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파’와 연인 사이 - 임볼든(IMBOLDN)

‘유교남이라니, 내가 유교남이라니!’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사춘기 때 걸린 중2병이 아직 완치가 덜 되었는지, 볼 만큼 보고, 들을 만큼 듣고, 경험할 만큼 경험해서 웬만한 건 시시껄렁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오만방자함이 깨진 건 그리 대단한 계기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취향과는 정반대의 시놉시스를 보고 넘길까 했지만, 또 ‘알고있지만’이라는 나로서는 오그라드는 여운 가득한 제목에 저어했지만, 관심 있는 배우가 출연하기에 선심 쓰듯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한 여자에 정착하지 못하는 나쁜 남자, 그런 남자가 좋지만 상처받을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여자, 이런 뻔한 클리셰.

놀람을 금치 못한 부분은 두 주인공 사이의 긴장을 끌고 가는 장치였다. 섹스파트너. 심지어 한 나라의 VIP를 끌어내렸던 방송사 드라마에서 대놓고 ‘섹파’라는 관계를 다루다니. 어릴 적 몰래 숨어 보던 빨간딱지 비디오에서나 볼 법한 내용을 예쁘장한 미장셴 그리고 조희팔 뺨칠 말발의 대본으로 치장한 것뿐이라고,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유교남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섹스파트너, 
도시 괴담 혹은 지극히 현실적인

그래도 나름 에디터라고 중립 기어 박고 다시 생각을 곱씹어봤다.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 나름의 숙고 끝에 생각 못 했던 단순한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섹스파트너의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었다는 것을. 

나름 순수했던 대학교 새내기 시절, 섹스파트너라는 것은 나에게 도시 괴담이나 민속신앙 같은 얘기였다. 당시에는 단어조차 생경했던 데다, 주변 누구도 그런 경험을 가진 이가 없었으니 말이다. 주변 또래들이 대부분 그랬듯, 만일 있더라도 도덕성이라고는 밥 말아 먹은 불륜 커플이나 욕정에 지배된 금수들의 막장극 정도로 생각했다. 

한번은 휴게실 옆자리에서 딱 봐도 예술 할 것 같이 생긴, 졸업 시기를 한참 지난 듯 보이는 여학우 한 명이 섹스파트너 품평회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파트너의 스킬, 사이즈, 강직도 등에 대한 평가부터 침대가 흥건해졌느니, 체액의 냄새나 맛 따위가 어땠느니 하는 수위 높은 이야기들이었는데, 말투가 무척 고상하고 나른해서 그런지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가까스로 정줄 붙잡은 후 뒤따른 나의 열선비스러운 평가질. ‘역시 예술하는 여자란.’

나이가 들수록 더 다양한 성생활의 군상과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처음의 선입견이 달라졌다는, 그런 뻔하고도 성숙한(?) 결말은 없었다. 나름 건전한 성 경험을 쌓아오며, 딱히 ‘비정상적’이라 생각하는 섹스파트너를 갈구할 필요도 관심도 없었던 탓일 것이다. 변화의 계기는 딱히 변변한 것은 못 되었다.

대단한 평론가라도 된 마냥 무시했던 <알고있지만> 속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나름 헤아려 보려 한끝에, 미모 만렙 갱신 중인 한소희 님의 열연 너머로 ‘섹파’라는 관계의 경계선이 그리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기억을 소급하면 주변에 꽤 많은 섹파 경험자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뇌리에 깃들기 시작했다.


우리 무슨 사이야?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흔해 빠진 섹파

‘우리 무슨 사이야?’라는 그녀의 말 한마디,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아무런 부담도 책임감도 없이 만나는 섹스파트너라 생각했던 그녀. 뭐가 잘못된 걸까. 설마 몇 달 전 노콘 섹스의 여파…?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다. 쓰레기 같은 남자애들이 그러듯 친구들에게 ‘나 걔 X먹었어!’라며 무용담을 늘어놓은 적도 없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그럼 섹스파트너의 정의가 뭔데? 무릇 섹파라함은 사생활 간섭 혹은 서로에 대한 책임이나 부담 없이 서로의 성적 욕구‘만’을 만족시켜주는 관계라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성적 욕망을 위해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연인 사이에서는 선뜻 요구하기 힘든 다양한 체위와 므흣한 플레이도 가능할 것이다. 가끔 적적하면 본 게임 전의 예열단계로 데이트를 하거나 연인을 빙자한 상황극까지 가능하니 이 얼마나 합리적인 관계인가? 라고까지 얘기가 간다면 유교 남녀들의 훈장질에 혼쭐날 터.

