프랑스 사람들의 집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거의 모든 경제 및 사회활동이 멈추는 첫 셧다운(2020년 3월 17일 – 5월 11일,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총 3회 시행되었다) 조치가 마크롱 대통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된 시점은 2020년 3월 16일 월요일 저녁이었으나, 정부가 전례 없는 어떤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소문이 미디어를 비롯한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미 공식 발표 전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결국 직전 주말과 실제로 조치가 발효되는 17일 정오까지 파리 및 파리 근교의 수많은 ‘부자들’과 중상류층 사람들은 지방에 있는 별장이나 친인척 집으로 떠났다. 당시 일간지 <르 몽드>에 의하면 파리 메트로폴리탄 지역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120만 명 이상이 펜데믹을 피해 ‘대탈출’을 감행했다고 한다. 사실 어떤 질병이나 재난이 발생하면 계급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이 여실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더욱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14세기 유럽에서 페스트가 만연할 때 최상류층 귀족과 성직자들은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에 머무르며 상대적으로 감염 비율이 낮았다는 역사적 선례는 익히 알려져 있다. 

이런 풍경은 팬데믹 상황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경향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후로도 계속 파리와 같은 대도시 탈출 현상은 점점 더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사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면서도 온라인 근무가 가능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 상당수가 주 거주지를 생활 환경이 좋은 지방의 중소도시로 옮겼거나 계획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파리 시내의 대형 아파트를 팔고 지방에서 단독 주택과 파리의 소형 아파트를 동시에 구입하기도 하는데, 이는 매우 시사적이다. 전자는 주 거주지, 후자는 주 1-2일 업무차 파리에 오면 사용하기 위한 목적이다. 당연히 이런 단독 주택은 도시 밀집 지역인 파리와 가까운 근교보다는 상대적으로 도시 외곽 혹은 시골에 더 많이 분포하고 있다. 고속전철이나 도로망이 파리와 잘 연결되는 지방에 소재하는 이른바 양질의 주거 지역에서 주택 가격이 급상승하고 파리의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서는 점이 이런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이런 지방 도시나 마을에서는 소수의 파리 ‘부자’들이 내려와 부동산 가격을 급상승시키고 마을의 기존 생활 기반을 변화시키며 연대감마저 훼손시킨다는 원주민들의 원성이 널리 보도되기도 했다. 이 사례는 전문직에 종사하며 충분한 경제력이 있고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가능한 전략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프랑스 사람들이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보다는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선호하는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수의 서민도 하고 싶지만 여건상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며, 특히 어떻게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집’에 대한 기호와 취향을 공유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

팬데믹 시대를 맞이하여 별다른 대안이 없는 다수의 파리 사람들은 공동주택, 즉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그들의 생활은 어떨까? 주지하다시피 파리는 오래된 건물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여전히 파리의 집을 고집하는데, 우선 대략적인 파리 아파트의 모습을 살펴보자.

파리의 아파트는 100-200년은 보통이고 20-30년 된 것은 새것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한 통계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62%는 1949년 이전에, 20%는 1949-1974 기간 중 지어진 집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규모가 작은 아파트여서 가구 평균 인구수는 1. 9명(전국 평균은 2. 33명)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층간 소음은 일상적이며 슬기롭게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공동주택 생활에 필요한 규칙과 규범을 잘 준수하는 ‘교양’있는 이웃의 비율이 ‘주거의 질’을 결정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러나 만약 ‘막무가내’ 이웃이 있으면 대책이 없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음악 애호가이며 ‘밤 문화’와 주말 파티를 즐기는 젊은 이웃이 아주 친절하고 인간적이기까지 하면 매번 얼굴 붉히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쉽지 않다. 

파리를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시킨 일등 공신의 이름을 딴 오스만(Hausseman)식이라고 불리는 돌로 지워진 고급 건물이 있다. 이런 건물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벽난로는 고풍스러운 거울, 비싼 그림 액자와 더불어 우아한 장식용으로도 사용되지만, 외풍과 이웃집 소음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또 오래된 건물에는 배관을 비롯한 여러 시설의 고장이 자주 발생하기 마련이고 해결하는데도 시간이 적지 않게 든다. 

