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볼든을 운영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아마도 ‘무슨 시계를 사면 좋을까요’일 것이다. 주로 시계 입문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이 질문은 대부분 복잡한 시계 용어나 기능 그리고 방대한 정보에 압도되며 생기는 혼란에서 비롯되곤 한다. 구매 목적도 다양한데, 특별한 이벤트를 기념하기 위한 자축의 의미로 나에게 주는 선물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정말 필요에 의해 구매를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요즘같이 핸드폰이 시계 역할을 대신해 주고 있는 시대에 참 의미 없는 고민일 수도 있다. 보통 교과서적으로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질문을 하게 되는데, 가격도 착해야 하고, 튼튼하고, 멋도 있어야 하며, 명품의 느낌도 살짝 내줘야 한다는 이 복잡한 요구사항을 만족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임볼든을 자주 찾는 분들은 이미 알겠지만 완벽한 시계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디자인, 성능, 용도, 개인의 취향 등 너무도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하는 난제라고 할 수 있다.
형의 그늘에 가려져 온
블랙베이 크로노, 그 인고의 시간
그렇다고 답하기 꼭 불가능한 질문만은 아니다. 많은 경우 버릇처럼 내뱉는 나의 추천은 튜더의 블랙베이 58이다. 가격도 어느 정도 합리적이면서 핸섬한 디자인은 물론 다이버 워치의 실용성까지 갖춘 팔방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틸을 비롯한 다양한 재질과 호불호를 크게 타지 않는 스타일에 스트랩 옵션까지 많아서 추천받는 사람의 마음에 드는 버전을 찾기도 쉬운 편이다.
또한, 다이버 워치의 대부격인 롤렉스 서브마리너만큼 가격이 비싸지도 않고 서브마리너가 아니라는 묘한 장점도 있다. 요즘 서브마리너는 롤렉스 브랜드와 다이버 워치의 대표주자 격으로 간주되면서 시계 마니아부터 입문자까지 많은 이들이 열띤 구매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때문에 그 희소성이 격하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일종의 클리셰처럼 되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반면 블랙베이 58은 스타일과 기본기에 충실하면서 브랜드에 대한 환상과 거품을 걷어내 버렸다는 점이 오히려 나에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블랙베이 58의 완벽에 가까운 평판과는 대조적으로 블랙베이 크로노는 그 사정이 정반대이다. 아직까지도 타게팅한 소비자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디자인도 뭔가 어설프다는 느낌이 강하다. 한마디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느낌이 드는 시계다. 더 인지도도 높고 인기도 많은 사촌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마주도 아니면서 다른 시계의 짝퉁 느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석연한 일이다.
시계 커뮤니티에서 가장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이처럼 시계의 아이덴티티가 애매해지는 경우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크로노그래프 스타일에 기본기도 충실한 시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지 못한 블랙베이 크로노는 튜더에게 골칫덩어리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팬더&리버스 팬더 다이얼,
반전을 노리는 ‘핸섬’한 디자인
이러한 부족함을 극복하고 2021년에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튜더는 눈에 띄게 달라진 블랙베이 크로노를 선보였다.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변화는 크로노그래프를 쉽게 읽기 위해서는 필수인 팬더 그리고 리버스 팬더 다이얼이 아닐까 싶다. 이는 기능적으로 읽기 쉬운 디자인일 뿐만 아니라 심심하기만 했던 블랙베이 크로노에게 개성을 입혀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물론 사촌 형이 이미 닦아놓은 길이기는 하지만 큰형이 하면 동생도 따라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게다가 따라 하기만 했다고 보기에는 자신만의 개성을 충분히 과시하면서 고유한 스타일로 업데이트됐으니 이 정도는 용서해 줘도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서브 다이얼 전체를 한 색상으로 처리한 대범함은 블랙베이 크로노의 개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크로노그래프 초침 끝과 붉은색 텍스트도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 다이얼에 매력을 더한다. 사촌 형보다 하나쯤은 더 잘난 것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6시 방향에 멀쑥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날짜 표시창은 너무나도 반가운 컴플리케이션이다.
핸섬하고 직관적인 다이얼을 감싸는 41mm 케이스는 양극 처리된 블랙 알루미늄 베젤로 마무리되어 있다. 베젤의 두께와 비율은 크로노그래프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블랙베이 크로노의 베젤 비율은 완벽에 가깝다. 이에 반해서 베젤과 다이얼 사이의 여백은 눈에 거슬릴 만큼 이상하다. 크리스탈 때문에 왜곡될 수 있는 정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 부분을 비워놓은 것 같은데, 유독 다른 시계들에 비해 이 빈자리가 눈에 띈다. 물론 시계의 완성도를 떨어뜨릴 만큼 큰 단점은 아니지만, 디테일에 목숨 거는 시계 마니아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법한 부분이다.
