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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중반,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였다. 우리 가족은 행사처럼 한두 달에 한 번씩 외식을 하러 나갔다. 메뉴는 한정적이었다. 요즘처럼 요식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였고, 지방 소도시였기 때문에 서울의 ‘신문물’이 들어오는 것은 매우 느렸다. 피자를 내가 살던 곳에서 처음 접할 수 있던 것도 중학생이 될 무렵이었다.
그래서 외식이라고 해봤자 정육점에 딸려있던 삼겹살집, 중국집, 경양식 정도가 선택지였다. 그중에서 경양식집은 나를 가장 설레게 하는 옵션이었다. ‘하이델베르크’라는 경양식 집이었는데, 서양식 건물처럼 치장한 상호명에 충실한 음식점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이 매우 고급스럽게 느껴졌고,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면 나 또한 고급스러운 사람이 된 것 같은 마음마저 느껴졌다.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흔한 인사, 그 밥 한번 같이 먹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메뉴는 ‘돈까스’부터 시작해 ‘비후까스’, ‘안심까스’, ‘함박스테이크’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격은 7-8천 원으로 당시로서는 꽤 비싼, ‘마음먹고’ 가야 하는 집이었다.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돈가스를 먹었는데, 꼭 돈가스가 맛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비후’, ‘안심’ 같은 말이 뭔지도 몰랐고, 중국집에 가면 ‘자장면이 제일 맛있어’라며 가장 저렴한 메뉴로 자식들을 이끌던 부모님의 간계가 경양식집에서도 통했던 것이다.
돈가스는 고기를 두드려 넓게 핀 후 빵가루를 묻혀 튀겨낸, 요즘 말하는 ‘옛날 돈가스’ 모양이었다. 그 위에 우스터소스를 흉내 낸 갈색 소스가 듬뿍 얹혀 나왔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칼질’을 하며 마치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너무 흐뭇했다. 식전에 나오는 동그란 빵도, 즉석식품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수프도, 케첩과 마요네즈로 범벅 한 샐러드도, 꼬질꼬질한 초록색 파마산 치즈 통도, 정갈하게 차려입고 깍듯이 손님을 대하는 종업원도 모두 나에게는 설레는 별세계였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설렜던 음식이, 2022년 지금 기준으로 보면 볼품없는 음식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먹거리의 종류도, 수준도 너무나 다양해졌다. 생전 알지 못했던 별의별 국적의, 별의별 재료로 만든 음식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TV를 틀기만 하면 음식 예능과 탐사 프로그램이 나오고, 뉴미디어에서도 음식을 주제로 한 콘텐츠들이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한다. 마트에는 이름도 생소한 외국 식재료들이 가득하고, 소셜 미디어에는 예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 사진들이 즐비하다. ‘먹방’이라는 단어는 영미권에서 고유명사로까지 사용된다. 그야말로 음식에 진심인, 음식 전성시대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국내 식품시장 규모는 무려 270조 원에 달하며, 외식업 사업체 수는 727,377개, 음식 사업체 종사자 수는 2,197,917명에 달해 전체 서비스업 매출액에서 6.6%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식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5%(38.9조 원)로 대한민국 국방비(2.8%)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지난 3년 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이러한 수치들이 감소하긴 했다. 그러나 취업 플랫폼 ‘사람인’이 성인남녀 2,929명을 대상으로 최근 실시한 ‘창업 의향’ 설문조사에서 창업 의향을 밝힌 60% 중 요식업 창업 희망이 1위(20.7%)로 꼽히는 등 음식 사랑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먹을 게 많아졌는데, 예전 경양식집에서 느꼈던 감흥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무조건 옛것이 맛있는 거라 우기는 ‘맛 꼰대’가 된 걸까. 맛이 주는 즐거움에 무감해진 것일까. ‘옛날 돈까스’, ‘냉동 삼겹살’, ‘시장 통닭’, ‘사라다빵’ 등 레트로 열풍과 함께 ‘추억 소환’을 도와줄 음식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됐지만, 뭔가 맛이 섭섭하다. 근본적인 맛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간이 약간 덜 된 국처럼 ‘2프로’ 부족한 느낌이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아 감칠맛이 덜한 듯, 한 끗 차이의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추억 보정’ 탓이었던 것 같다. 지인과 저녁에 소주에 냉동 삼겹살을 먹다 불현듯ㅡ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 그대로 부지불식간에ㅡ아홉 살 무렵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굣길에 삼겹살집을 지나가는데, 그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가 주린 배와 침샘을 예고 없이 자극했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이른 시간인데도 중년의 남성 둘이 냉동 삼겹살(당시에는 생삼겹살이 드물었다)에 소주를 곁들이고 있었다. 달아오른 불판 위에 깔린 쿠킹 호일, 시오야끼 소스에 살짝 담가 구워낸 달큰하고 짭조름한 삼겹살, 새콤달콤한 파무침.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 OO 정육점 지나오는데 냄새가 너무 좋았어!’라며 하교 인사를 대신했다.