건물의 유지 및 보수는 각 아파트 소유주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결정하고 관리 회사에 문제 해결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가끔 건물에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엘리베이터, 난방시설, 외벽 보수 등)가 생기면 관리비가 집주인들에게 상당히 부담되는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공동 시설이나 공간이 아닌 개별 아파트 차원에서 사고로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는 일반적으로 각 아파트 입주자가 계약한 보험회사를 통해 해결한다. 프랑스에서는 모든 ‘집’과 건물은 의무적 보험 가입 대상이며, 원칙적으로 거주자 부담이 원칙이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사람이 이런 파리에서 살고 싶어 할까? 사실 파리의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몇 번의 하강 국면이 있었지만, 꾸준히 증가해왔다. 파리 주택시장 동향을 살펴보면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상승세를 기록했는데, 1998-2008 기간 동안 연간 9.2%, 총 141% 상승을 기록했다. 2000년에 1m2당 평균 가격이 2, 470유로에서 2019년에는 9,890유로로 치솟아 무려 248% 상승했으며, 2020년 5월에 드디어 10, 000유로가 넘자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하며 여론이 술렁이기도 했다. 

프랑스 내에서도 파리에서 거주한다는 것 자체가 다양한 사회적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집’이라는 것을 단순히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주택이 아니라 미래의 금전적, 사회적 또는 상징적 기대 가치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한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도 파리의 주택 가격이 계속 오르다가 작년부터 완만한 내림세가 계속되고 있지만(2021년 8월 대비 연평균 2% 감소), 이번 여름부터 고급 동네(주로 1~8구)에서는 다수의 외국인 구매에 힘입어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부 ‘전문가’들은 ‘역시 파리’라는 표현을 동원해 파리만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메리트’를 다시 상기시키는 담론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사실 파리도 다른 대도시와 같이 오염, 교통체증, 소음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다수의 파리지앵은 이구동성으로 파리라는 도시의 특징을 긍정적으로 논한다. 우선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 행정, 경제의 중심지이며, 그 비중이 다른 서유럽 국가 수도에 비해서 매우 높다. 한 시대의 유력 인사들이 파리 사교계의 유행과 사치를 좇아 모여든다는 의미의 ‘모두-파리’(Tout-Paris)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파리의 명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프랑스 내에서도 파리에서 거주한다는 것 자체가 다양한 사회적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가끔은 선입견 때문에 그 의미가 왜곡되기도 한다. 물론 ‘집’이라는 것을 단순히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주택이 아니라 미래의 금전적, 사회적 또는 상징적 기대 가치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한다. 파리의 전체 부동산 거래에서 국내외 부자들이나 유명 인사가 고가주택 구입 비율이 매우 높은 것은 이를 방증하고 있다. 

당연히 ‘파리의 매력’은 최상류층의 전유물은 아니다. 일반 중산층에 속하는 꽤 많은 사람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은 바로 잘 발달한 문화 인프라이다. 클래식부터 전위적인 장르를 아우를 수 있는 각종 음악 연주회, 전람회 그리고 연극 공연(매주 약 330회)이 펼쳐지고 있다. 수십 개의 대학 및 연구 도서관 외에도 파리시가 직접 관장하는 도서관만 72개에 이른다(파리 근교까지 포함하면 총 830개의 도서관이 있다). 전철로 파리 도심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파리 근교 거주자들조차 ‘파리지앵’이 누리는 다양하고 높은 질의 문화 시설 및 행사에 대해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않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불평등의 도시, 파리

그러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지만 파리는 모두에게 평등한 도시는 아니다. 사실 모든 ‘파리지앵’이 위에서 언급한 ‘매력’을 동등하게 누리지 못한다. 소위 경제 및 문화적 자본의 양과 질적인 면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계급이 존재하고 있다. 

어디에 사느냐는 계급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같은 파리 내에서도 ‘집’의 가치는 구역마다 다르다. 실제로 경제적 측면에서만 봐도 ‘서민 동네’와 ‘부자 동네’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2020년 8월 1일 기준 파리시 전체의 1m2 당 평균 부동산 가격은 11,430유로, 북동쪽에 위치한 19구는 9,475유로, 도심에 위치한 6구는 15,367유로이다. 

