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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그럼에도, 나의 집
2023-02-22T17:40:29+09:00

마침내 나를 품어줄 곳, 임볼든 9월 테마 ‘집’.

2022년 9월

그곳에 언제나,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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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총각. 이 정도 컨디션이면 있잖아, 반나절이면 나가.” 좀 더 괜찮은 조건의 방을 찾으려 당시 살고 있던 원룸 셋방을 내놓으려던 나에게 부동산 아주머니가 타이르듯 말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를 꾸지람하는 듯 느껴져 괜스레 반발심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과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며 움츠러들게 되었다. ‘그냥 좀 더 살아야 하나.’

그때의 결심은 아마 열 번 남짓 되는 이사를 전전하며 학습된 두려움 탓일 테다. 부동산 아주머니의 조언인지 회유인지 모를 그 말에 위축된 탓도 있었지만, 새로운 집을 알아보러 눈칫밥 먹어가며 일찍 퇴근하거나 연차를 쓰며 발품 팔 것을 생각하니 진절머리가 났다.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에서 신용을 평가받는 일이 도축장에서 고기 등급판정을 받는 것 같다는 옹졸한 생각도 들고, 이삿짐을 싸고-옮기고-풀고-정리하는 데 드는 고됨까지 상기하니 ‘내 집’과 헤어지지 않을 결심이 확고해졌다. 마침내.

‘내 집, 내 집.’

아귀가 맞지 않는 블록 장난감을 억지로 끼워 맞추듯 살고 있던 집을 떠나지 않을 온갖 구차한 이유들을 정당화하고, 그 생각 이내 돌아설까 마음에 꾹꾹 새기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 리듬 게임을 하듯 발걸음 소리에 맞춰 은연중 되뇌던 ‘내 집’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입에 설게 느껴졌다. 내 집이라 부르면서도 나의 것이 아닌 집. 집을 벗어나고 싶어 집을 나섰지만, 그 짧은 외도의 실패로 구차해진 마음이 하릴없이 되찾던 그곳. 나에게,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


한 번도 ‘내’ 집이었던 적 없었다. 혼기가 꽉 찬 나이에도 여전히 셋방살이를 하는 나에게 ‘나의 집’이란 점점 그 실체를 잃어가고 어렴풋함 개념만 남게 되고 있는 듯하다. ‘조금만 더 아끼고, 조금만 더 모아서.’라는 어른들의 지혜를 따라 내 집 마련의 꿈을 좇아왔지만, 기세등등하게 올라가는 집값을 보면 맥이 빠지기 일쑤다. 아마 윗사람들이 틀렸거나, 나를 기만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라며 애먼 누군가를 탓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한 번도 집에 애착을 가진 적 없었다.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나만의 거처를 찾는 과정에서ㅡ대부분의 사람에게 아마 그러할 것처럼ㅡ맞닥뜨린 몇 번의 굴곡이 아마도 그 이유였으리라 짐작한다.

 부동산 앱을 켜고 떠나왔던 오피스텔 시세를 수시로 찾아보며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패배주의에 몸서리친 밤도 숱하다.

첫 시작은 괜찮았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사회 초년생으로서는 꽤 괜찮은 조건의 10평 남짓의 신축 오피스텔 원룸에 살게 되었는데, 깔끔한 건물 내부와 ‘래미안’, ‘자이’ 같은 브랜드 아파트를 연상케 하는 심플하면서도 모던한 건물 외관을 볼 때면 마치 성공한 사회인이 된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호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족이 예기치 못한 송사에 휘말리게 되며 전셋집 보증금을 빼야 했던 것이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생략하고, 결국 살던 집보다 한참 못한 정도의 월세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5평 남짓으로 쪼그라든 퀴퀴한 단칸방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 인생의 가능성이 딱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것을 전시하고 있는 듯했다. 생활반경이 바뀌고 일터로 이동하는 시간까지 길어지며 몸의 피로도 배가 됐다. 부동산 앱을 켜고 떠나왔던 오피스텔 시세를 수시로 찾아보며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패배주의에 몸서리친 밤도 숱하다.

‘엄마는 이 집이 지겹지도 않아?’ 
‘지겨운 게 어딨어. 집은 그냥 집이지.’

드라마틱한 반전을 가져다준 사건이나 개안(開眼)을 일으킬 만한 동기부여 같은 것은 없었다. 대게 그렇듯 차차 내 집에 익숙해져 갔다.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였다기보다는 <건축학개론> 속 낡은 집이 지겹지 않냐는 주인공 현재의 질문에 그의 모친이 ‘집은 그냥 집이지.’라고 시답잖다는 듯 대꾸하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됐을 뿐이다. 근근하게나마 ‘모으고, 아껴서’ 조금씩 더 나은 조건의 집으로 차례차례 옮겨갔고, 결국 처음 들어갔던 오피스텔 수준의 집까지 당도했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없어진 건 아니다.

