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망령이 시계 업계를 배회하고 있는 듯하다. 어딘가 익숙한 모습을 한 이 망령은 허무맹랑한 음모론 같이 보이기도 하며, 어떤 면에서는 꽤 그럴듯한 가설처럼 들리기도 한다. 1970년대 전 세계 시계 산업의 지각변동을 불러일으킨 ‘쿼츠 파동’이 부쩍 자주 회자 되는 요즘이다. 반세기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제2의’라는 접두사가 붙는다는 것, 그리고 그 폭풍의 중심에 ‘스마트워치’가 있다는 것이다.
값싸고 정교한 쿼츠 시계의 등장으로 스위스 시계 산업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던 70년대의 파국적 상황이 스마트워치로 인해 다시 재현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분석들은 특히 태그호이어, 티쏘, 해밀턴 같은 엔트리 모델의 소멸, 심지어는 중고가 모델들의 소멸까지도 내다보고 있다. 좀 더 낙관적인 전망도 적지 않다. 기성 브랜드들이 쿼츠 파동 때처럼 손 놓고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며, 아날로그적 감성의 시계를 향한 욕구는 디지털 시대에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하튼 명확한 것은 스마트워치를 전통적인 시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던 시계 브랜드들이 이제는 스스로 스마트워치 개발에 나서는 등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더 명확한 것은 설령 제2의 쿼츠 파동으로 인해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브랜드들은―쿼츠 파동 때 그랬듯이―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관건은 생존 전략의 유효성에 있을 것이다.
70년대 쿼츠 파동 때도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은 여러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존버’도 있었을 것이고, 전통을 파괴하는 아픔도 있었을 것이고, 남의 등을 쳐먹는 파렴치한도 있었을 것이다. 21세기 다시 만난 파동에서는 어떤 생존 전략이 주효할 것인가. 일단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팁은 과거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시적 소비’로서의 시계
시간이라는 말은 참으로 어렵다. ‘시간 참 빨리 가네’, ‘시간이 약이다’라고 할 때는 한편으로는 철학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성이론이니 뭐니 하는 물리학의 냄새도 난다. 반면 ‘시간을 잘 지켜야 해’, ‘시간 개념이 없네’라고 할 때는 만들어진 시간, 좀 더 정확히는 24시간이라는 단위로 나누어진 ‘사회적 합의’로서의 시간에 가깝다.
지금이야 전혀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시간을 소유한다는 것이 하나의 특권이고 권력이었던 적이 있다. 그날그날 벌어 먹고살던 농경과 가내수공업 중심의 시대에서 벗어나 공장이 생기고 관료적 조직이 자리 잡으며 체계적 사회 관리가 본격화되던 18세기 무렵, 소위 ‘근대성’의 태동기라고 하는 시기부터 사회적 합의로서의 시간이 실생활에서 더욱 중요해졌다.
두말할 나위 없이 시계의 중요성도 점점 커졌다. 물론 개인이 소유하는 소형화된 형태의 기계식 시계는 특권층과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수십 개의 부품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소형 시계를 만드는 데는 고도로 숙련된 기술과 긴 제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를 관리하고 공사다망한 자본가와 권력층들은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아야 했던 반면, 노동자들이야 휴식 시간이나 퇴근 시간 등을 시계탑이나 공장에 걸려있는 대형 시계로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미 그 출발부터 실용적인 목적을 넘어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고 과시하는 ‘과시적 소비’의 대상이었던 것이 시계였다.
시계를 가진다는 것은 곧 시간을 소유한다는 것이었고, 시간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가 아닌, 반대로 그들의 시간을 거머쥐고 있는 특권층임을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시계의 대중화가 진전된 오늘도 과시적 소비로서의 시계라는 특성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강해진 듯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길목 어귀에 쿼츠 파동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쿼츠 파동, 과연 기계식 시계에 악재였나?
1969년 크리스마스, 스위스 기계식 시계가 독점하고 있던 시계 시장에 일대 혼란을 가져온 시계가 나타났다. 쿼츠 시계인 세이코 아스트론(Astron). 건전지로 작동하여 매번 태엽을 감을 필요도 없고,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정확함을 갖춘 쿼츠 시계에 전 세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상류층들의 전유물이었던 기계식 시계보다 더 싸고 더 정교한 시계라니, 대부분의 사람이 흔들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실 아스트론이 쿼츠 파동의 주역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스트론의 초기 출시 가격은 45만 엔으로 당시 도요타 코롤라 한 대 가격으로 상당히 고가였고, ‘타도 기계식 시계!’ 같은 ‘곤조’를 부린 적도 없다. 다만 쿼츠 기술이 타사에서 모방하기 어렵지 않은 기술이었다는 것이 발단이 되었다. 대부분 수작업을 거쳐 제작에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기계식 시계와 달리, 쿼츠 시계는 대량으로 신속하게 생산해 낼 수 있었다. 때문에 너도나도 쿼츠 생산에 뛰어들었고, 자연스레 가격하락과 손목 시계의 대중화가 뒤따랐다.