그러나 평균으로 환산한 통계 이면에 숨어있는 차이는 훨씬 크다. 2021년 파리에서 주택 구입자를 살펴보면 41.4%가 ‘중견 간부’, 42.5%가 ‘고위 간부’와 자영업자에 해당하는 비교적 고소득자이다(간부 cadre는 프랑스 공식 통계상의 사회 및 직업군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지속적이고 급격하게 상승한 부동산값과 월세 때문에 서민층과 하위 중산층에 속하는 상당수가 파리 외곽이나 지방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파리는 도시 자체가 점점 더 부자 동네가 되어 갔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파리시 당국은 사회적 배려와 연대의 가치를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전체 가구 중 저소득층 서민들을 위한 ‘사회주택’의 비중은 24.2%(2021년)로서, 모든 행정 단위 지역은 의무적으로 20% 이상 사회주택 비율을 유지해야 하는 법을 나름대로 준수하고 있다. 또한, 파리시는 임차인 보호를 위하여 ‘월세 책정 기준 모델’을 만들어 임차인이 함부로 월세를 급격하게 올리지 못하게 하며, 이를 위해 중앙 정부와 적극적으로 협상하기도 했다. 

한편, 사회적 인프라와 환경 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정책도 도입했다. 가령 사람 위주의 도시계획과 운영이라는 차원에서 자전거 전용 도로를 대폭 확장했으며, ‘자동차 없는 거리’와 보행자 전용 구역을 파리 중심부에 해당하는 1-4구 전체에 적용하는 정책도 시의회를 통과하고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지난 6월에는 파리 시내 출퇴근 시 자전거 이용자가 자동차와 대중교통 이용자를 넘어섰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처럼 거주 지역의 사회적 인프라가 단순히 편의성에 기반하는 것보다 친환경, 친인간적으로 개선된다는 것은 개인 혹은 집단적 이익의 산물인 난개발을 극복하고, 무엇보다 해당 지역에 소재하는 ‘집’의 경제적 가치나 문화적 의미를 더욱 긍정적으로 환원시켜주는 구조적인 조건을 제공해준다. 

흥미롭게도 대부분 학력이 높고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안정된 소득을 가진 파리의 중상류층 중 꽤 높은 비율이 좌파적 투표 성향을 드러낸다.

아무튼 대개 이런 정책들은 부분적으로 ‘좌파’ 색채를 띠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온건 좌파 연합이 파리시 운영에서 보인 정치적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다수의 파리 시민, 그중에서도 중상류층의 의미 있는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대부분 학력이 높고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안정된 소득을 가진 파리의 중상류층 중 꽤 높은 비율이 좌파적 투표 성향을 드러낸다. 

이들은 파리가 제공하는 문화적 인프라를 가장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혜택도 가장 많이 받는 계층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부동산 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상류층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은데, 그것은 도덕이나 윤리적 규범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 및 법적 장치를 통해 그런 개연성을 낮춘 결과이다. ‘집’ 부자는 기존의 부동산 관련 세금 외에 일명 ‘부유세’를 부담해야 하며, 제2 거주지(별장, 임대 목적 등) 소유자는 높은 유지 비용(주민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과 공과금)을 감당해야 하고, 단기 매매 행위 시 부과되는 높은 세율에 따른 금전적 부담도 져야 한다. 가령 부동산 평가액이 27억 원이라면 연간 약 1, 000만 원이 넘는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물론 몇몇 예외 조항을 통해 약간의 감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개연성은 있다). 

