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기 선수나 영화 속 무림 고수를 보고 거울 앞에서 ‘취취’ 소리를 내며 ‘똥폼’을 잡아본 경험, 남자라면 다들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맨주먹 하나로 적들과 정정당당하게 싸워 현란하게 제압하는 것은 수많은 남자의 타고난 본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의외로 요즘 가장 인기 있는 게임 장르인 3인칭 액션 RPG 중 ‘맨주먹 전투’를 기반으로 하는 타이틀은 찾기 쉽지 않다. 도검류를 비롯한 근접 무기, 총, 마법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스펙터클을 맨손 격투만으로는 연출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
하지만, 잘 만든 맨손 전투는 그 투박함에서 나오는 고유의 낭만이 있다. 연장은 X아치의 전유물이고 원거리 딜은 졸렬함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상남자 게이머들을 위해 준비했다. 게임 속 주인공에게 빙의해 17대 1의 로망을 실현해볼 수 있는 ‘맨주먹 전투 액션 RPG 게임’ 6개를 소개해 본다.
1. 슬리핑 독스
2012 | 유나이티드 프론트 게임즈 | PC(Steam), PS3, PS4, XBO
남자라면 주먹, 주먹이라면 누아르, 누아르 하면 홍콩이다. 이 모든 요소를 갖춘 일명 ‘홍콩판 GTA’가 바로 이 게임. 복수를 위해 범죄조직에 잠입한 홍콩 경찰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오픈월드 액션 게임을 찾아보기 힘든 와중에 매우 짜임새 있게 만든 게임이라 반드시 해보기를 추천한다. 전투는 페이스가 빠르거나 화려하지는 않은데, 다양한 쿵푸 기술 세트를 해금해 가는 맛이 있고, 긴 연계는 안 되지만 나름 괜찮은 콤보들도 존재한다. 후반부에는 무에타이, MMA, 취권 같은 다양한 무술도 배울 수 있어 전투가 지루하다고 느낄 틈이 거의 없다.
무엇보다 전투의 압권은 주변 사물을 이용한 공격인데, 상대를 쓰레기통이나 공중전화 부스에 처박기도 하고 심지어 환풍기나 절단기에 상대를 갈아버리는(…) 고어한 연출까지 보여준다. 일부 미션에서는 총격전도 가능한데, 의외로 총격전도 박진감 넘치게 잘 만들었다. 이밖에 볼륨이 적긴 해도 서브 퀘스트도 재미있게 만들었고, 배트카 비슷한 최첨단 전투용 차량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탈 거리, 그리고 맛깔나게 살린 홍콩의 분위기도 재미를 더해준다. 홍콩 누아르 특유의 클리셰 범벅인 스토리가 아쉽긴 하지만, 또 뻔한 맛에 보는 게 홍콩 누아르 아니겠는가. 플레이타임이 짧다는 점만 제외하면 정말 수작인 게임.
2. 매드맥스
2015 | 아발란체 스튜디오 그룹 | PC(Steam), PS4, XBO
영화 <매드맥스>와 세계관은 공유하지만, 멜 깁슨이나 톰 하디의 <매드맥스>와는 무관한 게임. 다만 영화 <매드맥스>에서 느낄 수 있었던 황폐화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의 정취만은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게임이다. 아울러 쉬우면서도 시원시원한 액션이 일품인 게임. 전투는 맨손 격투를 기본으로 하며, 도검류나 총기류 같은 무기와 조합도 가능하다. <배트맨 아캄> 시리즈, <섀도우 오브 모르도르>와 유사한 전투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데, 맨손 격투 특유의 투박하고 단순 무식한 맛과 압도적인 타격감으로 색다른 느낌을 연출한다.
8기통 엔진의 거친 배기음을 들으며 사막을 가로지르는 자동차 운전이 가능하고, 훌륭한 배경음악, 영화보다 훌륭한 연출, 괜찮은 그래픽까지 가능해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는 다 버무려놨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다수의 오픈월드 게임이 가진 문제라 할 수 있는 후반으로 갈수록 반복적인 퀘스트와 파밍, 다양한 스킬이 부재한 전투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3. 리멤버 미
2013 | 돈노드 엔터인먼트 | PC(Steam), PS3, XBOX360
발매된 지 꽤 오래된 게임이지만, 지금도 충분히 해볼 만한 게임이다. 사실 <리멤버 미>는 오늘 소개하는 게임 중 유일하게 전투 시스템 관련 혹평이 많은 게임인데, 이는 전투 시스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홍보의 문제에서 비롯된 감이 있다. 전투는 <배트맨 아캄> 시리즈의 프리플로우와 유사한 전투 방식이다. 그런데 배급사에서 ‘나만의 콤보를 만들 수 있다’는 식으로 무궁무진한 콤보 조합이 가능할 것처럼 홍보를 해서 신나게 욕을 먹었다.
실상은 이미 정해져 있는 키 조합의 콤보를 해금하고 여기에 자신이 원하는 효과(데미지 상승, 쿨 타임 감소, 힐 효과 등)를 부여하는 단순한 방식이다. 하지만 무한한 자유도의 콤보를 기대하지만 않는다면 꽤 재밌게 할 수 있는 게임이다. 시대의 한계가 있어 프레임이 끊기고 동작이 딱딱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은 있지만, 그래도 공격 모션 자체가 화려하고 타이밍에 맞춰 리듬감 있게 키를 눌러 콤보를 완성하는 쾌감이 있다. 미래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분위기와 잘 짜인 스토리도 게임의 묘미.