허나 사전적인 정의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는 먹물적 습관은 사회 부적응자로 전락하는 지름길이다. 생각보다 관계의 얼굴은 더 입체적이다. 그 사연도, 사정도 다양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관계의 맥락을 제거하고 사전적 정의에 들어맞는 섹파만을 생각했을 때는 더럽고 방탕하다는 심상이 앞설 수밖에. ‘합리적’인 사람들이 맺는 섹파 관계도 있겠고 성(性)격 차이를 핑계 삼아 파트너를 찾는 불륜 커플도 있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면 섹스파트너 관계는 의외로 많다. ‘오늘부터 섹파 1일!’과 같이 당사자들 간 분명하고 원만한 합의로 성사되는 로또 같은 관계는 드물다. 실상은 원나잇 스탠드가 이끌고 간 홍콩의 황홀경을 잊지 못하거나, 썸을 타다 우연히 잠자리를 같이했는데 더 정서적인 관계로 진전되지 못해 섹파가 되는 경우가 더 일상적이다. 다만 이런 경우 정작 당사자들이 스스로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사전적 정의로 따지면 그들도 그저 데이트 좀 하고 ‘땡길 때’ 살을 섞는 섹파가 맞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그들 관계를 명확히 섹파라고 정의하기보다는, 그 관계는 여전히 썸이고 그냥 ‘가끔 보는 사이’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무의식적’ 섹파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런 류의 섹파라는 것은 그 자체로 시작과 끝이 있는 관계가 아니다. 이전 관계의 연장선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관계로 나아가는 과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사자 간 입장차에 따라서도 섹파라는 관계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시시각각 변화한다. 예컨대, 한쪽은 단순히 쾌락을 위해 만나는 섹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기지만, 다른 한쪽은 본격적인 연애로 가는 통과의례라 자위하는 것처럼 말이다. 애초에 성적 욕망만으로 얽혔다가도 그 무섭다는 몸정이 들어 한쪽이 더 진지한 관계를 원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그렇기에 ‘우리 무슨 사이야?’라는 짧고도 함축적인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뒤바뀔 수 있을 만큼 위태롭고 불확정적이고 유동적인 관계가 섹스파트너이다. 섹파를 위한 섹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랑 까진 MZ 세대?
최악의 세대론, 문란함 뒤집어 씌우기

그런데도 섹스파트너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성욕’, ‘책임의 부재’, ‘육체적 쾌락’과 같은 미묘하게 부정적인 수식어가 붙는 것은 왜일까. 애초에 섹스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스스럼없이 쓰게 된 것도 얼마 안 됐는데, 거기다 파트너라니. 자칭 ‘유교 민족’의 유구하고 근엄한 역사를 생각하면 용인되기 어려울 만도 하다. 성이라는 것 자체가 다스려야 할 금기로 여겨지는데, 그 금기를 거스르기 위해 맺어진 관계를 좋게 볼 리 만무하다.

드라마에서 섹스파트너라는 관계를 다룰 만큼 천지개벽을 이룬 2021년에도 이런 못마땅함이 상존하는 것은 결국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 것을 다스리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자기 발작적 증세이다. 불륜이나 바람을 기반으로 한 섹파를 위시하여 나머지ㅡ앞서 말해던 비의도적, 불확정적, 과도기적ㅡ섹파까지 뭉뚱그려 성도착증 환자 취급하는 졸렬함의 발로이다. 그리고 못마땅함의 대상은 늘 그래왔듯 ‘요즘 것들’에 집중된다. 대놓고 욕은 안 하더라도, ‘다르다’고 구분 짓는다.

MZ 세대라고 한다. 1980년 초반-2000년 초반 출생의 20년 넘는 나이 차까지 싸잡아 일반화하는 단군 이래 최악의 세대론이지만, 일단 그렇다 치고. ‘MZ 세대의 OOO한 가치관’, ‘MZ세대, OOO까지 해요’, ‘OOO한MZ 세대와의 소통’ 등의 ‘야마’를 뽑아 호들갑 떨어대는 기사들을 보면 마치 외계생명체를 발견했나 싶을 정도다. 성이나 연애와 관련해서도 ‘표현에 거리낌이 없는’, ‘관계에서 부담을 가지기 싫어하는’, ‘성에 개방적인’, ‘당당하게 섹스 토이 구매해요’ 같은 수식어를 붙이며 새로운 인류의 발견을 공표한다.