또한, 3억 원 이상이 되는 제2 거주지 처분 시 시세차익에 따른 양도세와 기타 세금을 합한 비율은 약 40% 전후이며, 양도세는 22년 이상 소유, 기타 세금은 30년 이상 소유해야 과세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 부동산 부자가 단기적인 차익을 실현하기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여러 제도를 통한 꽤 높은 차단벽이 존재한다. 결국 평범한 ‘집’을 가진 서민이나 무주택자들이 가질 수 있는 상대적 박탈감을 완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집’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0년 이방인이 바라본 프랑스의 집
‘똑같은 집’은 없다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집’에 대한 안목이나 가치관은 ‘객관적’인 역사 및 사회적 맥락과의 밀접한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기도 하지만, 각 개인의 ‘주관적’ 사유가 설 자리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집’이라는 공간이 ‘삶의 질’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관계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관점을 이해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례가 매우 유용하다. 첫째는 문화적으로 먼 나라에서 외국인이 가끔 발견하는 파리의 거주 형태에 대한 소견이고, 둘째는 거주지 환경이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우선, 이방인이 느끼는 파리의 가장 큰 특징은 ‘똑같은 집’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 새로 짓는 공동주택 건물(프랑스에서는 한국의 5층 내외의 빌라 규모의 건물인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아파트(appartement)가 있다. 예컨대, 50여 가구로 구성된 5층 신축 공동주택에는 방 한 칸짜리 스튜디오부터 5개 공간으로 이루어진 대형 아파트까지 무려 20여 개의 모델이 존재한다. 또 이 신축 공동주택은 일반 조합원에게 배당된 3개의 아파트, 그리고10개의 ‘사회주택’(해당 시청에서 요구하는 법적 건축 허가 조건)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나머지 아파트만 일반 분양의 대상이 된다.

수요가 많은 방 2-3개짜리 아파트가 가장 많고, 아파트 넓이가 같더라도 여러 모델이 있어서 판박이 같은 구조는 없으며 심지어 층 수에 따라 가격 차이도 상당하다. 오래된 구축 공동주택인 경우 한 건물 안의 아파트들도 크기와 구조 면에서 각기 서로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다 보니 아파트 내부 장식은 물론이고 거주자가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공간적 개념과 생활 방식도 다양하다. 또 거주 형태의 다양성과 다름의 매력은 건물 외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건물 외벽에 위치한 발코니나 테라스를 위한 난간의 무늬나 모양이 주변 건물과 서로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같은 건물에서도 층수나 위치에 이러한 장식들이 다양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로 다른 건물이 독특한 특성을 드러내고, 거리를 다채롭게 하면서도 도시 경관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결국 각각의 아파트, 각각의 건물, 각각의 거리에 스며들어 있는 다양성이 파리라는 도시의 개성과 매력을 만들어 내는 원천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파리는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동네’ 또는 ‘마을’ 단위에서 누릴 수 있는 생활 환경이 잘 발달 되어 있다. 그 수가 서유럽의 다른 대도시와 비교하면 훨씬 더 많고 다양하다. 대다수의 전철역 근처에는 식당, 카페, 중·소형 마트, 식료품점, 생활용품 상점, 서점, 사무실, 갤러리 등이 도보로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조성되어 있다. 심지어 도심 한복판에서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으며, 유명 관광지와 박물관, 영화관, 공연장 등 각종 문화 시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편이다. 

상당수의 건물이 이른바 주상복합 형태라 1층에는 상업 시설이 들어서 있고 2-3층부터는 일반 주거용인 경우가 많다. 다수의 파리지앵은 이와 같은 도시 환경에서 수준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는 자부하며, 모든 대도시가 피할 수 없는 여러 문제와 오래된 건물에서 비롯되는 온갖 불편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여기는 듯하다.

파리의 일부 구역에 고층 아파트 촌이 있지만, 수백, 수천 세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없고 10차선, 12차선 대로도 샹젤리제 거리를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규모 단지와 대로로 구성된 도시에서 대부분의 활동은 자동차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고 ‘마을’ 혹은 ‘동네’에서 누릴 수 있는 일상이나 풍경도 기대하기 힘들다. 이와 같은 거주 조건은 환경이나 삶의 질적인 면에서 다수의 파리 시민은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다.

***참고로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파리시 주민 수는 약 217만 명이며 면적은 서울의 5분의 1 정도 된다. 총가구 수는 약 114만 호에 이르며 그 중 아파트는 97%를 차지하고 있다. 총가구에서 33%는 소유주가, 44%는 세입자가, 20.4%는 공공주택 대상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50.2 %는 1945년 이전에 건설되었고 78%는 1-3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형태이다. 구축 아파트의 평균 가격은 10 600 €/m²(2021년 4분기), 평균 월세는 24 €/m²(2021년 1월)이다.

2022년 9월

그곳에 언제나,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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