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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한글화, 그 격동의 역사를 돌아보다
2023-02-22T17:35:05+09:00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왈도.

아, 외국어! 아무리 글로벌 시대가 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며 외국어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지만, 언어의 장벽이라는 것은 여전히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게이머라면 응당 편하게 게임을 즐기고 싶은 법인데, 화면을 메운 영어와 일본어들은 게임에 집중해야 할 뇌를 혼란스럽게 만들어줄 뿐. 그래도 지금은 한국어판 타이틀이 많이 판매되고, 높은 수준의 유저 한글 패치도 활성화 되어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에 많은 격동의 세월이 있었으니,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80년대 후반 – 역사적인 첫걸음, 알렉스 키드

88올림픽의 열기가 사라지지 않았던 격동의 89년. 대한민국 최초의 한글화라는 위업을 달성한 기념비적인 타이틀이 발매되었다. 지금은 게임 사업을 접었지만, 한때는 세가의 게임기를 유통하던 삼성전자에서 정식 발매한 겜보이의 (세가 마스터 시스템) 타이틀, <알렉스 키드>가 그 주인공이 되시겠다. 지금 보면 한글 폰트가 촌스럽고 게임 자체도 플랫포머 장르라 딱히 한글 번역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타이틀 화면에서부터 떡하니 박혀 있는 한글은 초딩들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었다.

이후에도 삼성전자에서는 <판타지스타>와 같은 겜보이용 타이틀뿐만 아니라 슈퍼 알라딘 보이 (메가 드라이브)의 <스토리 오브 도어>, <라이트 크루세이더> 같은 명작 게임들을 꾸준히 한글화하는 기염을 토했다.


90년대 초중반 – 동서게임채널의 약진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게임 플랫폼은 콘솔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지만, 한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PC 시장이 크다. 90년대 초반부터 PC 게임 타이틀의 한글화도 상당히 활성화되었는데, 당시 주역은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유통사 동서게임채널이 맡았다. C&C로 유명했던 웨스트우드의 AD&D 기반 게임, <주시자의 눈>이 첫 한글화 타이틀. 결과물은 일부만 번역이 된 반쪽짜리였지만, 시작이 중요한 법이다.

막대한 양의 타이틀을 정식 발매한 동서게임채널답게 한글판 게임도 상당수 선보였지만, 평균적으로 번역의 질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게이머들이 언어의 장벽에 막혀 좌절할 일은 없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또한 <윙커맨더 3>와 같이 전문 성우까지 동원하여 음성까지 수준 높게 한국어화한 경우도 있어 그 업적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그놈의 볼품없는 양말 곽 패키지만 아니었다면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을 텐데….


90년대 후반 – 전설의 레전드

90년대 후반에는 ‘다른 의미’로 전설적인 사건 두 가지가 벌어졌다. 먼저 긍정적인 마음을 담아 좋은 쪽부터 썰을 풀어보자면, 삼성전자에서 유통한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가 한글화되었다는 것. 스토리가 중요한 RPG 게임의 특성상 엄청난 양의 텍스트가 존재했지만, 이를 100% 한글화하였던 데다 게임 자체도 명작이라 정말 무서운 기세로 팔려나가며 오랜 시간 게임 잡지 인기 차트의 상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회자될 전설의 레전드는 바로 <마이트 앤 매직 6>의 발매. ‘왈도체’로 회자되는 전설의 번역으로 그 위명이 대단하다. 단순히 번역기를 돌린 수준이 아닌 정성스레 모든 문장을 오역하고 오타까지 낸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이 이 게임 하나에 녹아 들어있다. ‘힘센 이끼 (Power Lich)’, ‘궁수 마법사 (Arch Mage)’ 등 분명 한글인데 한국인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괴랄한 번역으로 게이머들의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사출시켰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컬트적인 인기를 얻은 괴상한 사례. 나중에는 유저들이 제대로 된 한글 패치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이미 ‘왈도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게이머들에게 외면받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 한글화의 전성기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한 2000년대 초반은 다시 콘솔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플레이스테이션 2 및 엑스박스의 정식 발매와 함께 로컬라이징의 전성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헤일로>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이 최고 수준의 한글화를 보여주었고, 그 외에도 다양한 타이틀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 사건은 YBM시사닷컴의 퍼블리싱 참전. 외국어 교육 관련 업체가 무슨 신의 계시를 받아 게임 퍼블리싱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롬 소프트웨어의 <아머드 코어 3>를 자막과 음성까지 완벽하게 한글화를 하며 출사표를 던졌다. 그 퀄리티가 어찌나 대단했는지 <아머드 코어>의 매니악한 게임성과 변태적인 조작 난이도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에 수많은 레이븐이 (파일럿) 양성되었다.