블랙베이 크로노의 디자인은 여러 가지 스타일과 상황에 맞추기 쉬운 편이다. 물론 드레스 워치가 꼭 필요한 상황만 아니라면, 이라는 전제 조건은 따를 듯하다. 지금과 같이 무더운 여름, 간단한 티셔츠와 반바지에 코디해도 무난하고 비즈니스 캐주얼 느낌에도 잘 어울린다. 시계에 ‘핸섬’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으나, 블랙베이 크로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튜더의 미래 엿보기,
MT5813 무브먼트
이 시계의 가장 특이하고 의아한 스펙은 MT5813 무브먼트이지 않을까 싶다. 롤렉스의 무브먼트를 쉽게 구할 수도 있었을테고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었겠지만, 블랙 베이 크로노에 사용된 무브먼트는 브라이틀링과 공동으로 개발한 무브먼트이다. 뜬금없는 파트너십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튜더의 행보는 자사의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현재로서는 아마 가장 합리적인 전략적 선택이 아닐까 한다.
브라이틀링의 B01 구조를 기반으로 스타트-스톱 스위치를 위한 컬럼 휠과 버티컬 클러치를 탑재한 이 무브먼트는 이 가격대의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로서는 아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생산되고 있는 비슷한 가격대의 무브먼트에서는 최고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 인하우스 무브먼트 개발에 더 힘을 쏟고 있는 만큼 향후 튜더 무브먼트에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듯하다.
둔탁한 첫인상,
그렇지 않은 착용감
튜더 블랙 베이 크로노를 손목에 차는 순간 둔탁한 첫인상과 달리 편안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손목에 감겼다. 안정감을 준다고 해야 할까. 깔끔한 디자인 덕분인지 41mm의 케이스 크기가 착용자의 손목 굵기와 상관없이 조화롭게 얹힌다는 느낌을 준다. 얇은 손목에서는 케이스가 너무 커 보이지 않게, 두꺼운 손목 위에는 답답하지 않은 느낌을 주는 폭넓은 소화력을 갖추었다.
메탈 스트랩의 적절한 무게 배분 덕분에 손목과 시계가 따로 논다는 느낌도 거의 없었다. 몇몇 할리우드 액션 스타들이 선호하는 이탈리아의 모 시계와는 다르게, 얇은 축에 속하는 필자의 손목에도 크게 거슬리는 일이 없었다. 다만 전작과 비교했을 때 꽤 얇아진 14.4mm의 케이스 두께에도 불구하고, 착용감이나 시각적 측면에서 여전히 두껍다는 느낌은 버릴 수 없었다. 특히 밋밋한 사이드 디자인은 수치상 더 두꺼운 시계보다도 블랙베이 크로노가 굵어 보이는 데에 한몫한다. 예를 들어, 오메가 스피드 마스터 같은 경우 두께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스텝 케이스 디자인 덕분에 시각적으로 훨씬 얇게 다가온다.
다양한 선택지들,
남아있는 아쉬움
의외로 ‘시잘알’들은 물론 시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블랙베이 크로노에 대해서는 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클랙식하고 심플하면서 조잡하지 않은 디자인 그리고 팬더 다이얼에 큰 점수를 준 듯했다. 무엇보다 이제 형님의 그늘에서 조금은 벗어난 느낌이다. 남다른 시계 취향을 가진 지인과 대화를 나눴을 때도 롤렉스에 대한 얘기보다는 튜더 자체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블랙베이 크로노는 팬더, 리버스 팬더 그리고 옐로우 골드가 여기저기 흩뿌려진 버전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판매된다. 골드의 경우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만 튜더가 자랑스럽게 밀고 있는 버전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튜더가 제공하는 스트랩 종류는 다양한 편인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제공된 시계는 스틸 스트랩만 제공되어서 다른 스트랩은 어떤 느낌인지 경험해 보지 못했다. 많은 시계 애호가들이 여러 스트랩을 취향, 상황, 기분에 따라 바꿔가며 착용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크로노그래프는 스틸이 제일 무난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스틸 스트랩의 리벳이었다. 물론 튜더를 대변하는 하나의 디자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어져 버린 이 리벳을 단순히 디자인적인 부분으로만 유지한다는 점은 와닿지 않았다. 특히 깔끔하면서 정갈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블랙베이 크로노의 경우는 더욱 이상하기만 했다. 때가 탔을 때 관리해야 하는 부품이 하나 더 생기는 점도 불편하게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디테일을 가지고 불평할 정도라면 언급할 단점이 많이 없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단점이 오히려 호재가 될까,
튜더가 안고 가야 할 숙명
오히려 이러한 특징이 블랙베이 크로노의 핵심일 수도 있다. 이 시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단점은 매우 적다. 오히려 더 오랜 기간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를 잡아온 시계들과 비교했을 때에만 이런 단점들이 보인다. 튜더에게는 어쩌면 이러한 부분이 양날의 검일지도 모르겠다. 더 비싸고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시계들과 견주어도 크게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제품을 만들어냈지만, 이 시계는, 그리고 어쩌면 튜더라는 브랜드는 항상 다른 브랜드의 시계들과 끊임없는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을지 모른다.
블랙베이 크로노 하나만 놓고 본다면 스타일리쉬하고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훌륭한 시계임이 분명하다. 단, 롤렉스의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져 불공평한 비교 대상이 되어버리고 상대적으로 뒤처진 듯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새로운 팬더 다이얼로 무장한 블랙베이 크로노는 자체적인 팬덤을 형성하고 아이덴티티를 확고하게 잡아가는데 한 걸음 더 가까워졌음이 분명하다.
※본 리뷰는 튜더 본사의 협찬하에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