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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만드는 방앗간, 그리고 인간 김원진
2023-02-21T17:20:01+09:00

희미해져 가는 아련한 추억을 다시 꺼내 소중하게 닦아내는 것은.

34세의 젊은 방앗간 사장 김원진에게 ‘추억’이란 단어는 특별하다. 모두가 잊고 사는, 모두에게 잊히는 그런 옛것의 가치를 지키고, 간직하며, 또 만드는 것에 유난히 집착한다. 현재 원진방앗간을 꾸려가는 이유도, 소주를 잔술로 파는 가게를 꾸리고 싶다는 어렴풋한 꿈도, 하다못해 여전히 클래식 바이크를 타면서 컴퓨터보다는 수기로 노트를 작성하는 소소한 습관에서조차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직접 와보니 더 힙하다. 방앗간이 아니라 레트로한 카페 느낌이라.

정확히 봤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다 카페인 줄 알고 들어오더라. 내가 방앗간이라고 하면 다들 ‘잘못 왔네요, 나갈게요’ 이런 반응이었는데, 그러면 오히려 나는 ‘믹스 커피라도 한 잔 타드릴 테니까 그냥 나가지 말고 앉아서 이야기나 하다 가시라’고 하곤 했다.

넉살 좋고 사람 냄새가 난다. 일단 간단한 소개를 부탁해도 될까.

이제 방앗간을 운영한 지 3년 차 되는 34살 김원진이라고 한다.

궁금한 게 있다. 까놓고 말해서, 어린 시절부터 ‘나는 방앗간을 차리는 게 꿈이야’ 이러진 않았을 거 아닌가.

물론. 그 시절의 김원진은 그냥 술이랑 오토바이 좋아하는 망나니였지(웃음), 그리고 원래 내가 가졌던 꿈은 대학교 교직원이 되는 거였다.

교직원? 보통 이런 거 물어볼 때 인터뷰어가 예상하는 평범한 답변과는 좀 거리가 있는 대답인데.

내가 충남 홍성에 있는 청운대에 다녔는데, 이 홍성이 나에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그리고 바이크 커스텀이라는 취미를 갖게 된 것도 그 시절부터였고. 마침 그때 같이 죽이 잘 맞는 죽마고우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둘이 계획했던 미래가 ‘학교 교직원이 돼서 근처에 개러지 하나 만들고 퇴근하면 같이 바이크나 만지면서 재미있게 살자’였다. 보통 대학교 교직원은 방학이면 근무시간이 짧지 않나. 실제로 교직원으로 가는 계획도 거의 문턱까지 갔었다.

그런데 왜 바뀌었나.

사실 그 친구가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 오토바이 사고는 아니었다. 20대 때였는데 마침 그 나이 때가 또 의리와 감성이 굉장히 충만했던 시기 아닌가.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술 마시며 함께 미래를 설계하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고인이 되어버렸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타고 다니는 이 DH88도 그 친구의 바이크다. 아마 이건 평생을 가도 절대 못 팔 거다.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일이 나에겐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한 것 같다. 그렇게 애착이 강했던 홍성을 떠나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때마침 당시 좋은 기회가 있어서 캐리어 하나만 싸 들고 남양주로 가서 지인과 함께 2년 정도 바이크 커스텀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오토바이, 특히 커스텀이라는 것이 마이너의 삶 아니겠나. 그리고 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그래서 평범한 회사에 취직해서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어떤 쪽이었나. 혹시 전공을 살려서 간 건가.

전혀 아니었다. 회사는 인사채용 쪽이었고 전공은 영어영문이다. 전혀 상관도 없고, 영어 쓸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술 마시면 영어가 아직까진 잘 나오는 것 같다(웃음).

그런데 잘 다니던 직장을 왜 관두고 방앗간을 차렸나. 심지어 인사채용 쪽이라고 한다면 회사가 어느 정도 규모도 있고 굉장히 안정적인 포지션이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반대다. 인사채용 부서에 있다 보면 되레 스스로 위기감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나도 얼마 안 남았네?’ 이런 생각이 더 강해지는 거지. 결국 언제가는 자영업의 길만 남을 텐데. 그래서 처음에는 귀농을 생각했었다.

그럼 귀농 준비 과정은 어땠나.

청년들이 귀농을 한다고 하면 실제로 정책은 굉장히 잘 되어있다. 제도도 좋고, 대출도 억 단위로 쉽게 나온다. 그래서 교육도 받고 이것저것 알아보긴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걸 5년 안에 성공시키지 못하면 그게 전부 빚이 되더라. 덕분에 귀농은 접었는데, 그래도 곡물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아이디어 하나만큼은 계속 남아있었다. 그래서 방앗간을 시작하게 된 거다. 실제로도 지금 미숫가루에 들어가는 서리태, 백태, 참깨, 들깨는 외할머니가 계시는 삽교에서 직접 심고 가공까지 다 해서 쓰고 있다.

