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튜닝업체 브라부스에서 팝 아트 거장 앤디 워홀의 컬렉션에 손을 뻗었다. 1988년 앤디 워홀의 ‘cars’ 컬렉션 작품 중 하나인 메르세데스-벤츠 300SL 걸윙의 튜닝카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조금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우선 차량 설명부터 간략히 해보자. 브라부스가 선보인 메르세데스-벤츠 300SL 걸윙은 브라부스의 6스타 리스토레이션(6-Star Restoration) 프로그램을 거친 모델이다. 특별한 업그레이드는 없으며, 아이코닉한 3.0리터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 215hp의 출력, 209km/h의 최고속도를 선사한다. 나사 하나까지 모든 부품을 교체 및 정비하여 공장에서 막 생산한 것과 다름없는 컨디션을 갖춘 동시에 원 모델의 스펙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실내 리스토레이션 작업은 브라부스 새들러리(Brabus Saddlery)가 담당했으며, 가죽과 패브릭 요소들 및 크롬 악센트 등 대부분의 요소를 복원하여 신차급 오리지널 모델의 인테리어를 재현하였다. 실외와 실내 모두 오리지널 모델과 동일한 컬러로 새롭게 도장했다. 20일부터 26일(현지 시각)까지 독일 슈트트가르트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에 앤디 워홀의 아트워크와 함께 전시되며, 별도의 판매 계획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 이 이상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차와 관련된 스토리는 관점에 따라 상당히 복잡하게 해석될 수도 있다. 앤디 워홀이라는 팝 아트 거장과 세계 최고의 튜닝 메이커의 만남이 만들어낸 이야기, 알아 두면 쓸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뭣이 진짜여?
‘우리는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 수 있을까?’ 까마득한 옛날 플라톤 선생이 살던 시절부터 인류가 던져온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현대사회에 이런 질문에 영민하게 답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다.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여러 장 찍어낸 이미지나 똑같은 캠벨 수프 캔 이미지가 반복된 작품은 한 번쯤 봤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딴 게 무슨 예술이냐?’고 욕을 내뱉지만, 다른 이들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예컨대 이런 식의 해석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대량생산과 복제 기술이 일반화되면서 더 이상 원본(original) 혹은 진짜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장, 대량생산, 복제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무언가를 만들 때 비슷한 물건은 만들 수 있을지라도 아예 똑같은 물건을 만들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원본이었고, 그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대량생산이 일반화된 지금은 뭐가 원본이고 뭐가 복제품인지 알 수 없다.
이는 TV나 광고를 통해 등장하는 유명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들은 실제로는 유일무이한 인격이자 존재지만, 대중이 접하는 유명인들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처럼 대량 생산되고 대량 소비되는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세상만사가 원본은 없고 복제품만 존재하며,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워홀이 이어 붙여 놓은 여러 장의 마릴린 먼로 사진은 원본이 부재한, 복제품의 복제품만 존재하는 실재의 대체물이다.
워홀의 작품은 이처럼 ‘실재’에 대한 천착보다 이미지와 복제품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세태를 풍자한 것이라는 게 옹호론자들의 주장 중 하나이다. 정작 워홀 본인은 딱히 자기 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속 시원한 말을 한 적이 없어 진짜 그가 사회적 정의감에 불타는 투사적 인물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의미야 부여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아우라’를 상실한 현대 예술, 의미부여의 미학
이 의미부여라는 게 또 워홀을 논하는 데 중요하다. 워홀의 작품을 두고 어떤 이들은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말을 빌려 보편적 미의 추구, 자연과 질서에 내포된 본질적인 미의 재현 등 오리지널리티에 기반한 예술 작품의 ‘일회적 현존성’, 즉 ‘아우라’를 상실한 조야한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벤야민 본인은 아우라를 상실한 예술이 예중의 대중화로 이어졌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긴 했다).
이런 주장의 저변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그리고 선험적(先驗的)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심미적 기준이 있다는 것인데, 복제와 모방에 기반한 팝 아트 ‘따위’는 이러한 예술의 본질적 목표를 배반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지점에서의 문제도 제기되는데, 앤디 워홀을 비롯한 팝 아트 혹은 일부 현대 예술 부류들은 ‘보는 것=감상’이라는 공식을 깨버렸다는 것이다. 예술가의 독창적 표현이나 인간 한계를 넘어선 열정과 노력의 산물보다는ㅡ원본에 대한 집착은 대량생산과 복제의 시대에 무의미하기 때문에ㅡ작품의 컨셉과 의미부여, 해석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 예술 특성에 대한 문제 제기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작품을 보고 경외심을 표현하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현대예술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앤디 워홀의 작품이든, 마르셀 뒤샹의 <샘>(=변기)이든, 데미안 허스트의 박제된 상어든 시각적인 투시만으로는 예술품의 감상이 성립하지 않는다. 전혀 다른 감상의 기준이 필요하다.
즉, 작품의 컨셉과 이면에 숨은 의미에 대한 사전적인 ‘지식’이 없다면, 감상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물론 고전적인 작품들도 지식에 따른 감상의 결은 달라질 수 있지만, 현대 예술에서는 그 수준의 간극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비주의에 휩싸인 예술가, 현학적 수사로 무장한 비평가, 그들에 환호하는 ‘예잘알’과 ‘현대 예술은 똥이다’라며 분노하는 ‘예알못’의 경계선이 뚜렷해진다.