못을 하나 박으려 해도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번잡함이나, 실수로 뜯어진 벽지나 장판의 찍힌 자국을 보며 ‘얼마나 물어내야 할까.’ 걱정해야 하는 자잘한 피곤함.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면 사방으로 집을 보러 다니고 집주인과 신경전을 해야 하는 일. 새로운 집으로 옮겼을 때 적응에 드는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처리할 행정적인 절차들. 이 모든 일에 수반되는 노곤함과 불만이 쌓이고 쌓여 자칫 신경증으로 번지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까지 든다. 

‘이 나이대에는 이런 정도의’라는 일종의 사회적 명령을 따라 ‘이런 정도의 집’에 살아야 하거늘, 내 나이에 걸맞은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한다는 쿨하지 못한 생각도 점점 커진다. 최악이라 생각했던 하꼬방 같은 집을 벗어나 처음 시작했던 ‘정도’의 집에 돌아왔지만, 그간의 세월 때문에 ‘이런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는 피해의식. ‘내 집’을 차마 온전히 품을 수 없는 궁색한 이유들이다.


부동산 아주머니의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 장사꾼의 간계는 아닐 것이다. 중개인 입장에서야 새로운 세입자를 받고 중개료를 받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이득일 테니.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 방도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고, 지나가다 본 예쁜 협탁을 놓을 공간이 더 확보됐으면 좋겠고, 햇볕도 더 잘 들어왔으면 좋겠고. 이처럼 나에게는 못마땅한 이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공간이라고 한다.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이라는 드라마를 보던 중 대사 하나가 칠판에 손톱을 긁는 소리처럼 거슬렸다. “이 집이 말이야. 누군가한텐 엄청 소중한 집이었나 봐. 근데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이 집을 증오하게 됐을까.” 잘못된 주식 투자로 쫓겨나듯 당도한 집을 못마땅해하던 한 부부가 일주일만 그 집을 빌려달라는 죽음을 앞둔 전 집주인의 부탁을 듣고 나눈 이야기이다. 

지금 사는 집에 만족 못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간절할 수 있는 집이니, 적당히 만족하며 살라는 대사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저 ‘내’라는 수식어를 빼고 오롯이 ‘집’의 의미만을 생각해보게 됐다. 공간을 사람으로 볼 수 있다면, 집은 아마 내 가족보다 더 나와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남들 앞에서라면 결코 보이지 못할 웃음, 울음, 분노의 극단치를 마음 놓고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내 체취를 가장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고, 인생의 마디 마디에서 나를 가장 정치하게 기록하고 있는 곳일 것이다. ‘내’ 집이 아닐지언정,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의 뿌리를 지탱해주는 터전일 테다.

새로운 집을 찾는 데 실패하고 패잔병처럼 숙연히 열었던 현관문. 반겨줄 이 없는 혼자 사는 집이지만, 기분 탓인지 어디에서 온지 모를 온기가 나를 감싼다. 어릴 적 친구에게 얻어맞고 엉엉 울며 돌아간 곳, 처참한 모의고사 성적에 미래를 비관하며 돌아간 곳, 꿈꾸고 노력했던 일이 산산조각이 난 후 고개 숙이며 돌아간 곳, 그곳에서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엄마의 품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그렇게 억울하고 부아가 났던 마음 차츰 사그라든다. 그래, 마침내는 나를 품어줄 그곳. 그럼에도, 나의 집이다.


지금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대다수의 이들에게 오늘날 ‘집’만큼 무게감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임볼든의 9월 테마로 집이라는 주제를 선정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집, 부동산에 대한 심각하고 골치 아픈 얘기보다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다채로운 집 이야기를 생생히 그려보고자 했다. 

집을 소유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상식이 된 오늘날, 지극히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집’도 중요하지만, 집이라는 공간이 일상에서 나와 맺게 되는 관계를 좀 더 생각해 볼 겨를은 없을까.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도리 없어 보이는 ‘내’ 집 말고, 근본적인 ‘집’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로 조망해보는 기회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들로 시작해 이달의 콘텐츠를 마련해봤다. 

9월 임볼든에는 희림건축 김소희 건축가가 사유한 집 이야기를 비롯해 제주도 이주민의 연세(年稅) 노마드 이야기, 프랑스 파리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부부의 칼럼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아울러 최근 기록적인 홍수 사태로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반지하에 대한 콘텐츠도 발행될 예정이다. 어린 시절부터 20대까지 실제 반지하에 거주했던 자영업자의 회고로서, 다소 불유쾌하지만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택문제에 가장 허덕일 그룹 중 하나인 30대들의 생생한 인터뷰도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때문에 서울/수도권으로 이주한 30대 자취생 남녀 5인과 혼자 사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본다. 이외에도 하루아침에 회사를 관두고 지방의 시골 한옥을 매입해 자신만의 색깔로 공간을 꾸려가는 청년의 이야기와 인테리어, 수납, 공간 활용, 집 관련 앱 소개 등 실용적인 정보를 담은 콘텐츠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지난 8월 처음으로 진행되었던 ‘아낌없이 퍼드리는 이벤트’도 계속된다. 이태원 치킨윙 맛집 ‘네키드윙즈’와의 컬래버에 이어, 흥미롭고 놀랄만한 9월의 ‘집’ 관련 협업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다. 집과 관련된 알찬 콘텐츠들과 더불어, 이벤트 소식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2022년 9월

그곳에 언제나,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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