반면 기계식 시계 제조만을 고집하던 스위스 시계 산업은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약 1,600여 개의 스위스 시계 업체 중 600여 개만이 살아남았고, 전체 산업 인구의 70% 이상이 실직하게 되었다.
그나마 발 빠르게 시장의 동향에 적응하던 몇몇 이들이 스러져가던 스위스 시계 산업을 다시 일으키게 되었다. 경영 컨설턴트로 유명한 니콜라스 하이예크(Nicolas Hayek)가 스위스 기계식 시계 연합인 SSIH(Société Suisse pour l’Industrie Horlogère)와 ASUAG(Allgemeine Schweizerische Uhrenindustrie AG)를 합병시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후 블랑팡, 론진, 티쏘, 해밀턴 등을 인수하며 그 유명한 스와치 그룹으로 거듭난 이 연합체는 쿼츠 제품 생산에 뛰어드는 한편 대중적인 디자인과 저가 및 중가 라인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재활에 들어갔다. 리치몬드나 LVMH 같은 그룹에서도 이와 유사한 회생 전략으로 다 죽어가던 스위스 시계 업체들의 멱살을 붙들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1990년대로 가며 기계식 시계의 인기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가지게 된 쿼츠 시계에서는 구현이 어려운 세련된 컴플리케이션과 장인의 손길에 갈증을 느끼던 이들이 고가의 기계식 시계에 투자하는 경향이 점차 늘어났다. 다만, 도구로서의 실용적 가치보다는 고급화 전략과 하이엔드 시계로서의 포지션을 택하며 명성을 유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시계라기보다는 사치품, 예술품, 수집품의 성격에 가까워진 것이다.
과시적 소비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되려 과거보다 더 적합한 선택지가 되어간다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쿼츠 파동 이후 거의 몰락 직전까지 갔던 기계식 시계는 오늘날 오히려 더더욱 넘사벽이 되어가고 있다. 기계식 시계의 고질적 문제인 정확성과 파워리저브를 트루비용을 통해 비약적으로 개선하고 문페이즈, 퍼페추얼 캘린더 등 고도의 기술과 감성이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그 가격이나 접근성은 범인들에게는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쿼츠 파동의 혼란 속에서 과거 독립 브랜드들이 도산하거나 거대 기업 산하로 편입되며 고유한 정치성과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쿼츠 파동을 살아남은 브랜드들로서는 1970~80년대가 어쩌면 스스로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명품으로서의 포지션을 공고히 하게 되는 계기였을지 모른다.
쿼츠 파동 시대의 생존 전략, 독선과 순응 그 사이 어딘가
변화하는 시대를 버텨낸 브랜드들의 생존 전략은 ‘제2의 쿼츠 파동’에 대응하는 오늘날 브랜드들의 참고서가 될지도 모른다. 또한, 기계식 시계 vs. 쿼츠 시계 vs. 스마트워치 3파전의 앞날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의미한 참고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양각색으로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온 브랜드들의 생존 방식을 살펴보자.
#동아줄 부여잡고 살아난, 스쿠알레(Squale)
다이버 워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스쿠알레는 1946년 워치케이스 메이커로 출발한 브랜드이다. 블랑팡, 태그호이어, 제노 등 고급 브랜드에 케이스를 제공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1950년부터 자사의 다이버 워치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쥬얼샵에 납품을 하지 않고 다이브 스토어에서 판매를 시작하며 전문적인 워치로서의 포지셔닝을 택했다.
다이버 워치로서의 명성은 60~70년대까지 정점에 달했으나, 쿼츠 파동으로 인해 기계식 시계 생산을 중단하게 되었다. 1989년에는 다소 뒤늦게 쿼츠 제작에 돌입했으나, 결국 대중들에게서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했던가. 독보적인 다이버 워치 기술을 잊지 못한 이탈리아의 한 가문에서 회사를 인수, 2010년부터 이탈리아 밀란에 본사를 두고 시장으로 복귀하게 된다. 과거 기술력을 바탕으로 양질의 다이버 워치를 선보이고 있으며, 꾸준히 마니아층을 형성 중이다.
#똥고집 부리다 큰코다친, 루시앙 피카르(Lucien Piccard)
루시앙 피카르만큼 드라마틱한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브랜드는 몇 안 될 것이다. 1923년 프랑스계 미국인 루시앙 피카르가 설립한 이 브랜드는 귀족 중에서도 귀족들만 사용하는 시계였다. 최고급 쥬얼로 떡칠한 케이스와 다층 구조의 다이얼로 과거 다른 하이엔드 브랜드들조차 어깨를 견주기 힘들 정도의 고급 브랜드였지만, 쿼츠 파동의 여파는 피해 가지 못했다.
안 그래도 대중과 거리가 먼 브랜드였는데도 쿼츠 대유행 시기에 귀족 지향적인 디자인을 고수하며 듣보잡이 되는가 싶더니 결국 2010년 파산을 선언한다. 이후 SWI(Swiss Watch International)에 인수되어 저렴한 라인의 제품만을 생산하게 되는 굴욕을 맛보기도 한다. 2017년 SWI가 해체되며 다시 독립 브랜드로 귀환, 과거의 아이덴티티를 되살리려고 노력 중이나 다른 하이엔드 브랜드들에 비하면 기술력이 다소 뒤처진다는 평이 다수이다.