이쯤 되면 혼란스러워진다. 예술 작품이 독립적으로 생산하는 미적 가치보다 예술을 예술이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사업가, 프로모터, 비평가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가 된다(앤디 워홀 본인이 ‘예술은 비즈니스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기도 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고민이 걷잡을 수 없이 꼬이게 된다.
복제품의 복제품의 복제품, 시뮬라크르의 전복?
브라부스에서 내놓은 이번 300SL 걸윙은 앤디 워홀이 300SL을 복제한 것을 다시 복제한 차량이다. 실재하는 복제품-가상의 복제품-실재하는 복제품이라는 독특한 사이클을 만들어냈는데, 앞서 언급했던 예술과 관련된 여러 시각 그리고 자동차 역사에 함의하는 바가 적지 않다(물론 영화 <007> 시리즈의 본드카가 영화 속 스펙을 갖추고 현실 자동차로 나온 사례 등 브라부스 300SL이 유일무이한 사례는 아니다).
대강의 스토리는 이러하다. 1986년 다이믈러-벤츠(Diamler-Benz)에서 브랜드의 자동차 역사를 보여줄 아트워크 시리즈 제작을 위해 앤디 워홀을 찾았다. 워홀은 이 의뢰를 수락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 잘 알려진 워홀의 ‘카(Cars)’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에 속한 300SL 걸윙을 브라부스가 다시 끄집어 낸것인데, 심지어 워홀이 그림을 그리는 데 참고했던 차량이 섀시 넘버(198.040-5500629)와 번호판(EI-DR1)을 가진 차량임을 수소문 끝에 찾아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이 차량을 직접 섭외해 리스토레이션 하는 과정에는 무려 4,500인시(人時)가 투자될 정도로 공을 +기울였는데, 그만큼 워홀의 원본, 더 정확히는 복제품(공장에서 찍어낸 실제 300SL)의 복제품(워홀의 아트워크)을 진심을 담아 복제했다는 것이다.
복제품의 복제품의 복제품이 아우라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좋을 지경
앞서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를 언급했는데, 이번 부라부스 300SL은 오히려 복제품의 복제품의 복제품이 아우라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이쯤에서 ‘시뮬라크르’라는 말을 꺼내 봐야 할 것 같은데, 플라톤 선생께서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선생께서는 우리가 파악하는 세계는 원형(진리, 진실)인 이데아의 복제물에 불과하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세계를 다시 시나 그림 등으로 묘사한 것, 즉 복제품의 복제품을 시뮬라크르라고 정의하였다.
플라톤은 시뮬라크르와 같이 복제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현실 파악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는데, 현대에 시뮬라크르 개념을 다시 꺼내든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작금은 시뮬라크르로 점철된 세상으로서, 이데아와 본질이 모두 가려져 실재의 가치를 이미지가 지배하는 전치 현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명품을 사는 행위는 명품 본연의 가치보다는 명품의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반면 또 다른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조금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핵심만 얘기하자면, 시뮬라크르를 단순한 복제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실재가 어떠한지, 무엇인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미지가 범람하는 지금 이 시대의 시뮬라크르는 원본과 무관하게 자율성을 가지고 스스로 창조와 차이를 만들어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맥락에서, 브라부스가 이번에 선보인 300SL은 아우라의 종말을 개탄했던 벤야민(물론 그는 대량생산과 복제로 인해 예술이 대중화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긴 했다)의 주장과 달리 시뮬라크르 자체가 새로운 아우라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는 사례로 볼 수도 있겠다. 가히 고전적인 시뮬라크르론의 전복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팝 아트를 튜닝하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브라부스 300SL은 이런 시뮬라크르론, 복제품의 복제품에 경배하는 팝 아트와 현대 예술가들에 대한 반란일 수도 있다. 상기한 복원 과정을 다시 되뇌어 보면 얘기가 다시 꼬일 대로 꼬인다.
이미 공장에서 찍어낸 300SL 복제품은 워홀에 의해 또 다른 복제품,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이번 브라부스는 이 이미지를 거꾸로 물질화했고, 그것도 모자라 몰개성화되었던 300SL 중 굳이 섀시 넘버 198.040-5500629, 번호판(EI-DR1)의 차량을 찾아 그것에 유일성을 부여하게 됐다고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복제품의 복제품의 복제품인가, 아니면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원본으로의 회귀인가. 이 질문에 필자가 답할 능력은 없다(답할 수 있었다면 노벨상쯤은 거뜬히 탔을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이고, 지금까지 다뤄왔던 예술과 철학의 논쟁들도 인류 태고부터 지금까지 답이 안 나오고 있는 문제이다.
어쩌면 굳이 답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는 문제이다. 실재의 숭고함과 시뮬라크르의 가벼운 편재성은 상보적인 관계에 놓인 이항(異項)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이처럼 멋진 차량이 시간을 거슬러 다시 원래 모습 그대로 우리와 같은 땅에 발을 붙이게 됐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