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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배우, 관객까지 모두가 공감하는 무대를 만들 겁니다.

벽과 창문, 문고리, 펜 한 자루, 물 컵 하나에서도 의미를 찾는 그의 공간은 섬세함과 디테일로 완성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릭터의 동선, 걸음걸이, 습관, 장면의 공기와 분위기, 대본 속 텍스트에 글자 하나하나까지도 세밀하게 놓치지 않고 전부 디자인으로 발전시켜버리는 무대 디자이너 조경훈은 참 집요한 사람이다.

동시에 협업이라는 연극의 특성상 반드시 요구되는 자질, 균형감각에도 탁월한 재능을 갖췄다. 연출과 배우, 전 파트의 스테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휘말리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한 디테일 속에 자신의 철학을 설파해 낸다. 결국 팀워크와 고객 만족, 자아실현을 함께 쥐는 고수라는 것. 어쩌면 그의 유연성, 그 야들야들한 융통성 속에서도 내 디자인과 소신을 충분히 펼칠 수 있다는 긍정성이야말로 진정한 무기가 아닐까.

배우나 작가보다는 더 낯설게 느껴지는데요, 무대 디자이너가 하는 일에 대해 간략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공간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거예요. 관객이 무대를 볼 때 한 장면 장면의 배경, 구도, 사물 배치 같은 공간적 디테일이나 장치로 극의 분위기와 메시지를 더 전략적으로 전달하는 일. 즉, 미장센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역할이라고 보면 됩니다.

벽이나 문, 바닥, 창문 등 큰 틀부터 포크나 접시의 위치, 낙서 하나까지 무대를 구성하는 요소라면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도 모두 의도를 갖고 배치하죠. 제 손만 닿는다면 먼지 한 톨이라도 통제할 겁니다. 사물 하나가 더해질 때마다 매번 되묻습니다. 배우가 이걸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 여기 이 창문 하나를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왜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그 의미를요.

이 직업을 선택한 계기가 있나요?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에 푹 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영화 쪽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연출보다는 미술 파트에 관심이 갔어요. 마침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부에서 공간연출학과가 새롭게 생겼다는 말을 듣고 1기로 입학했습니다. 2007년이니까 벌써 13년 전이네요. 

원래 처음에 영화가 목적이었는데 주로 연극, 뮤지컬 분야로 방향을 바꾼 이유는?

겨울방학마다 상업영화 현장에 나갔었어요. 역시 현실은 상상과 다르더라고요. 강도가 굉장히 높기도 했고, 영화의 특성상 리얼리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무대 속에서 디자이너가 더 자유롭다고 느꼈어요. 개인적으로 풀 수 있는 그림도 다양하고요. 그래서 영화 말고 무대미술을 택했습니다. 게다가 학교에서 공연을 여러 번 올리면서 극장만의 매력에 눈을 뜨기도 했고요, 완전히 이 바닥에 빠져들어 버렸네요.

뭐 영화뿐 아니라 광고나 홈쇼핑,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희곡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텍스트를 읽고 장면을 분석하고 제 머릿속 공간을 현실로 연출해내고 하는 작업이 너무 재밌어서 쭉 한길을 걷고 있어요. 공연을 하면서 알게 되는 사람들, 연출이나 배우, 조명 등 다방면의 전문가들과 협업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도 적잖은 메리트예요.   

언젠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텍스트가 명확해지는 날이 온다면 직접 연극을 연출해보고 싶어요. 일단 메시지가 분명해야 하니까. 이 분야에서 부지런히 내공을 축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행되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 봅니다(웃음). 

텍스트에서 실제 무대가 만들어지기까지, 무대 디자인 프로세스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 주세요

가장 먼저는 대본을 분석하죠.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컨셉을 잡으면 리서치 작업에 들어갑니다. 희곡에서 말하는 장소부터 시작해서 당시 시대적 배경, 제가 생각하는 텍스트의 분위기와 전반적인 이미지를 공격적으로 수집해요. 그 후에야 디자인으로 넘어갑니다.