#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벌케인(Vulcain)
최초의 기계식 알람시계, ‘미국 대통령’ 시계로 유명한 벌케인은 관종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브랜드명이 없어져도 시계를 생산했던 희귀종이다. 벌케인은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착용했던 크리켓(Cricket)모델을 계기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 린든 존슨, 닉슨 등이 착용했으며, 2009년에는 브랜드 창립 150주년을 기념하여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 한정판 모델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1961년 벌케인은 레뷰(Revue), 뷰져(Buser)와 함께 MSR(Manufactures d’Horlogerie Suisse Réunis SA)이라는 그룹으로 합병되었다. 쿼츠 파동 이후 희한한 행보를 보여줬는데, 벌캐인이라는 브랜드명은 사라졌음에도 시계 생산은 계속하였다. 자매 브랜드인 레뷰에서 크리켓 모델을 ‘Revuew Thomme’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장기간 생산을 중단한다.
이후 PMH(Production et marketing horloger)에 인수되었다가 2002년 새 모델 ‘노티컬(Nautical)’등을 선보여 다시 주목을 받았다. 2009년 다시 스위스 엑설런스 홀딩(Suisse Excellence Holding)에 매각되었으나,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백악관 및 다수의 뮤지션을 위한 시계를 꾸준히 제작 중이다.
# 니 시계 내 시계, 진(Sinn)
독일 브랜드 진은 기회를 포착하는 데는 타고난 듯하다. 진의 파일럿 워치를 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시계가 있는데, 바로 브라이틀링의 베스트셀러 내비타이머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브래드 로고만 빼고 브라이틀링 제품과 똑같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브라이틀링이 고군분투하며 1980년대부터 파일럿 워치를 내세워 기계식 시계 부활을 하드캐리한 반면, 진은 브라이틀링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아 살아남은 케이스이다. 쿼츠 파동으로 경영난을 겪으며 팔 것 못 팔 것 막 내다 팔던 브라이틀링을 눈여겨보던 브라이틀링의 수장 헬무트 진(Helmut Sinn)이 잽싸게 내비타이머 806과 009의 저작권을 사들인 것이다. 현재까지도 브라이틀링이 진에 해당 모델의 디자인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다.
헬무트 진의 짠돌이 기질도 브랜드가 큰 위기 없이 살아남는 데 일조한 듯하다. 중간 마진 없이 직접 판매를 해왔으며, 이 때문인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공급해 판매실적도 준수한 편이다.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의 가격에 부담을 느낀 사람들이 진으로 넘어오는 경우도 꽤 많다고 한다. 단점이라면 다소 발전이 없는 투박한 디자인 정도?
시계 산업의 미래, 쿼츠 파동이 시사하는 것들
인과관계까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티쏘, 해밀턴, 미도, 라도 등 100만 원대 중가 제품들의 수요가 최근 많이 줄었다는 사실과 스마트워치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 사이에는 최소한 상관관계쯤은 있을 것이다. 미국의 한 조사업체 데이터에 따르면 전 세계 스마트워치 시장은 2020년 약 5조 4,038억 원 규모에서 2025년엔 약 14조 6,354억 원으로 매년 18.3%씩 무서운 성장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당연히 전통적인 시계의 시장 점유율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스마트기기 전반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스마트워치의 범용성 또한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도 시계 산업을 긴장케 하는 요소일 것이다. 물론 1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새 제품이 나오는 스마트워치는 일종의 소모품이기 때문에 아날로그 시계와 양립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너무 고지식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계라면 기계식이지!’하며 젠체할 필요도 없다. 혹여나 스마트워치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하여 아날로그 시계에 대한 나의 해박한 지식을 자랑할 기회가 없어질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
쿼츠 파동 때도 그랬듯이, 장인의 아우라를 잔뜩 머금은 기계식 시계는 더더욱 욕망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더 변태적으로 정교해지고, 더 값어치를 올리게 될 것이다. 과시적 소비로 스스로를 구별지으려는 인간 본능은 전 세계에 몇 대 안 되는, 수천 수억을 호가하는 기계식 시계가 아니고서는 충족되기 어려울 것이다.
아날로그 시계의 존폐를 논하기보다는, 기성 브랜드들이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갈지가 관건 일 듯하다. 스쿠알레처럼 스마트워치에 밀려 사라졌다가 누군가의 기억에 소환되어 구제받는 브랜드도 있을 것이다. 똥고집 계속 부리다 추억보정 버프도 안 걸리는 루시앙 피카르 같은 브랜드도 있을 것이고. 이름값 신경 안 쓰고 묵묵히 소신으로 일관하는 벌케인 같은 브랜드도, 잽싸게 시류를 캐치하는 진 같은 브랜드도 있을 것이다.
지금 각각의 기성 브랜드가 이 중 어느 전략과 유사한 대응을 택하는지 살펴본다면, 그 미래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