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블스톤으로 가득한 유럽이나 좁고 거친 우리나라의 도로 사정과 달리 미국은 쭉 뻗은 도로를 수백 킬로미터씩 직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배경 탓에 아메리칸 크루저는 주로 미국에서만 소비되어왔다. 양발을 앞으로 뻗는 프런트 스텝과 낮은 시트고는 장거리 주행에서도 안락함을 선사하고, 엔진의 거친 진동과 고동감은 장시간 운전의 지루함을 날리는 재미 요소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크루저는 이처럼 미국의 모터사이클 문화를 대변해왔다. 할리데이비슨(Harley Davidson)같은 토종 미국 브랜드가 득세한 건 당연한 수순이다. 물론 일본의 4대 브랜드도 ‘타도 할리’를 외치며 야심차게 북미 대륙에 진출했지만, 이들은 연거푸 고배를 마시고는 후퇴했다. 쉐도우, 드랙스타, 인트루더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일제 크루저가 모두 생산을 중단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미국 시장의 분위기도 썩 좋지는 않다. 장르 자체의 흥행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게 그 이유다. 감성으로만 타기에는 너무 무겁고 출력도 느린데, 차체와 배기량은 쓸데없이 커 효율이 영 좋지 않다. 할리데이비슨은 대규모 인원 감축에 이어 생산 공장을 유럽으로 옮기려는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마찰을 빚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은 미국이 기후협약도 탈퇴해 유로4 규제와 무관한 상황에서 벌어진 결과다.
그렇다면 크루저 모터사이클의 시대는 이제 종말을 고하는 걸까. 적어도 아직은 아니다. 전망은 여전히 어둡지만, 북미 바깥의 브랜드들은 좁고 코너가 많은 도심에서도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스포츠 어반 크루저로 방향을 선회했다. 더이상 어르신들의 과시용 애마가 아닌, 백팩을 멘 대학생이 스로틀을 감고 등교길에 나서도 어색하지 않도록 다듬어내는 중이다.
크루저를 타보고는 싶은데, 할리데이비슨은 너무 부담스러웠던 이들이라면 아래의 모터사이클을 주목해보자.
혼다 레벨 300/500
혼다가 1985년에 출시했던 CMX250은 ‘레벨(Rebel)’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작은 차체에 234cc라는 소박한 배기량의 엔진을 달고 있었지만, ‘가격’이란 무기로 북미 시장을 공략했다. 덕분에 커스텀 베이스로 젊은 층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모터사이클이다.
혼다가 북미 젊은이들에게 많은 추억을 선사한 레벨을 부활시킨 건 지난 2016년. 이름은 그대로 유지한 채, 현대적인 감각에 발맞춰 디자인을 전면 리뉴얼했다. 라인업도 병렬 2기통 471cc 엔진의 레벨500과 단기통 286cc 엔진의 레벨300 2종으로 출시했다.
차급을 상회하는 제법 풍성한 볼륨을 갖고 있지만, 짧은 휠베이스와 단정한 미들 스텝 때문에 운동성능은 제법 좋다. 크루저치고는 코너에서도 꽤 깊숙하게 눕힐 수도 있다. 사실 이들은 혼다 CBR500R/300R과 엔진을 공유하는 모델로, 소위 ‘사골’이라 불릴 정도로 내구성이 입증된 엔진을 쓴다. 다만 세팅은 살짝 디튠을 거쳐 출력을 모두 저RPM 영역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레벨은 클래식 크루저의 확실한 DNA도 갖추고 있다. 하단에 위치시킨 키박스와 핸들락 구성에 원형 디자인으로 통일성을 준 헤드라이트와 계기반 같은 요소는 혼다의 기획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 꽤 세련된 디자인 덕분에 출퇴근용 데일리 모터사이클이나 패션 바이크로 손색이 없는 스트리트 어반 크루저다. 300cc 모델 기준으로 100~120km/h 정도의 정속 크루징도 가능해 교외 투어링에서도 크게 부족함은 없다.
가와사키 발칸 650S
발칸(Vulcan)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와사키의 간판 크루저 시리즈다. 지금은 대부분의 모델이 단종됐지만, 가와사키는 발칸 650S를 스포츠 크루저 모델로 새롭게 운용하고 있다. 비치바 스타일로 포지션을 조정한 넓은 핸들바와 사각 사이드미러는 올드스쿨 크루저의 디자인 요소. 스텝은 3단으로 조절이 가능해 전형적인 크루저의 포워드 스텝도 연출할 수 있다.