4. ‘용과 같이’ 시리즈
2005~ | SEGA | PC(Steam), PS4, PS5, XBO, XSX, Switch
세가의 대표적인 장수 게임 <용과 같이> 시리즈. 본편에 외전, 리메이크 작품까지 합치면 그 수가 20편에 달한다. 초기 시리즈는 지금 플레이하기도 어렵고 재미를 느끼기도 어렵겠지만, 4편 이후(리마스터 기준)의 작품들은 지금도 충분히 재밌게 즐길 만하다. 서양권 제목 ‘Yakuza’에서 알 수 있듯이 야쿠자를 소재로 한 누아르풍의 게임이며, B급 감성과 메인 퀘스트 외 다양한 즐길 거리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턴제 전투 방식을 채택한 7편을 제외하면 최근 시리즈는 모두 3인칭 실시간 액션 전투 시스템을 채택했는데, 전투 모션이 그다지 매끄럽거나 멋진 편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을 아기자기하고 호쾌한 전투 요소들로 충분히 만회한다. <용과 같이 제로> 및 <용과 같이 극> 같은 경우 4개의 전투 스타일을 바꿔 사용할 수 있는데, 각각의 개성이 뚜렷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파워 위주의 단타 공격부터 스피드를 겸한 연타 공격까지 플레이어의 취향에 맞는 전투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재미가 있다.
다양한 무기도 제공되며, 화끈한 특수기 연출을 보고 있으면 전율이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용과 같이 제로>의 경우 적을 때릴 때마다 지폐가 흩날리는 효과가 나오는데, 이 때문인지 타격감이 더 차지게 느껴진다. 전투 외에도 다양한 미니 게임과 성인들을 위한 콘텐츠, 영화를 방불케 하는 스토리, 오픈월드 요소까지 함께해 재미를 배가해준다.
5. 시푸
2022 | 슬로클랩 | PC(Epic Games), PS4, PS5, Switch
<시푸>는 엄밀히 말하면 RPG 장르는 아니다. 간혹 소울라이크나 로그라이크로 분류하기도 하는 이도 있긴 한데, 스킬 잠금 해제를 제외하면 소위 말하는 스탯을 찍어 캐릭터를 강화하는 등의 육성 요소가 부재한다. 하지만 다소 독특한 시스템과 개성 있는 전투 시스템으로 육성의 재미를 대신한다.
<시푸>는 사망 시 마법이 깃든 부적의 힘으로 부활을 하는데, 부활할 때마다 나이(데스카운트)가 드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들면 외형적인 변화와 함께 체력이 약해지는 반면 공격력은 상승한다. 이처럼 패널티와 특전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사망하는 것이 플레이 스타일이나 취향에 따라 꼭 나쁘게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주요 강적들을 무찌르면 데스카운트가 줄어들어 완급 조절을 하며 플레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전투가 소울라이크 게임 못지않게 어려운 편. 적들의 공격 패턴이 예측하기 어렵고 패링 타이밍이 매우 야박하다. 거기다 수시로 들어오는 변칙적인 엇박자 공격까지. 1트만에 강한 적들을 공략하기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쿵푸 기반의 화려하고 거친 액션, 테이크다운 같은 격투기적 요소, 다양한 무기 공격, <세키로>의 체간 시스템을 떠올리게 하는 가드와 패링, 차진 타격감, 현란한 연출의 포커스 공격, 단서를 직접 찾아가며 스토리를 이해하는 등의 재미가 쏠쏠하다. 하드코어 쿵푸의 진가를 느끼고 싶다면 바로 구매해보자.
6.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 스톰
1997 | TG 엔터테인먼트 | PC
이명진 작가의 원작 만화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이하 <어쩐지 저녁>)을 기반으로 한 동명의 게임. <어쩐지 저녁>도 3인칭 액션 RPG가 아닌 벨트스크롤 액션 게임이다. 하지만, RPG적인 요소도 다분히 가지고 있고 매력적인 요소들이 많아 리스트에 포함했다. <어쩐지 저녁>은 적을 물리치며 얻은 경험치로 체력, 파워, 스피드 등을 성장시킬 수 있고, 숨겨진 커맨드를 개방하는 육성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성장에 따라 체감할 수 있는 변화가 큰 편이라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며 더 큰 몰입감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이 게임의 압권은 극강의 타격감과 콤보 시스템. 1997년 게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세련된 타격 사운드 및 이펙트를 선보이며, 대전 격투 시스템을 방불케 할 커맨드 시스템과 이를 기반으로 한 공중 콤보, 벽 콤보 등의 신선한 시스템을 잘 구축해 놨다. 커맨드 가지 수도 다양하고 기술 간 연계성도 좋아 나만의 콤보를 만들기에도 제격.
<어쩐지 저녁>의 후속작으로 출시된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2: 스톰>은 1편에 비해 아쉬운 평가를 받긴 했지만, 개성 뚜렷한 캐릭터 3명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선보이는가 하면 네트워크 플레이까지 지원하는 등의 변화를 시도했다. 1, 2편 모두 정식 구매는 어렵지만, 알음알음 구해 플레이할 수 있으니, 극락으로 가는 타격감과 콤보에 취하고 싶다면 꼭 한번 해보자. 참고로 이명진 작가의 원작 만화도 강력히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