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전체를 방호할 수 있는 풀페이스 헬멧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모터사이클 헬멧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하지만 헬멧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항상 더 나은 방법론을 생각해내는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오늘날 표준이 된 풀페이스 헬멧을 처음으로 고안해낸 브랜드 벨(Bell), 그리고 설립자 로이 릭터(Roy Richter)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한다.
단돈 1천 달러로부터
로이 릭터는 1914년 미국 일리노이주의 두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모터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30년대에 프로레이스 드라이버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관심만큼의 재능이 받쳐주는 선수는 아니었다.
다행히 릭터는 그 사실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직접 머신을 조작하며 경쟁하는 것보다, 자신이 차량을 직접 개선하고 손보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다. 차량의 튜닝, 파츠 개선 같은 영역에 몰두하기 시작한 그는 이후 1933년에 벨 오토 파츠라는 자동차 부품가게에 입사해 근무를 시작한다.
벨 오토 파츠는 1923년 캘리포니아에서 설립된 작은 매장이었다. 릭터는 이곳에서 꽤 오랜 기간 근무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무렵에 이 가게를 인수한다. 인수 비용은 단돈 1천 달러. 지금 기준으로 보면 푼돈이지만, 릭터는 당시 이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애지중지하던 차량까지 팔아치웠다고 한다.
벨과 릭터의 터닝 포인트
그렇게 차량 부품 업체로 시작한 벨은 곧 중대한 반환점을 맞이한다. 이듬해인 1946년, 릭터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트랙 경주 중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이 사고를 목격한 그는 큰 상실감과 함께 레이스에서 안전장비로 모든 관심을 돌리게 된다.
릭터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안전장비가 경주의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작용하느냐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헬멧을 만드는 것이 아닌, 본네빌 내셔널 스피드 트레일(Bonneville National Speed Trials) 같은 경주를 보면서 수많은 사고와 부상의 표본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얻어진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릭터는 헬멧 제작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미 해군의 베테랑 파일럿인 프랭크 히콕스(Frank Heacox)가 가장 큰 조력자가 됐다. 히콕스는 군용 항공기 파일럿이 사용하는 헬멧의 샘플을 제공했고, 또한 이를 분해한 뒤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해 벨의 상표를 달고 나올 헬멧의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그렇게 1954년에 벨 최초의 프로토타입 헬멧인 벨 500이 탄생하게 된다.
벨 500은 글래스 파이버 소재의 외피에, 내피는 폴리우레탄의 폼 라이너로 마무리한 오픈페이스 헬멧이다. 라미네이팅과 연마 작업은 모두 수작업으로 완성됐다. 당연히 인력과 비용도 배로 투입됐다. 대신 더 튼튼한 헬멧을 만들기 위한 릭터의 의지 또한 제품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지금 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품질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벨 500으로부터 시작된 도약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벨 최초의 헬멧은 곧 시장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해 열린 카레라 팬-아메리칸 로드 레이스에서 빌 스트롭 링컨 팀이 벨 500을 착용하고 경기에 나선 것이다. 이듬해인 1955년에는 인디애나폴리스 500에 출전한 Cal Niday가 두개골이 골절되는 대형 사고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헬멧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제품은 곧 관공서에도 납품되기 시작했다. 탁월한 안전 성능으로 미국 경찰에서도 벨 헬멧을 채택한 것이다. 800여 곳에 달하는 경찰서가 벨 500을 앞다투어 주문했다. 그렇게 벨 헬멧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결국 리처는 벨 헬멧 컴퍼니라는 자회사까지 따로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고객은 비단 프로 드라이버나 경찰, 모터사이클 라이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안전 성능을 알아본 각계각층 종사자들이 벨 헬멧을 쓰기 시작했다. 미국 스키팀과 스턴트 드라이버들도 벨의 열렬한 팬이 됐다.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벨은 1968년 캘리포니아 롱비치로 본사를 확장·이전하게 된다.
풀페이스 헬멧의 탄생
이전과 동시에 벨은 또 하나의 획기적인 제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이전까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완전 새로운 형태의 모터사이클 헬멧이었다.
