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제네바에서는 시계 업계 최대의 행사인 워치스 앤 원더스가 열린다. 한 해의 시계 트렌드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다. 2026년에는 65개의 브랜드가 참여해 수백 점의 신제품을 공개했는데, 그 안에서 공통된 흐름이 보였다. 과하디 과한, 맥시멀리즘이다.
그동안 시계 업계는 오랫동안 절제의 미학을 다듬어왔다. 단순한 다이얼, 정제된 색, 절제된 디자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달랐다. 더 드러내고, 담아내며,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복잡한 무브먼트를 그대로 노출한 스켈레톤 다이얼, 복잡한 기능을 과시하듯 담아낸 컴플리케이션, 단번에 시선을 끄는 강렬한 컬러까지. 지금의 시계는 더 많이 더하고, 보여주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컬러의 향연
손목 위에서 튀는 색으로
그동안 시계는 블랙, 실버, 화이트처럼 비교적 절제된 팔레트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2026년의 시계들은 다이얼 컬러를 전면에 내세운다. 레드와 블루 같은 원색은 물론이고, 여러 색을 겹치고 섞으며 한층 대담하게 말이다. 다이얼은 더 이상 조용히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손목 위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끄는 요소가 됐다.

롤렉스 퍼페츄얼 36
이전까지 오이스터 퍼페츄얼은 담백한 데일리 워치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번 모델은 보다 대담하고 그래픽적인 분위기로 달라졌다. 말그대로 색채의 향연. 하나의 다이얼 안에 10가지 넘는 컬러가 반복되며 대조를 이룬다.
단순히 화려한 다이얼이라고 하기엔 아쉽다.이번 쥬빌리 모티프는 1945년 롤렉스 창립 40주년을 기념해 등장한 ‘쥬빌리 브레이슬릿’에서 출발한다. 이번에는 이를 다이얼 그래픽으로 확장한 것이다. 다이얼 위에는 ‘ROLEX’ 알파벳이 반복적으로 배치되고, 각 컬러를 하나씩 차례대로 입히는 멀티컬러 래커 공정이 더해졌다. 브랜드의 역사와 그래픽, 컬러 실험을 한 화면 안에 담아놓은 셈이다.

파텍 필립 월드타임
시계에서 레드는 쉽지 않은 색이다. 너무 강하게 튀고, 오래 보기에는 부답스럽기 때문이다. 많은 시계 브랜드가 블랙이나 실버처럼 익숙한 컬러를 선택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파텍 필립은 그 반대로 간다. 그것도 1930년대부터 이어져 온 상징적인 월드타임 컬렉션 안에서 말이다.
시선을 사로잡는 카민 레드 래커 다이얼. 중앙에는 바스켓 위브 기요셰 패턴을 손으로 새겨 넣고, 그 위에 래커를 덧입혀 색에 깊이를 더했다. 옐로 골드 케이스와 인덱스, 핸즈는 레드 다이얼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익숙한 클래식 워치가 색 하나만으로 완전히 다른 시계가 됐다.
스켈레톤 다이얼
많은 정보가 드러나도록
원래 시계는 복잡한 무브먼트를 내부에 숨긴다. 사용자는시간을 읽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 봤다는 말이다. 하지만 스켈레톤은 이와 정반대다. 톱니 바퀴, 브리지, 밸런스 휠 같은 내부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 복잡한 구조를 노출한다. 숨겨도 되는 것을 굳이 드러냈다는 것은 다이얼의 정보 밀도가 높아진다는 뜻이다. 올해는 특히 스켈레톤 구조로, 시계를 더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든 흐름이 두드러졌다.

에르메스 H08 스켈레트
원과 사각형을 겹친 케이스 안에는 새로운 H1978 S 무브먼트가 들어갔다. 다이얼은 블랙 톤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블루 포인트로 미묘한 변화를 줬다. 스켈레톤 구조를 드러내면서도 미닛 트랙과 인덱스를 또렷하게 남겨, 시간을 읽는 데 불편함이 없다.
케이스는 블랙 DLC 코팅 티타늄과 세라믹 베젤을 사용해 가볍고 단단한 인상을 준다. 39mm 사이즈와 60시간 파워리저브, 100m 방수 성능까지 갖춰 일상적인 착용에도 무리가 없다.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에르메스다운 절제와 균형이 느껴진다.

태그호이어 모나코 에버그래프
모나코 에버그래프는 크로노그래프 구조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설계했다. 핵심은 새로운 무브먼트 TH80-00. 기존 크로노그래프가 레버와 스프링 중심으로 작동했다면, 이 시계는 휘어지는 구조의 부품을 활용한다. 얇은 판이 탄성있게 움직이는 방식으로, 마치 종이를 구부렸다가 되돌리는 것 같다. 마찰과 마모를 줄이기 위한 설계다.
이는 투명한 다이얼 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기존의 복잡한 레버 구조 대신, 탄력있게 움직이는 부품들이 보인다.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작동 방식까지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까르띠에 크래시 스켈레톤
크래시 스켈레톤은 이름 그대로 무브먼트가 그대로 드러난 시계다. 하지만 단순히 내부를 보여주는 수준은 아니다. 이 시계는 무브먼트가 곧 다이얼이 된다. 중심에는 새롭게 개발한 수동 칼리버 1967 MC가 있다. 142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이 무브먼트는 단순히 얇게 깎인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로마 숫자를 이루도록 설계됐다. V부터 I까지 이어지는 브리지가 그대로 인덱스 역할을 한다.
특히 2시에서 4시 방향의 좁은 영역을 채운 브리지는 손으로 두드려 만든 해머링 마감이 적용됐다. 하나의 피스를 완성하는 데만 약 두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가장자리의 비대칭적인 로마 숫자와 기울어진 크라운은 아래로 녹아내리는 듯한 인상을 더한다. 효율과는 거리가 멀지만, 바로 그 수고로움이 이 시계의 특별함을 완성한다.
기술도 과하게
우리는 이런 것도 한다
이번 워치스 앤 원더스에서는 얼마나 복잡한 기능을, 얼마나 극단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지를 두고 경쟁하는 듯했다. 투르비옹, 퍼페추얼 캘린더, 크로노그래프 같은 컴플리케이션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각각만으로도 어려운 기능을 한 시계 안에 동시에 담아낸 시계도 있었다. 마치 그 복잡함 자체를 드러내는 데 의미를 둔 것처럼 말이다.