YBM은 더욱 대담하게 나아가 ‘마왕’ 신해철 님과 협력하여 아크 시스템 웍스의 <길티 기어 이그젝스 샤프 리로드>를 음성, 자막은 물론 OST까지 한국 현지화를 하여 전설이 된다. 하지만 2004년 <천주 홍>을 마지막으로 YBM은 퍼블리싱 사업에서 철수하며 정말 굵고 짧게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000년대 중반 – 진화

풍성한 한글화 타이틀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글화의 기준이 진화한 시기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화의 바람은 해외 게임 제작사에서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민속놀이, <스타크래프트>의 제작사 블리자드가 그 주인공이다. 블리자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의 서비스를 준비하며 언어의 현지화를 시도해 업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토종 한국 게임에서도 영어 발음을 음차하여 ‘파이어볼’로 마법 이름을 짓는 경우가 흔하지만, 블리자드는 이를 ‘화염구’ 같은 단어로 번역하며 단순한 번역이 아닌 현지화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게이머라면 들어봤을 서리한 (Frostmoune), 대격변 (Cataclysm) 같은 번역도 좋은 예로 들 수 있다. 누구보다도 한국어에 어울리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국내 유통사와 제작사도 아닌 해외 게임 제작사인 것이 모순으로 느껴지지만, 이런 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되며 한글화는 진화해나간 것이다.


2000년대 후반 –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렇듯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게임 환경이었지만 화려했던 전성기는 끝나고 바야흐로 시대는 어둠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콘솔 쪽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 3가 예상외로 부진을 거듭하며 한글화 타이틀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갔다. 심지어 간판 타이틀인 <메탈 기어 솔리드 4 건즈 오브 패트리어트>마저 번역을 거치지 않고 발매가 됐는데, 항상 꼬박꼬박 훌륭한 한글화를 보여주었던 시리즈라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나마 한글화가 되었던 타이틀도 그다지 좋은 퀄리티를 기대할 수 없었던 건 마찬가지. <레지스탕스2>는 상황과 무관한 엉뚱한 자막을 내보내는 태업까지 저질렀다. 더욱 환장할 노릇은 게이머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한동안은 자막을 삭제하는 복장 터질만한 만행까지 저질렀다는 것.

이런 사태는 PC를 포함한 멀티 플랫폼에서도 이어졌다. 지금도 천만 장 단위는 우습게 팔리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마저도 <모던 워페어 2>를 기점으로 한동안 원어판으로 발매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는 분명 마가 끼어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의지의 한국인이 아니던가. 뜻이 있는 일부 의인들이 길을 개척하며 유저 한글 패치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전에도 유저 한글 패치 제작은 있었지만, 더욱 활발해진 느낌. <모던 워페어 2>,  시리즈부터 방대한 대사가 있는 <엘더스크롤> 시리즈까지 많은 게임의 한글 패치가 제작되어 배포되었다. 어둠의 시기였기에, 그들의 위업은 더욱 환하게 빛을 발했다.


2010년대 중반 – 다시 만난 세계

유저 한글 패치라는 횃불 하나를 들고 암흑 속을 헤매던 게이머들에게 다시 밝은 햇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2013년 겨울, 플레이스테이션 4의 발매와 함께였다. 그 당시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코리아의 사장인 카와우치 시로는 플레이스테이션 3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각 게임 제작사에 타이틀 한글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이것이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플레이스테이션 4의 대작 타이틀이 다시 한국어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이 기세에 따라 엑스박스를 완전히 밀어내며 한국 콘솔 시장의 점유율을 가져갔다.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기쁘게도 한글화 전성기가 다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영광의 순간을 선사해 준 카와우치 시로에게 게이머들이 애정과 지지를 보낸 것은 당연지사. 이 당시 게이머들이 카와우치 시로에게 보내는 숭배(?)는 영화 <매드맥스>에서 진정한 영도자, 임모탄 조님에게 존경과 충성을 맹세하는 워보이의 그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현재 – 전성기는 계속되길

플레이스테이션 4 시절부터 이어진 타이틀 한글화의 두 번째 전성기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플레이스테이션 진영의 게임뿐만 아니라 엑스박스의 <헤일로>와 <기어스 오브 워>는 역대급 음성 현지화라는 평을 갱신하며 순항 중이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PC에서도 마찬가지. 여러 게임 제작사들이 자체 자막 한글화를 진행한 많은 타이틀이 스팀과 EA 앱 같은 ESD에 지금도 계속 추가되고 있다. 특히 CD 프로젝트 레드의 <사이버펑크 2077>은 성우의 혼을 담아 육성으로 내뱉는 우렁찬 욕설까지 현지화하여 게이머들의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단 대형 게임 제작사에만 국한되지 않고 해외 중소기업에서도 적극적으로 한글화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할로우 나이트>나 <염소 시뮬레이터> 같은 게임이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또한, 한글화가 되지 않는 게임들을 자발적으로 모여 번역하는 유저들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주체 없이 유저들이 각 타이틀에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형성되는 비정형적 번역 그룹 ‘팀 왈도’나 ‘팀 임시’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유저 한글 패치가 공식 번역으로 채택되는 <페이데이 2> 같은 사례도 등장하는 등 우리 한국 게이머의 게이밍 환경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최근의 변화들은 물론 한국의 게임 시장 규모가 많이 커지고 제작사의 주목도가 높아졌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게임 패드와 마우스를 잡기 전에 그분들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을 잠시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