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자욱한 도로, 야성미 넘치는 남성이 차량에 올라탄다.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쓰고 창밖으로 던진 시선엔 거친 자유가 스며 있다. 너무나도 익숙한 미국 영화 속 이 장면, 남자가 타는 자동차는? 승용차와 트럭의 특성을 결합한, 적재함 덮개가 없는 소형 트럭인 픽업트럭(Pickup Truck)이 그 주인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지만, 미국에서는 가장 사랑받는 차종이라는 사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픽업트럭에 대한 새로운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기아는 브랜드 최초로 독자 개발한 타스만을 선보였고, KGM은 국내 최초 전기 픽업트럭 무쏘 EV를 출시했다. 덤으로 전통적인 모습과는 다르지만 픽업트럭으로 분류되는 테슬라 사이버트럭의 인기까지. 불모지에 불어온 새바람, 픽업트럭은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까? 지금껏 몰랐던 픽업트럭 이야기를 소개한다.
SUV의 조상, 픽업트럭
승용차도 화물차도 아니다
1908년 포드(Ford)가 출시한 ‘모델 T’는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높은 가격 덕택에 사치재에 가까웠던 자동차를 대중화한 장본인이기 때문. 업계 최초로 도입한 대량 생산 공정을 발판 삼아 모델 T는 당시 자동차 가격의 1/3 수준으로 대중에 선보여졌고, 당연하게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평범한 노동자도, 농업 종사자도 생업을 위한 차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동차는 마차나 손수레와 비교하면 파격적으로 편리한 운송 수단이었지만, 많은 짐을 실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승용 목적으로 제작됐으니 그럴 수밖에. 자연스레 적재에 대한 니즈가 대두되었고, 이를 캐치한 회사가 갈리온 올스틸 보디(Galion Allsteel Body Company)였다. 갈리온이 모델 T에 적재함을 설치한 개조 모델을 선보인 게 1913년. 픽업트럭의 개념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갈리온의 심상치 않은 판매량을 본 포드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드는 롤링 섀시 형태에 나머지는 원하는 대로 장착하는, 일종의 DIY 차량 ‘모델 TT’를 선보였다. 1톤에 달하는 탑재량은 수송의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첫 판매를 개시한 1917년에는 군사용을 제외하면 고작 3대만 생산되었으나, 점차 입소문을 타면서 150만 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1925년, 포드는 기세를 몰아 모델 T 런어바웃 픽업 보디(Runabout with Pickup Body)를 공개한다. 픽업트럭이라는 용어의 원조이자, 현대 픽업트럭의 근간이 될 역사적인 모델을 말이다. 이는 차체와 적재함이 통합된 최초의 자동차였다. 반응은 뜨거웠다. 튼튼한 강철 적재함과 편리한 테일게이트 덕분에 화물 운송에는 이만한 게 없었으니까. 뒤이어 쉐보레와 닷지에서도 픽업트럭을 출시하면서 저변은 점점 더 넓어졌다.
2차 세계 대전으로 잠시 주춤했던 픽업트럭 시장은 종전 이후 다시금 활기를 띠었다. 48년 연속 미국 픽업트럭 판매량 1위를 지키고 있는 포드의 F 시리즈도 1948년에 처음 발표됐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은 도시로 향했지만, 픽업트럭의 인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작업만을 위한 차량이 아닌 일상적인 이동 수단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미국적인 자동차
아메리칸 스피릿이 담겼다
농업과 제조업 종사자가 줄어들었음에도, 무엇보다 기능적인 차량인 픽업트럭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이유는 미국의 넓은 영토 하나만으로 설명된다. 교외 단독 주택에 거주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니 이동 시간은 한두 시간이 기본. 우리처럼 택배나 배달을 계속 이용했다간 파산할지도 모른다. 가구나 전자제품 같은 큰 물건도 직접 나르는 게 경제적이다 보니 픽업트럭의 효용이 높을 수밖에 없다.

물건 하나를 고치려고 해도 가벼운 여행에 준하는 수준의 거리를 이동하는 게 부지기수. 이 때문에 웬만한 건 직접 하는 게 미국식이다. 자동차 수리도, 심지어 집 보수도 DIY로 하는 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자재나 공구를 옮기려면 넉넉한 적재 공간을 갖춘 차량이 필수 아니겠는가. 거기에 사냥이나 캠핑처럼 많은 장비가 필요한 취미가 성행하는 것도 한몫한다.
지금은 상당 수준 오르긴 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나라보다 저렴한 기름값도 인기의 요인 중 하나다. 연비가 자동차 선택의 기준에서 빠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무겁고 튼튼한 차량이 급부상하게 된다. 특히 험지가 많고 도로 사정이 열악한 미국에서 외부 충격에 강하고 험로 주파 능력이 좋다는 건 크디큰 메리트다.