영상 인터뷰 때도 말했지만, 처음부터 창업을 한 건 아니고 방앗간에서 무급으로 1년을 일했다고 하지 않았나. 왜 그렇게 시작한 건가.

요즘에 젊은 친구들이 하는 방앗간이 굉장히 많다고는 했지만, 사실 그 친구들은 대부분 가업을 물려받는 형태다. 나처럼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무에서 유로 들어가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봐도 된다. 그런 내가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렇게 인천에 있는 방앗간에서 1년 동안 무급으로 일하면서 어떻게 보면 단기간에 기름 짜는 것만 빡세게 배운 셈이다. 미숫가루는 독학이었고.

그렇다면 방앗간이라는 아이템을 선택한 이유는.

곡물도 곡물인데, 워라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점도 크다. 나는 일단 기름이 메인인데, 기름은 짜놓고 판매하면 되는 거라 내 스케줄에 맞춰서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다. 물론 떡도 하라면 할 수는 있는데, 떡은 무조건 당일 판매가 원칙이라 하루 일과를 거의 새벽 3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이제 떡은 방앗간에서 분리가 된 별개의 카테고리가 되기도 했고. 어쭙잖게 이것저것 하느니 차라리 전문성 있게 가자 해서 기름에 집중한 거다.

흔히 사람들 인식은 자영업자는 워라밸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데 여행 다니고, 바이크 타고, 캠핑 가고, 클래식한 거 좋아하고. 그런 자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엿보이던 것도 이런 부분 덕분인가.

스스로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 돈에 큰 욕심이 없어야 한다. 물론 지금 상태에서 돈을 좇고자 마음먹으면 돈이야 얼마든지 더 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워라밸이, 내 삶이 무너진다. 혼자 일하는 만큼 내가 필요한 정도만 벌면 충분하니까. 떡을 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부분도 있었다. 물론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하면 지금의 생각을 강제로 포기하게 되겠지만(웃음). 그리고 이렇게 말은 해도, 이유 없이 방앗간을 닫거나 일을 쉬거나 하진 않는다. 이런 부분은 철저히 지키려고 한다.

솔직히 그런 모습이 이미 여러 곳에서 보인다. 포털 사이트에서 원진방앗간 치면 나오는 사진도 그렇고, 연결된 인스타그램 계정도 그렇고. 업장 이름도 본명을 붙여서 뭔가 방앗간이라기보다는 인간 김원진의 라이프스타일이 브랜딩 된 느낌이랄까.

맞다. 내 자신, 내 이름이 브랜드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원진방앗간이라는 곳의 정보를 찾거나 내 SNS를 들어왔을 때, ‘이 사람 멋있게 사네? 그런데 방앗간을 해?’ 이런 호기심을 느끼게 해서 결국 찾아오도록 만들고 싶었다. 사실 예전에 인천에서 1년 정도 무급으로 일 배울 때도 시간적 여유는 꽤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바이크 타고 캠핑 다니면서 새로운 사람들 만나서 관계도 쌓고 그랬지. 만약 그때 그런 것들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방앗간도 이렇게 빨리 자리 잡지 못했을 거다.

혹시 지금 하고 있는 방앗간과 카페 외에도 김원진의 이름을 걸고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나 프로젝트가 있다면.

현재 종목은 기름과 미숫가루, 커피인데 술도 팔아보고 싶다. 다만 아무거나 팔겠다는 건 아니다. 예컨대 와인이나 위스키 이런 것보다는 소주를 잔술로 팔고, 까치담배도 피우고. 이런 옛날 감성이 느껴지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지금 방앗간을 하는 것도 그렇고,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들에게 잊히는 옛날의 추억들, 누군가 하지 않으면 잊히는 게 뻔히 보이는 그런 것들을 추억의 공간에 만들어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성공하게 된다면 언젠가는 다시 나의 진짜 고향과도 같은 홍성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픈 기억도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또 너무나 그리운 곳이기도 하고(웃음).

인터뷰 고맙다. 마지막으로 항상 던지는 임볼든의 공식 마지막 질문.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EDC를 소개해달라.

일단 DH88. 난 이 바이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출퇴근도 하고, 가끔 바쁘면 시장에 재료도 사러 가고, 어르신들 주문 들어오면 가까운 곳은 이거 타고 배달까지 간다. 내 삶에서 바이크, 그리고 이 DH88은 도저히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워낙 클래식한 걸 좋아하다 보니 난 컴퓨터도 없어서 이 노트에 모든 스케줄과 일 관련한 것들을 기록해둔다. 예약 들어온 주문 건부터 만드는 과정까지. 마지막은 말보로 화이트후레쉬. 담배를 처음 피웠을 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이 담배 하나만 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