아이디어 스케치가 끝나면 장면마다 러프 스케치를 그려보고 이게 완성되면 도면으로 표현했을 때 어떤지 봐야 해요. 이렇게 3D 장면 스케치와 도면을 오가면서 실제에 가깝게끔 다듬어갑니다. 도면 작업은 평면도에서 단면도, 제작도 순으로 진행돼요. 예산이 많은 공연이면 모델링 작업도 하고요, 하지만 대개는 바로 시공으로 넘기죠. 손수 설계해야 하니까 건축적인 지식도 필수입니다. 그래서 건축 분야에 계시다가 무대 미술로 직종을 바꿔 오신 경우도 왕왕 있는 편이에요.

무대디자이너로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디자인 할 때 의미가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 벽지의 무늬 하나도 의미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디테일에서 관객과 배우를 의식해요. 특히 연출과 배우, 조명, 그 외에 다른 스테프분들 모두가 만족하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면에선 제 고집을 내세우지 않고 유연하게 맞춰가요. 하지만 그냥 보기 좋으니까, 비주얼이 멋져서 이렇게 시도해본다는 공식은 저에게 절대 있을 수 없고 또 타협할 수도 없는 지점입니다. 

이런 디테일 중독 때문에 직업병 아닌 직업병도 생겼는데요, 공적인 공간에서 의미를 찾는 습관을 사적인 공간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거예요. 인테리어하면서 소품을 하나 들일 때도 심사숙고를 거쳐요. 오래전 공연 때 직접 제작했던 테이블을 제가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이게 제 인테리어의 기준점이 됐어요. 집 전체의 모든 분위기와 장식을 이 책상에 맞춰서 시작했습니다. 

참여했던 작품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무대가 궁금합니다

지난 1월에 올렸던 ‘뮤지컬 폴’이라는 작품이요. 해리성 장애를 다룬 작품인데, 주인공이 총 네 명의 인격을 가졌어요. 그 인격을 일인사역이 아닌 사인일역으로, 네 명의 연기자가 각각 표현하는 게 독특한 포인트죠. 이때 등장하는 집을 창문과 문으로만 디자인했어요. 문은 서로 다른 공간은 연결해주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외부로부터 단절시키는 의미도 있죠. 세상과 단절되려고 이 문을 열고 들어온 폴과 왓슨의 심리를 반영해 벽 없이 문만 가득한 집을 완성했습니다.

여기에 연출, 배우, 조명, 스테프들도 눈치 못 챈 저만의 디테일을 몰래 추가했는데요, 바닥에다가 캐릭터 이름이랑 불특정 다수의 이름을 막 써 놨었어요. 근데 관객들이 이 낙서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 거예요. 이 이름이 어떤 단서를 품고 있는지, 혹은 숨겨진 자아의 한 부분인지 다양한 시각으로 마구 추측하면서 나름의 추리를 펼치더라고요. 

그래서 정답을 내놓은 관객이 있었나요?

연출한테도 스테프한테도 안 말하고 은밀하게 감춰놓은 단서였는데, 무대 단 위로 나열된 여러 가지 이름의 앞 글자를 하나씩 따면 ‘Where is John’이란 문장이 나와요. 네. 바로 극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숨겨진 자아가 또 한 명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사인입니다.

단서를 주려고 써놓은 이름들조차도 고유 의미를 고려해서 선정했어요. 방랑자, 태양, 축복받은 집, 빛나는 새벽, 별, 웃음, 평화의 선물, 희망에 찬 등. 하나씩 떼어놓고 봐도 극 속에 장면과 스토리의 흐름에 맞는 해석이 나오고, 첫 글자를 따서 합치면 문장이 나오는 거예요. 작품을 많이 보신 관객분들이 이걸 알아내시고 즐거워하셨다더라구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거라고 생각한 작은 부분을 누군가 캐치해서 알아봐 줬다는 게, 또 제가 극을 즐기는데 영향력을 끼쳤다는 사실이 너무 재밌고 신기했습니다.

개개인의 일상을 노동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이야기, ‘이게 마지막이야’에서 갑과 을의 관계, 빈곤의 악순환 등 극의 분위기와 캐릭터를 표현할 때 어떤 장치를 사용했는지?