율리스 나르덴 슈퍼 프릭
율리스 나르덴은 시계 구조 자체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시간만 표시하는 타임 온리 시계는 원래 단순한 기능에 속하지만, 이 시계는 그 안의 메커니즘을 극단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새로 개발한 칼리버 UN-252는 무려 511개의 부품으로 구성되며, 그 내부 구조는 과할 정도로 복잡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핵심은 더블 투르비옹이다. 두 개의 플라잉 투르비옹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고, 그 사이를 세계에서 가장 작은 5mm 크기의 디퍼렌셜이 조율한다. 각각만으로도 고난도의 기술인데, 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은 것이다. 여기에 초소형 짐벌 시스템까지 더해지며 움직임은 더욱 복잡해진다. 이를 타임 온리 시계로 불러도 되는걸까?

파르미지아니 플뢰리에 톤다 PF 크로노그래프 미스테리유
기술을 감추는 과시하는 방법도 있다. 겉보기에는 단정한 3핸즈 시계다.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낸 톤다 PF의 디자인 그대로다. 하지만 필요할 때가 되면, 숨겨져 있던 크로노그래프 기능이 드러난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카운터와 핸즈가 나타나며 시계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크로노그래프라는 복잡한 기능을 넣으면서도, 이를 항상 드러내지 않기로 한 것이다. 복잡한 기능을 숨기고 필요할 때만 꺼내 보이는 방식. 절제된 얼굴 뒤에 복잡한 메커니즘을 감춰두는 태도가 오히려 더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제니스 크로노마스터 스포츠 스켈레톤
제니스는 크로노그래프에 스켈레톤 구조를 결합했다. 시간을 재는 기능과, 그 과정이 작동하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겠다는 의도다. 비워낸 다이얼 사이로 무브먼트가 드러나고, 크로노그래프가 움직일 때마다 내부 구조 역시 그대로 나타난다.
베젤에는 0.1초 단위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분당 3만6000회 진동하는 고진동 무브먼트를 기반으로, 보다 세밀한 단위까지 측정하겠다는 의지다. 크로노그래프라는 기능 자체도 충분히 복잡한데, 그 정밀함을 시각적으로까지 강조한다.

파네라이 루미노르 31 지오르니
이 시계는 한 번 감으면 31일 동안 간다. 보통 기계식 시계의 파워 리저브가 이틀 남짓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과시적인 수준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칼리버 P.2031/S는 7년에 걸쳐 개발됐으며, 4개의 배럴과 토크 리미터, 특허받은 스프링 구조를 통해 장시간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됐다.
재미있는 점은 실제 파워 리저브가 36일까지 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파네라이는 가장 안정적인 31일만 남기고, 나머지는 스스로 차단하도록 만들었다. 얼마나 안정적으로 오래 가느냐에 집중한 거라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긴 하다.
무조건 화려하게
형태 & 소재 과잉
기술을 드러내는 방식의 맥시멀리즘이 있다면, 보다 직접적인 방향도 있다. 말 그대로 화려함 자체를 밀어붙이는 것이다. 올해 시계들은 다이아몬드와 천연석, 에나멜 같은 장식 요소를 아낌없이 사용했고, 시계를 단순한 도구보다 하나의 오브제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형태 역시 더 과감해졌다. 원형 케이스를 벗어나 브레이슬릿처럼 손목을 감싸거나, 조형적인 실루엣을 강조한 시계들이 등장했다.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 원 히비스커스 시리아쿠스
예거 르쿨트르는 리베르소를 하나의 캔버스처럼 다룬다. 직사각형 케이스 위에 히비스커스 꽃과 벌새를 그려 넣어, 하나의 장면처럼 펼쳐낸다. 에나멜 기법으로 색을 입히고, 굽는 과정을 반복하며 이미지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케이스에는 300개가 넘는 다이아몬드가 세팅됐다. 브레이슬릿까지 더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시계 전체가 빛과 색으로 채워진 셈이다. 형태 역시 전통적인 손목시계보다는 주얼리에 가깝다. 장식성과 조형미를 강하게 밀어붙인 브레이슬릿이라 불러야 하겠다.

오데마피게 에타블리쇠르 갈레츠
18K 옐로우 골드와 천연석으로 제작된 브레이슬릿 워치. 조약돌에서 영감 받은 형태는 타이거아이와 터쿼이즈 등 천연석을 골드 링크에 세팅해 비대칭적으로 이어 붙였다.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인 천연석이 손목을 따라 흐르듯 연결된다. 시간 표시가 없는 다이얼은 미네랄 표면 자체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흥미로운 건 외형에 맞춰 무브먼트까지 새롭게 설계했다는 점이다. 칼리버 3098 마저 조약돌의 곡선을 닮도록 디자인하여, 유려한 실루엣을 완성했다. 수작업으로 다듬은 브릿지와 정교한 마감도 눈에 띈다. 단 한 명의 장인이 조립부터 케이스 제작까지 전 과정을 맡아 만든 시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