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드패션드부터 하이볼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칵테일 종류
- 바 그리고 칵테일의 역사
- 럼과 브랜디, 그리고 무궁무진한 위스키의 세계
- 영국의 진, 러시아의 보드카, 멕시코의 데킬라, 그리고 대한민국 소주
- 막걸리, 청주, 약주 등 우리의 양조주를 찾아서
- 태초의 술에 가까운 양조주, 맥주 그리고 와인
- 술의 역사, 그리고 우리가 술을 마시는 이유
본 시리즈의 1편에서 ‘인류는 언제부터 술을 마셨을까?’라는 질문을 했는데,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그러면 ‘인류는 언제부터 술을 섞어서 마셨을까?’ 기원전 700년 경에, 오늘날 터키 지역의 Midas 왕의 장례식에서 와인과 미드, 보리맥주를 섞어서 제공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기원전 8세기)에도 일종의 와인에 염소 젖 치즈와 보리가루를 섞어 마셨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다만 이런 혼합 음료를 칵테일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다.
칵테일의 시작
최초의 구조를 갖춘 음료는 1600년대 이후에 등장한다. 바로 펀치(Punch)라고 하는 음료다. 펀치는 힌두어로 숫자 ‘5’를 의미하는데, 펀치에 다섯 가지 재료(술, 설탕, 시트러스, 향신료, 물)가 들어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펀치는 펀치볼이라 부르는 큰 그릇에 음료를 담고 여럿이서 나눠마시던 음료였다. 당시 영국령이었던 동인도 회사에 드나들던 사람들의 서신이나 여행자들의 보고서에 이 펀치의 기록이 등장한다. 이후 인도에서 영국으로 선원들이 복귀하자 유럽사회에 펀치가 전파되게 되는데, 17세기 말~18세기까지 펀치는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에서 가장 인기있는 음료가 된다.
냉장고와 제빙기의 등장
그러다가 19세기 초반 음료의 역사를 바꿀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냉장고와 제빙기의 발명이다. 그전까지 펀치는 주로 따뜻하게 먹거나, 아주 드물게 얼음을 구할 수 있는 극소수의 상류층만 얼음을 넣어 마셨다. 그런데 이제 음료에 얼음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획기적인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냈고, 그 상품은 또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냈다. 믹스드 드링크(Mixed-Drink)라고 불리는 혼자서 마실 수 있는 음료가 등장한 것이다. 이 새로운 수요에 맞춰 믹스드 드링크를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도구가 발전하게 되고, 이는 또다시 새로운 상품과 수요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사회 문화적 가치의 변화도 한 몫했다. 이전까지 펀치는 여럿이 모여 느긋하게 나눠먹는 형태의 음료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변화는 ‘좀 더 빠르게, 나의 음료를, 지금’ 원하는 문화로의 이행을 야기했다.
칵테일 그리고 바텐더
최초의 칵테일[1] 구성에 대한 기록은 1806년 5월 13일 <Balance>라는 뉴욕의 지면에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칵테일은 ‘증류주와 설탕, 물, 그리고 비터로 만들어진 흥을 돋우는 술’[2]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리고 1862년 오늘날 바텐더들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제리 토마스(Jerry Thomas)라는 사람(우리 바텐더들은 그를 교수님이라고 부른다)이 최초의 바텐더를 위한 트레이닝 북[3]을 출간한다. 거기에는 Fix, Fizz, Toddy, Sling, Crusta, 그리고 Cocktail 등 여러 믹스드 드링크를 만드는 법이 소개되어있다.
제리 토마스가 있던 시대는 그야말로 칵테일의 황금기였다. 글라스와 도구, 기술은 더욱 정교해지고, 아메리칸 스타일의 바가 전 세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920년 금주법의 그늘이 미국을 덮기 전까지 말이다.
칵테일의 암흑기
1919년 1월 수정헌법 18조에 비준하여 미국내 알코올의 생산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507개의 증류소, 1217개의 브루어리, 그리고 18만 개의 살롱이 폐업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외식업계, 특히 바 업계가 입은 타격이 상당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금주법 당시의 타격은 실로 상상이 불가할 정도의 궤멸적인 상황이었다.
1919년 1월 수정헌법 18조에 비준하여 미국내 알코올의 생산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바텐더의 역할은 질 나쁜 술의 맛을 숨기는 역할로 변질됐다.
미국 내 알코올 생산이 중단되자 위스키와 럼의 밀수입이 횡행하였으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밀주를 생산했다. 이윽고 바텐더의 역할은 질 나쁜 술의 맛을 숨기는 역할로 변질됐다. 실력 있는 바텐더들은 일자리를 잃고 런던과 파리, 그리고 쿠바 등지로 망명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망명했던 바텐더들이 전 세계에 미국 칵테일 문화를 알리면서 정작 세계적으로는 바 문화 확산에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가 런던으로 망명한 해리 크래독(Harry Craddock)이다. 매년 세계 최고의 바를 선정하는 어워드에서 현재까지도 상위권에 드는 사보이 호텔 런던(Savoy Hotel London)의 ‘아메리칸 바’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다. 1930년 그가 작성한 <Savoy Cocktail Book>은 오늘날까지도 바텐더들의 칵테일 백과사전으로 통용되고 있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됐지만, 미국은 칵테일 문화 회복에만 약 6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바텐더들은 기술을 잃어버렸고, 소비자들은 이미 싸구려 재료에 길들여진 이후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텐더 트레이닝이 불필요한 간단한 레시피의 칵테일만 마시곤 했다. 가루로 된 사워 믹스(Sour Mix), 공산품 시럽 등이 이때 대거 등장했고, 인공적인 플레이버를 첨가한 증류주(특히 보드카)가 미국사회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이때 유행했던 음료의 스타일은 향을 첨가한 보드카 등 증류주에 시럽이나 소프트 드링크를 섞어 쉽게 만들어 마실 수 있는 음료였다. 기업에서 마케팅을 위해 만들어낸 레시피가 쏟아져 나왔고, 사워믹스, 네온 빛 프로즌 칵테일, 신체 부위나 성행위를 묘사한 칵테일이 흥행했다. 칵테일의 암흑기였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1990년 이후 런던과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을 중심으로 바텐더들 사이에서 칵테일 황금기 시절의 음료를 부활시키려는 크래프트 칵테일 운동이 일어난다. 바텐더들이 암흑기의 관습을 버리고 좋은 재료와 기술, 레시피를 이용해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칵테일 중 일부는 그 지역의 바를 벗어나 글로벌 바 커뮤니티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바에서 수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를 모던 클래식(Modern Classic)이라 부른다.
칵테일은 단순히 술에 음료를 섞는 행위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수 백년의 지식이 축적된 인류의 집단 지성이자 식문화이다.
오늘날 동시대의 바들은 이 모던 클래식과 크래프트 칵테일 운동의 정신을 기반으로 그들만의 개성을 더한 바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것이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바와 칵테일의 간략한 역사의 흐름이다. 칵테일은 단순히 술에 음료를 섞는 행위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칵테일은 수 백년의 지식이 축적된 인류의 집단 지성이자 식문화인 것이다.
[1] 최초의 칵테일에 대한 기록은 1803, 04, 28 Farmer’s Cabinet 이라는 지면에 등장하지만, 칵테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자세히 나와있지 않다.
[2] “A stimulating liquor, composed of spirits of any kind, sugar, water, and bitters.’
[3] How to Mix Drinks: or The Bon-Vivant’s Companion, By Jerry Tho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