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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말로, 바깥에서 잔 모든 날이 좋았다. 맑은 날은 볕이 좋아서, 비가 오면 빗소리가 좋아서, 눈 내리면 그 적막함이 좋아서. 바닷가에선 무한의 막막함이 좋았고, 능선에선 힘줄 같은 산줄기가 아름다웠다. 뭐가 그리 좋았을까. 시간 지나 휘발될 것들 날아간 뒤에 발라낼 것 발라내고 남은 즐거움의 형체를 추려보았다.
빼곡한 나무 사이, 틈 같은 공간에 텐트를 치고 누워 하늘을 보면 마치 나무로 지은 집에 누운 것 같다. 하루 종일 걸어온 길을 되짚어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지형을 그려본다. 능선이라면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자연에 스며들 듯 깃들어 밤을 맞이한다. 숲은 점점 짙어져 어두워지는 하늘을 닮다가 마침내 완벽한 어둠이 된다. 별이 박힌 곳은 하늘이고, 없는 곳은 숲이다. 하, 아름답다.
자연의 아름다움 : 도리없이 좋은
캠핑을 하면 뭐가 제일 좋으냐, 물으면 답이 비슷하다. 경치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거 먹는 거요. 좋은 경치는 누구나 좋아한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일찍이 ‘사바나 가설’을 제시했다. 사바나의 숲은 열대우림보다 채집할 식물과 고기를 얻을 사냥감이 많고 평원이라 오랜 유목에 적합하며 적당한 숲은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기도 한다.
가설의 이름은 인류가 출현했다는 아프리카 사바나 평원에서 가져왔다. 대략 300만 년 전 일이다. 4대 문명부터 도시 생활을 했다고 해도 고작 5,000년이다. 299만 년 넘게 자연에서 살아왔으니 우리 유전자엔 자연을 좋아하는 유전자가 있다. 하물며, 캠핑하기 좋은 아름다운 자연이야 말해 뭐할까.
자연에 대한 본능적인 호감은 진화의 산물인지라, 우리는 도시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자연을 일상으로 들이려 한다. 공원을 만들고 정원을 꾸미고 책상에 화분이라도 올린다. 없는 것보단 낫지만 충족되진 않는다. 당연하게,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은 캠핑의 첫 번째 이유가 된다. 압도적인 자연에 안겨 하룻밤 보내본 이라면 공감할 거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오래 자주 보면, 자연이 아름답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응? 예쁜 자연만이 아니라 거칠고 삭막하고 두려운 자연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뜻이다. 정수리가 아플 정도의 비를 재킷 하나 걸치고 온몸으로 맞으며 숲을 걸을 때, 눈이 쌓여 텐트 출입구가 열리지 않을 때, 비탈진 계곡을 탁류가 거칠게 휩쓸 때 우리는 두렵다. 두려움, 자연이 슬쩍 건네는 선물이다.
두려움 : 통제할 수 있는
두려움은 실질적인 위험에 대한 반응으로 대부분 불쾌하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래야 살아날 궁리를 하고 해결할 에너지를 얻을 테니까. 두려움이라는 신호에 우리 몸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에피네프린(epinephrine, ‘아드레날린’으로 더 알려진)을 분비한다. 혈액을 빨리 굳히고(그래야 움직이잖아!) 간에는 포도당을 내놓으라 명령하고(싸우든 도망치든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심장도 빨리 뛰게 하고(피가 잘 돌아야지!) 호흡도 가쁘게 만든다(근육은 산소가 필요하잖아!). 심지어 위장으로 가던 피를 근육으로 보낸다. 소화는 나중에 시켜도 되니까. 두려움은 진화의 원동력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자연 앞에 두려울 일이 있나? 그 옛날 우리를 위협하던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어지간히 극복됐다. 자연재해는 여전히 인간의 초라한 상상력과 예측을 초월하지만 적어도 캠핑을 하는 상황이라면 자연이 두려울 일은 없다. 날씨 좀 궂으면 안 가니까. 오히려 요즘 우리가 두려운 건 사회에서 맺는 관계다. 나의 상식과 계획과 의지를 배신하기 일쑤라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거든. 예측할 수 있거나 통제할 수 있는 두려움은 오히려 자연에 있다.
태안의 해변 길을 걷다가 바닷가 소나무밭에 텐트를 쳤다. 새벽 폭우에 텐트가 빗물에 잠겨 일어나니 가스통과 옷가지가 빗물에 동동 떠다녔다. 우린 젖지 않은 스토브와 가스를 확보했고 라면과 소주를 건졌다. 수돗가에 모여 라면에 소주를 홀짝거리며 낄낄댈 수 있었던 건 혼자가 아니라 셋이어서 가능했겠지만, 검색으로 읍내 목욕탕과 콜택시 번호를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예측하진 않았지만 통제할 순 있었으니까. 쫄지 않아도 된다면 자연의 어떤 모습도 아름다울 수 있다.
불편함 : 하지만 자연스러운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한 건 기술 덕이다. 기술의 미덕은 또 있다, 편하다는 거다. 스마트폰 하나면 비가 얼마나 오는지, 얼마나 더 올지 알 수 있고 택시도 부를 수 있고, 막말로 구조도 요청할 수 있다. 원리를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을 우리는 날마다 쓴다. 편리하기 짝이 없다. 편리함 혹은 효율성은 시대의 이정표가 되었다. 캠핑이든 일상이든 갈수록 편해질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은 정말 의심할 여지가 없을까. 문명을 만들어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했지만, 그 문명 속 관계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기술이 주는 편리함을 만끽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놓친 것은 없을까.
질문을 바꿔보자. 캠핑장의 밤을 환하게 밝힌 조명들은 도심의 네온사인과 얼마나 멀리 있을까. 골짜기와 숲을 울리는 음악 소리는 도시의 소음과 얼마나 다를까. 자연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장비를 챙긴다. 안전하고 평온한 상황이라면 좀 자연스럽게 즐기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까.
햇살 뜨거웠던 아치스국립공원의 캠프사이트에서 우리는 달랑 헤드랜턴 두 개로 사이트를 밝혔다. 한낮의 작렬하는 태양을 견디고 이제서야 쉬고 있을 존재들에게,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빛을 쏘고 싶지 않았다. 소리도 마찬가지. 들을 사람도 없는 광활한 자연에서 우리는 별 빼곡한 하늘을 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기술의 편리함을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정도의 편리함을 즐기려 애쓸 뿐이다. 불편한 편안함은 한 번 맛보면 자꾸 찾게 된다. 적응할 수 있는 정도의 불편함을 찾아 즐겨보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도시에서 별을 보지 못하는 건 도시의 빛 때문이다. 그 빛을 우리는 ‘광해(光害)’, ‘빛공해’라고 부른다.
한 번쯤 시도해보는 용기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방식으로 캠핑을 시작하고 즐긴다. 그러니 캠핑의 이유를 묻는다면, 정답은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는 이유에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겠지만, 두려움과 불편함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가로저을 이들도 있겠다. 이유가 다르면 방법도 달라진다. 이유에 답이 없다면 방법에도 답이 없다. 최소한만 지키면 된다. 다만 한 번쯤, 자잘한 두려움과 불편함은 맛볼 기회를 갖자. 생각보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