1968년 인디애나폴리스 500에 출전한 드라이버 댄 거니는 벨이 새롭게 출시한 모토 스타(Moto Star)를 대중에 공개했다. 이전까지 모든 헬멧은 안면부가 외부에 노출되는 오픈페이스 형태였지만, 이 모토 스타는 달랐다. 볼에서 내려온 헬멧 셸이 턱으로까지 이어지며 하관을 완전히 덮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풀페이스 헬멧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벨 모토스타는 헬멧의 패러다임을 바꾼 역사적인 모델이었다. 이어지는 1970년에는 벨 모토 3를 만들었고, 이듬해에는 오프로드 버전의 풀페이스 헬멧까지 출시했다. 모터스포츠에 종사하는 수많은 드라이버와 라이더들은 이 새로운 헬멧에 열광했다.
풀페이스 헬멧의 탄생은 거대한 혁신이었다.
실제로 모터사이클 사고 시 헬멧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는 부위는 친 가드, 즉 턱이다. 그 비율은 무려 34%에 육박한다.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뒤통수나 이마 부위는 물론 치명률은 높지만, 충격 비율은 각각 24%와 18% 정도로 더 낮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풀페이스 헬멧의 탄생은 거대한 혁신이었다. 이 업적을 인정받은 릭터는 1975년 SEMA(Speed Equipment Manufacturers Association)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된다.
가장 신뢰받는 헬멧 브랜드로
커지는 규모를 감당할 수 없었던 벨은 1976년에 다시 캘리포니아 노워크로 본사를 이전했다. 이곳에서 16,722㎡ 규모의 부지에 신재료 실험과 디자인 혁신을 위한 연구소를 세웠고, 첨단 소재를 꾸준히 도입하며 제품의 발전을 꾀했다. 통풍을 위한 에어덕트, 김 서림 방지 실드, 땀을 빠르게 흡수·건조하는 내피나 패드 등은 모두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1980년, 릭터가 은퇴하던 해에 벨은 미식축구 헬멧 제조사인 리델(Riddel)과 합병되며 잠시 벨-리델이라는 이름이 된다. 이후 가지치기를 거쳐 1991년에 벨 헬멧이 되고, 모터스포츠 사업부와는 별개로 나뉘었다가 2005년에 다시 합병된다.
지난 2016년 비스타 아웃도어(Vista Outdoor)에 인수된 벨은 현재 F1과 모토GP, 투르 드 프랑스 같은 세계 최고의 레이싱 스포츠부터 일반 대중의 취미 영역까지 곳곳에 파고들었다. 특히 모터사이클과 자전거 분야에서는 가장 신뢰받는 헬멧 메이커로 지위를 공고히 다지고 있다.
유산에 대한 경의와 존중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이룩한 훌륭한 유산을 벨은 결코 헛되이 쓰지 않는다. 이들은 현재의 브랜드를 있게 한 기념비적인 모델에 경의를 표하며, 그 헤리티지를 살린 헬멧을 지속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오리지널 벨 500을 계승하는 벨 커스텀 500이나 벨 불릿(Bullitt)같은 모델이 좋은 예다. 오늘날 이 모델들은 경량 소재의 셸, 고밀도 EPS 라이너, 패딩 처리된 턱끈과 D 링 시스템으로 뛰어난 핏과 쾌적한 착용감을 제공한다.
벨 불릿 카본 에디션 같은 모델은 카본 소재로 제작한 초경량 헬멧이지만, 과거의 빈티지한 디자인까지 고스란히 구현해낸 센스가 돋보인다. 2016년에 새로운 소재로 업데이트된 벨 모토 3 역시 스냅 바이저를 적용하여 과거의 클래식한 매력을 현대로 고스란히 가져왔다. 또한, 풀-9부터 생션(Sanction), 스파크(Spark)에 이르는 각종 MTB 헬멧, Z20 시리즈 같은 사이클 헬멧까지. 벨은 자전거 시장에서도 꾸준히 사랑받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가고 있다.
릭터가 벨을 통해 남긴 것
벨이 세계적인 헬멧 제조사로 거듭나던 시점에서 릭터는 이미 SEMA 명예의 전당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기업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선에서 은퇴하기 전까지도 정력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벨이 모터스포츠에 이어 브랜드 최초의 사이클 헬멧을 생산하던 1980년 무렵에도 이를 감독했던 것은 바로 릭터였다. 그는 언제나 레이싱 스포츠에 있어서 선수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부디 그의 신념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