대본을 읽었을 때 가장 많이 생각나는 그림이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새는 사람들’ 이였어요. 통유리 속에 외로워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게 마지막이야’에 나오는 편의점과 그 인물들을 닮았다 생각했죠. 그 그림의 녹색빛을 무대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지나가다 우연히 동네 편의점을 봤는데 낡은 분홍색 벽돌 건물이 눈에 밟히더라고요, 극에 쓰인 낡은 분홍색 벽돌과 녹색 창틀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전체적인 무대는 통유리창으로 이분해 버렸어요. 편의점 유리창을 기점으로 안과 밖의 긴장감의 차이, 갑과 을의 관계를 관객들에게 냉철하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파인텍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에서 75m 굴뚝에 고립된 사람들처럼 편의점에 고립된 이미지를 강조하려고 식사 코너를 만들었죠. 

하지만 고객을 위한 편의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벽 사방에는 금지표시들이 가득합니다. 앉아 있어도 굉장히 불편하도록. 반면 편의점 안은 엄청 깨끗하게 진열되어 있어요. 1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 점장의 성격을 부각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판대를 가득 채웠습니다. 하얀 타일 바닥과 하얀 벽, 형광등은 그런 편의점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고요. 

세대별 아버지의 일대를 그린 연극 ‘아버지들’의 경우는 어땠나요? 

아버지들은 장면이 정말 많아요. 등장인물도 많고, 시대도 다양합니다. 1933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아버지의 일대를, 그런 아버지 세대와 현재 딸의 세대 간 격차, 그리고 그 간극에서 오는 문제를 보여주는데요. 많은 장면들과 시대들을 하나의 공통된 무언가로 묶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오래된 파일 박스를 무대에 그대로 올렸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극의 흐름을 ‘과거의 기억이 담겨있는 파일 박스’ 속에서 꺼내는 이야기로 표현한 거죠. 모든 박스에는 그 시대의 날짜가 쓰여 있고 안에는 그 시절의 소품이 들어있습니다. 과거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여기서 끄집어낸다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파일 박스로 둘러쌓인 문에서 나오는 설정으로 잡았어요. 

흥미로웠던 점은 이 무대의 바닥인데요. 과거의 아버지와 현재의 딸이 어떻게 만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바닥을 여러 갈래의 길로 만들어 놨습니다. 문에서 나오는 길이 또 다른 문에서 나오는 길과 만나 접점이 생깁니다. 6개의 문에서 나오는 길은 얽히고설켜 특이한 마룻바닥을 만드는데 관객들에게 인상이 깊게 남았나 봐요. 공연을 본 분들이 유독 바닥 얘기를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감상했을 때 미술적으로 뛰어난 영화를 추천해 준다면?

봉준호 감독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요. 특히 ‘마더’는 장면 하나하나를 다 뜯어서 분석했던 작품이에요. 흐르듯 보든 쪼개서 보든 장면 하나하나에 다 의미가 있고, 허투루 지나가는 게 없어서 더 빠지게 되는 거죠. 마지막에 춤추는 씬은 이미 유명하니까, 다른 장면을 꼽아 보자면 바로 한약방 씬입니다. 엄마가 일하는 공간이 약방인데 약재가 주렁주렁 걸려있어요. 아들을 구하려고 매달린 약들을 막 헤치고 나가는 장면이 있는데 마치 나무와 덤불이 우거진 숲을 헤치고 나가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한약방이라는 공간적 특색이 극적인 상황을 더 효과적으로 증폭시킨 좋은 장치였던 것 같아요.  

매일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 EDC 리스트가 궁금합니다

제가 원래 물건 가지고 다니는 걸 되게 싫어해요. 그래서 일이 없을 때는 아예 가방 없이 작은 카드지갑 하나만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사이즈는 작은데 카드, 명함, 현금, 집 키 등 필요한 건 다 들어가거든요. 오늘은 작업이 있어서 레이저 줄자랑 아이패드도 챙겨왔어요. 참고로 이전에는 항상 미팅할 때마다 노트북을 들고 다니다가 태블릿으로 바꾸니까 너무 편해서 업무의 질이 아이패드 전 시대와 후 시대로 나뉠 정도입니다. 시계는 캉골 거에요. 원래 별 관심이 없는데 어느 날 친구가 찬 시계를 보고 유니크한 디자인에 반해서 바로 따라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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