사실 삼겹살, 목살, 갈매기살 등 부위에 대한 구분이 없던 당시였기에, 어떤 고기를 먹고 싶은 것인지도 몰라 횡설수설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는 좀처럼 뭘 먹고 싶다고 한 적이 없던 나의 주문이 반가웠던 듯했다. 어떤 냄새였는지 세세히 묻고 ‘그래, 금방 구워줄게’라고 말하며 냉동실에 남아있던 삼겹살 자투리를 꺼내 구워주는 엄마가 그날따라 유독 친절해 보였다. 나는 엄마의 그 정성이, 그 정취가 맛있었다. 경양식집에 갈 날을 고대하고, 마침내 그 하이델베르크 성에 입성해 ‘우리 가족’이 고급스러운 대접을 받던 그 시간이 맛있었다. 우리, 함께. 그 흔한 단어가 내 옛 맛의 조미료였다.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인사가 갈수록 힘들게 느껴진다. 진짜 밥을 같이 먹자는 의도로 이 말을 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통상 대화를 완곡히 마무리하기 위해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이 말을 요즘은 잘 하지 않게 된다. 일종의 책임감, 무게감 때문이랄까. 혼밥의 미덕이 찬양되는 시대, 남에게 보여지는 음식이 대세가 되는 시대, 밥 한번 같이 먹기 어려울 만큼 관계들이 어려워지고 삭막해지는 요즘. 그 밥 한번 같이 먹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름 미식가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음식에 대해 꽤 진지하게 고민하는 편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음식이라는 것이 꼭 입으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음식이 주는 즐거움에는 글루탐산이나 도파민 등등 화학작용만으로는 설명 불가한 무엇이 있다.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너와 내가 함께 맛보고, 그 풍미로부터 번지는 웃음을 보고, 경탄과 찬사의 소리를 들으며 가지게 되는 공감각(共感覺). 맛있는 것을 대접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공명하는 애틋한 정감. 어떤 감미료로도 대체할 수 없는 진미(眞味)의 정수이다.
한 번쯤 경험해봤을 것이다. 산해진미를 먹어도 혼자 혹은 불편한 사람과 먹으면 그다지 즐겁지 않다. 입은 맛있는데, 마음이 맛있지 않다.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2천 원 주고 사 먹는 싸구려 오뎅과 조미료로 범벅된 오뎅 국물도 ‘우리’가 먹으면 맛있다. 그 궁색한 식사 한 끼가 고작 사랑하는 이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마음까지 덥혀주고, 곧이어 입도 즐겁게 해준다. 음식에 곁들이는 함께하는 시간이 그 어느 음식보다 훌륭한 반찬이 되어준다.
이 흔한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고 지낼 수밖에 없는 요즘이 아닐까. 점점 각박해지는 경제,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어떤 강박이 지배하는 시간, 이해와 관용보다는 적대와 혐오가 앞서는 관계들. 그 속에서 그 흔한 밥 한번 같이 먹기 어려운 우리. 더 예쁘게 먹고, 더 맛있게 먹지만, 우리 같이 함께해서 더 즐겁게 먹는 일이 그토록 어렵기만 해야 할까.
11월 임볼든의 테마는 ‘밥’이다. 다양한 맛집과 밥을 짓는 사람들의 이야기, 놀랄 만큼 특별한 레시피 등 밥과 관련된 재미있고 유익한 콘텐츠들이 기다리고 있다. 매월 진행되는 ‘아낌없이 주는 이벤트’도 ‘밥’이라는 주제로 여러분을 찾아갈 예정이다. 이런 콘텐츠들과 함께 누군가와 ‘밥 한번 같이 먹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바란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사랑하고 소중한 이와 밥상의 온기를 뭉근히 지켜낸다면, 그 시간이 음식과 함께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추억으로 숙성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