그런데 톡 까놓고, 옛날이라고 얼마나 달랐을까? 1990년대 초 X세대 담론이 한창일 때의 기시감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요즘 애들은 전보다 더 발랑 까졌나? 정말로 전적으로 도구적인 관계로서의 섹파가 전보다 늘어났을까? 여기에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장담컨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답하면 사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섹파 경험이 있더라도 억압적인 과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 섹파 있어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용자가 얼마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비교할 만한 준거집단을 구할 수나 있겠냔 말이다.

섹스파트너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인구에 회자된 것도 기껏해야 20여 년 안팎인데, 그 전 세대들이 지금 와서 어릴 적 만났던 그 사람이 섹파인지 애인인지 판별하는 것도 신뢰성의 문제가 있다. 변한 게 있다면 여성의 주체성이 조금이나마 더 인정받게 되고 사회적 억압이 줄어들며 섹스에 대한 언급이나 욕구 표출이 좀 더 편해졌을 뿐, 요즘 애들을 중심으로 특수한 섹스 관계가 늘어났고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비교의 조건이 불충분하다.

발랑 까진 요즘 애들은 그다음 발랑 까진 요즘 애들에게 꼰대 짓을 할 태생적 운명을 타고난다. 그룹 섹스를 즐겼던 68혁명 발 히피들도, ‘상실의 시대’를 살며 공허한 섹스를 밥 먹듯이 해대던 신인류도 이제는 신보수주의의 최전선에 서서 ‘요즘 것’들을 개탄하고 있다지 않은가.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그래서 유순하게 길들일 가장 좋은 구실이 인류 최대의 관심사인 성문화인 것이고.

문란함, 개방성, 성 관념 모두 상대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섹스로 맺어진 관계라는 것은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해’의 영역이지 ‘인정’의 문제는 아니다. 


그래도 평등한 관계란 없다
섹파, 그 열린 결말

그냥 술 먹고 어쩌다 ㅅㅅ하게 됐고, 맘에 들어 그 뒤로도 몇 번 만나 잠자리를 했는데, 이 관계 계속해도 할까요? 만나면 다정하게 해주고 매너도 좋아서 저는 진지하게 만나볼 마음도 없진 않은데, 걔는 그냥 ㅅㅍ 정도로만 생각할까요?

그런데, 섹스 좀 자유롭게 하면 뭐 어떻다고? 인간관계 피곤하고, 감정 소모 싫고, 연애하려면 돈도 많이 드는데, 그냥 맘 맞는 사람끼리 욕구 채워주는 게 뭐가 문젠가. 장애인 인권단체 전문가가 장애인의 성적 권리를 위해 공창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유럽 선진국들은 장애인 대상 섹스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이런 시대에(이렇게 말한다고 성매매 찬성론자라고 매도하는 단세포적 독서는 삼가자).

요는, 그만큼 성은 자연스러운 욕구이고 권리라는 것이고, 반드시 ‘우리 사귀자’, ‘손잡고 걸을까?’, ‘키스하고 싶어’, ‘라면 먹고 갈래?’로 이어지는 테크를 타야만 섹스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재고하자는 것이다. 섹스가 ‘진도’의 시작이 될 수도, 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섹파도 있을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관계의 형태일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다만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성욕도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자 권리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다른 욕구들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성욕은 사람과 사람이 결합해야 충족되는 욕구이기에 아무리 억제한다 한들 감정선의 개입을 막기 힘들다.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관계란 평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희생하고 다른 누군가는 받으며, 누군가는 내일을 바라보지만 누군가는 지금을 갈구한다. 음양의 합일을 이루면서도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게 남녀(혹은 남남, 녀녀)다. 그래서 우리 조상님들이 일찍이 이를 동상이몽이라는 네 글자로 정리하시지 않았는가.

평등할 수 없기에 섹스파트너 관계는 필연적으로 교차로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그 결말은 열려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그 결말의 간극이 꽤 클 수 있다는 것쯤은 알아두자. 영화 <프렌즈 위드 베네핏>(2011)에서처럼 연인으로 발전하는 해피엔딩이 될 수도, 혹은 <바닐라스카이>(2001) 처럼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 교차로에서 동행 길에 오르든 각자의 길을 가든,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고 변화무쌍한 그 관계의 무게는 결코 ‘섹파’라는 두 글자 단어가 상기시키는 느낌과 같이 가볍지만은 않다는 것을.

Related
Go to top Go to top

Email Newsletter

140만이 임볼든을 고집하는 이유, 지금 바로 뉴스레터를 통해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