하지만 퓨얼 탱크의 형상은 보다 매끄럽게 가다듬었고, 가와사키 특유의 뒤로 솟은 (다소 촌스러웠던) 텐덤 시트 실루엣도 훨씬 감각적으로 디자인됐다. 닌자 650의 수냉 2기통 649cc 엔진과 섀시를 공유하는 만큼 퍼포먼스도 닮아있다. 2018년 모델 기준으로 최대출력 61마력에 최대토크 63Nm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닌자 650과 비교하면 각각 7마력, 2.7Nm 정도만 낮은 미미한 수치다. 레드존도 9,500RPM부터다.
물론 가장 강한 힘이 발휘되는 영역은 6,000RPM 구간으로 중속 주행에 포커스를 맞추긴 했다. 하지만 가와사키 특유의 거친 엔진 질감과 함께 스로틀을 적극적으로 감아도 힘겨운 느낌은 거의 없다. 실제로 유튜브 등지에서는 ‘가장 빠른 크루저 모터사이클 TOP 15’같은 영상 리스트에 항상 이 모델이 끼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야마하 볼트 950
유로 규제와 환경 문제로 일본의 4대 브랜드는 더이상의 공랭식 엔진 개발을 포기했다. 야마하만 빼고. 다른 일본 브랜드가 대부분 라디에이터를 단 수냉식 엔진의 크루저를 만들 때에도 야마하만은 드랙스타 시리즈를 통해 고전적인 공랭식 엔진을 고집해왔다. 야마하가 공랭 엔진의 노하우를 체득하게 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볼트 950의 베이스는 바로 야마하의 대표적인 크루저 모델, 드랙스타 시리즈의 950 모델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모델 중에서는 배기량도 942cc로 가장 높다. 촘촘하게 자리한 냉각핀의 엔진 디자인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즐겁게 만들고, 공랭식 V-트윈 엔진 특유의 고동감과 둔탁한 배기 사운드는 크루저의 기본 공식을 그대로 계승한다.
하지만 차량의 속성은 고전적인 크루저와는 다르다. 차체 사이즈는 대단히 콤팩트하며, 주행 감각 역시 토크에 비중을 둔 네이키드 모터사이클에 가깝다. 엔진의 회전 질감은 예상외로 부드럽고, 서스펜션이나 브레이킹 또한 우수한 편이다. 그저 실루엣이 닮았다고 할리데이비슨의 스포스터와 비교하기 곤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로 스트리트 크루저인 R-스펙 버전과 함께 카페레이서(C-스펙), 스크램블러(SCR 950) 모델도 있으니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KR모터스 아퀼라 125
아퀼라 125라는 네이밍이 어색하다면 미라쥬 125/250이라는 이름을 떠올려보자. 우리에게는 효성이라는 브랜드로 더 익숙한, 운전면허시험장의 2종 소형 시험용 모터사이클이 바로 아퀼라의 전신이다. 대부분 상용으로 쓰이던 구닥다리 국산 오토바이가 이렇게 잘 빠진 콤팩트 바버 크루저로 다시 태어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둥그스럼한 퓨얼 탱크와 소위 ‘번데기’ 스타일로 스티치를 넣은 1인용 시트, 그 뒤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리어 펜더는 꽤 그럴듯한 곡선을 그려낸다. 미라쥬의 대포 같은 크롬 머플러도 아퀼라에서는 보다 콤팩트한 사이즈의 블랙 컬러로 개선됐다. 포크부츠와 동그란 헤드라이트로 마침표를 찍는 디자인은 국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보다 세련된 이미지와 콤팩트한 사이즈를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은 엔진에 있다. 물론 아퀼라도 미라쥬처럼 (전 세계를 뒤져봐도 엔트리 급에서는 전무후무한) 125cc V-트윈 2기통 엔진의 계보를 잇는다. 하지만 엔진 협각이 75°에서 60°로 더 좁아졌다. 덕분에 고동감을 느끼는 재미는 커지고, 차체는 훨씬 더 작게 만들어 운동성능을 개선했다.
물론 KR 모터스의 고질적인 문제인 전기 이슈는 여전히 남아있다. 각 파츠마다 원가 절감의 흔적이 보이며, ABS도 없는데 판매가가 400만 원 이상으로 비싸게 책정된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최근 생산 물량에서는 기어 중립이나 냉각수 쪽에서 터지던 결함이 해결됐다고 하니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봐도 좋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