자립심을 강조하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 문화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픽업트럭.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미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픽업트럭을 모는 남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거대한 차체를 진두지휘하며 거친 오프로드를 질주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미국 남성상. 그저 선호의 차원이 아닌, 역사가 빚어낸 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픽업트럭의 분류
용도에 따라 선택하자
픽업트럭은 크기에 따라 콤팩트, 미드 사이즈, 풀 사이즈, 헤비 듀티로 구분된다. 현대의 싼타크루즈가 대표적인 콤팩트는 가장 작은 사이즈답게 일상적인 운전에 적합하다. 좁은 도로를 다니기에도 문제없는 만큼 우리나라에 안성맞춤. 미드 사이즈는 하이브리드 포지션이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재와 견인 능력으로 다목적 활용이 가능하다. 쉐보레의 콜로라도를 보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다.

미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크기는? 바로 풀 사이즈다. 픽업트럭계의 절대강자 포드 F-150이 여기에 해당한다. 1톤에 육박하는 적재 중량을 겸비한 비대한 체급은 가히 압도적. 산업용으로 쓸 생각이 아니라면 웬만한 영역은 풀 사이즈로 해결할 수 있다. 헤비 듀티로 넘어가면 일반인이 쓸 수준은 사실 아니다. 풀 사이즈 차량의 두 배나 되는 짐을 실을 일도 없을 거고, 도로를 막다시피 하는 크기는 아무래도 불편을 야기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참고로 픽업트럭 모델명에는 종종 숫자가 붙는다. 램 1500이나 실버라도 2500처럼. 적재 중량을 전달하는 의미로 시작된 표기법이지만, 지금은 그렇지만은 않다. 당장 램 1500의 1,500lb는 700kg도 안 되는 수치지만, 지금의 램은 1,000kg이 넘는 적재량을 커버하니까. 기술이 진화하면서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린 사실이 되어버린 것.

또 하나의 분류법은 운전실에 해당하는 캡(Cab)에 따라 나누는 방식이다. 두 개의 문과 한 줄의 좌석만 있는 경우 싱글 캡 혹은 레귤러 캡이라 부른다. 거기에 작은 뒷좌석 공간을 더하면 익스텐디드 캡이다. 문이 네 개일 경우 더블 캡에 해당하는데, 뒷공간이 좁으면 쿼드 캡, 넓으면 크루 캡으로 이해하면 된다. 운전석과 적재 공간의 넓이는 반비례 관계이기 때문에, 싱글 캡이 짐을 싣기에 좋다면 더블 캡은 패밀리카로 적합하다.
우리나라 픽업트럭 실정은?
쉽지 않은 한국 진출기
얼마 전 기아 타스만의 테크데이가 열렸다. 그곳에서 개발진에게 던져진 하나의 질문. ‘좋긴 좋은데 너무 좋은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제 기능을 발휘할 만한 도로가 우리나라에는 많지 않은데, 오프로드 기능이 너무 고스펙으로 출시됐다는 맥락이다. 말마따나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비포장도로를 달릴 일이 거의 없다.

좁은 땅덩어리에 비싼 유가까지 미국과 정반대 실정인 우리나라에 픽업트럭이 적합할 리 만무. 거기에 일반 승용차가 아닌 화물차로 분류되기 때문에 보험료도 높게 책정되고, 고속도로 1차선 진입 불가라는 소소해 보이지만 꽤나 거슬리는 불편함도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주차선 폭까지 좁아 미드 사이즈만 돼도 골머리를 앓을 확률도 높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 픽업트럭을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실제로 2024년 국내 판매된 신차 중 픽업트럭의 비중은 1%도 채 되지 않는 상황. 현대의 포니 픽업이나 기아 브리사 같은 국산 픽업트럭이 7~80년대에 출시되기도 했으나, 포터나 봉고 같은 1톤 트럭에 완전히 밀리며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나마 KGM이 렉스턴 스포츠와 칸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갔던 게 근 40년 간의 모습이다.

연이은 신차 출시와 아웃도어 취미의 부상이 우리나라 픽업트럭 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킬지는 아직 미지수다. 가장 실용적인 차가 여기서는 불편을 야기하는 골칫덩어리니 말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꼭 합리적이어야만 할까? 분명한 건 픽업은 픽업만의 독보적인 매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낭만은 비효율에서 온다고 했던가. 누구도 선택하지 않는 이 길이 본인에게는 찰떡같이 맞아떨어질지, 운전대를 잡아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