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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타가 직면한 난제
2023-02-22T19:24:44+09:00
Toyota GR Supra

적어도 수프라의 유산과 열정은 그대로 남겨뒀어야 했다.

토요타 수프라는 90년대 스포츠카의 전설이지만, 중고차 시장을 조금만 훑어보면 그 인기가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수동으로 기어를 조작하는 옛 모습 그대로의 수프라들은 북미에서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여전히 잘만 팔린다. 오늘날 쇠락의 길을 걷는 일본 차들 사이에서 옛 향수에 젖은 팬들은 세월의 흐름을 통해 완숙미가 더해진 디자인의 수프라 같은 스포츠카에 열광하고 있다.

현재 토요타가 수익을 위해 내구성이 뛰어난 승용차들만 생산하면서 2000년대부터 수프라의 계보를 끊어버린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게다가 최근 일본산 스포츠카가 대부분 사라진 만큼 수프라처럼 합리적인 가격에 독특하기까지 한 차를 찾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 됐다.

오로지 마케팅 수단으로만 활용된 수프라의 유산

그래서 토요타가 처음 FT-1 콘셉트를 출시했을 때 필자는 무척이나 설렜다. 매끄러운 실루엣, 낮은 차대,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미(美). 멋진 차를 만드는 제조사로서의 토요타가 완벽하게 부활한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이윤 창출과 글로벌 독점에 대한 욕심은 토요타로 하여금 지루한 행보를 걷게 만들었지만, 기억하는가? 수프라, MR2, 그리고 렉서스 LF-A까지 이들은 모두 토요타가 ‘작정하고 만들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고의 모델들이었다. 그래서 FT-1 콘셉트의 등장은 분명 뛰어난 스포츠카를 만들던 토요타의 르네상스를 다시 불러올 것으로 기대됐다. 가능하다면 그 옛날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하지만 수프라 이름을 달고 출시된 2020 GR Supra가 베일을 벗자 그 기대는 반 토막이 났다. 자동차 제조 업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그 좋은 기회를 놓치고, 그저 마케팅 수단으로만 이용될 것이 뻔한 ‘수프라’ 이름만 달고 나오다니. 땅을 칠 노릇이다.

사실 토요타 입장에서는 기존의 토요타 86이나 Scion FR-S로 알려졌던 스바루 BRZ를 활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좋은 대안들을 두고 BMW와 이상한 파트너십을 맺더니, 그냥 사이즈만 키운 FT-1을 만들어버렸다. 이건 그냥 FT-1에 AE86과 BMW Z4를 합친 수준에 불과하다.

만약 토요타가 토요타 86의 차체를 더 강하게 만들고, 거기에 강력한 엔진을 올린 뒤 FT-1 콘셉트의 디자인을 구현했다면 어땠을까? GR Supra는 이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FT-1과 비슷하게 나왔어야 했다. 물론 FT-1 콘셉트가 보여준 낮은 차대와 미래지향적 디자인에는 분명 생산을 어렵게 만드는 규제들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토요타라면 그 정도 수준은 브랜드 이미지와 기술력을 동원해 충분히 돌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얻은 것은 그저 못생기고, 더 크기만 한 BMW의 수프라 카피다. 통탄할 노릇이다.

포르쉐는 열정의 불씨를 이어가기 위해 카이엔을 만들었다

GR Supra는 오늘날 자동차 제조 업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많은 제조사들은 더 이상 자동차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가족 단위로 이동하거나 장보기에 최대한 초점이 맞춰진 크로스오버 차량에 집중하는 것을 택했다. 물론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최고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이런 생각은 잠시 제쳐두어도 좋지 않았을까.

2000년대 초반 포르쉐도 비슷했었다. 경영 악화로 기업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선 포르쉐는 911을 더 많이 생산하면서 포르쉐파일(Porschephiles)들의 열정에 부채질하기 위해 카이엔을 만들어야 했다. 덕분에 카이엔은 출시 직전까지도 ‘포르쉐의 전통을 망친다’며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만약 카이엔이 없었더라면 더 이상의 911과 918 스파이더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카이엔은 포르쉐가 가진 열정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한 필요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토요타는 포르쉐처럼 위기에 빠진 적이 없었다. 이미 코롤라와 캠리가 충분한 수익을 내고 있었기에 적어도 재정적 걸림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FT-1 콘셉트는 오로지 열정을 다시 싹틔우기 위한 회사의 감정적인 대응이었다. 팬들이 브랜드에 대해 다시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지지할 수 있도록.

콘셉트 단계에서 도출된 아름다운 디자인이 공개됐을 당시만 하더라도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프로젝트는 목적을 잃었다. 여기에 경영진까지 개입하면서 GR Supra는 그저 그런 지루한 차로 세상에 태어나고야 말았다.

다행히 아직 명예회복의 기회는 있다. 최근 토요타는 “앞으로도 토요타 86은 계속 생산될 것이며, 차세대 모델은 수프라와 비슷할 것”이라 예고했다. 물론 이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구체적으로는 알 수도 없고, 앞으로도 계속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FT-1 콘셉트를 보며 밤잠을 설쳤던 수많은 팬들의 희망마저 부디 저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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