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5일, 약 4년 만에 한국 UFC 선수가 탄생했다. 박현성과 이정영은 ROAD TO UFC에서 우승해 오랜만에 한국 UFC 리거의 탄생을 알렸다. 그간 한국 선수들의 UFC 진출은 막혀 있었다. UFC가 더 이상 한국 선수들에게 직행 티켓을 제공하지 않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UFC는 이제 주로 2017년 론칭한 데이나 화이트의 ‘컨텐더 시리즈(DWCS)’를 통해서 신예를 선발하고 있다. 타단체 직접 영입의 경우 기존 단체와 경쟁이 붙어 비싼 계약금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비싼 돈을 주고 영입했더니 의외로 실력이 별로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아예 특별한 선수를 제외한 선수들은 모두 일종의 UFC 오디션을 거치게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게 바로 컨텐더 시리즈다.
하지만 컨텐더 시리즈를 통해 선수를 영입하다 보니 문제가 있었다. 아시아 선수들을 영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아시아 선수들도 DWCS에 종종 도전했으나 미국, 브라질, 러시아 선수들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서 UFC의 고민이 시작됐다. 아시아에는 DWCS에서 살아남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 많지 않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손꼽히는 경제적 강국으로 UFC의 시장 확대를 위해서 중요한 지역이다. 해당 지역의 UFC 선수들이 없다면 UFC의 시장 진출은 이뤄질 수 없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묘책이 ‘ROAD TO UFC’다. ROAD TO UFC는 아시아 전역에서 체급별로 8명의 선수가 모여 벌이는 8강 토너먼트다. 최종 우승자는 우승 부상으로 UFC와 계약을 한다. 준우승자도 인상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는 경우 UFC와 계약할 수 있다. UFC는 ROAD TO UFC를 통해 (1) 아시아 시장에 진출이 용이해졌고, (2) 아시아 선수들의 실력을 검증하고 영입할 수 있게 됐다.
ROAD TO UFC 시즌 1은 큰 성공이었다. UFC는 마침내 실력이 검증된 인도, 인도네시아 선수를 영입하게 됐다. 그간 UFC에는 인도, 인도네시아 선수가 없었다. 인도는 인구 14억 명, 인도네시아는 2억 7천만 명의 대국이다. UFC가 오랫동안 탐낸 시장이다. 그렇다고 아무 선수나 영입할 수는 없었다. UFC에 억지로 진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ROAD TO UFC에서는 아시아 최강자들이 모여 경쟁하므로 우승자는 비 UFC 아시아 최강자라는 검증을 통과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아시아 선수들끼리 경쟁하면서 아시아 지역 내부에서 UFC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 UFC는 ROAD TO UFC 시즌 1을 통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UFC에 대한 관심을 불러 모으는 데 성공해 마침내 UFC 중계권 계약을 성공시켰다.
한국도 UFC에게 중요한 시장이다. 한국은 세계 경제 규모(명목 GDP 기준) 12위 국가다. 다른 선진 국가들과 달리 아직 스포츠를 돈 주고 본다는 개념이 자리 잡지 않아서 스포츠 시장은 사실상 국가, 기업 주도로 저발전 상태지만 그래도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 세계적 수준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CJ ENM이 tvN SPORTS와 TVING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며 UFC 중계권을 사들인 후 UFC에게 한국 시장의 가치는 더 높아졌다.
그 결과 ROAD TO UFC 시즌 1에 이어 시즌 2에도 7명의 한국 선수가 토너먼트에 참여하고, 논토너먼트 경기에도 2명의 선수가 참가하게 됐다.
ROAD TO UFC 시즌 2 참가자는 누구?
한국 참가자는 플라이급 이정현(20, 8승)과 최승국(26, 6승 2패), 밴텀급 이창호(28, 7승 1패), 페더급 김상원(30, 9승 1무 5패), 라이트급 기원빈(32, 17승 8패) 김상욱(29, 7승 1패) 홍성찬(32, 9승 1패)이다. 논토너먼트에는 웰터급 김한슬(32, 13승 4패)과 유상훈(33, 7승 2패) 참가한다.
플라이급부터 체급 순서대로 출전 선수들을 검토해 보자.
먼저 ROAD TO UFC 시즌 1에 이어 ‘코리안 좀비’ 정찬성의 제자 최승국이 재출전한다. 최승국은 국내 단체에서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선수라 시즌 1 명단 공개 당시에는 정찬성 낙하산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탄탄한 타격과 그래플링을 통해 평가를 반전시키며 준우승까지 차지했다. 작년 준우승자 중 절반인 두 명은 UFC와 계약에 성공했다. 계약에 성공하지 못한 최승국과 이자에게는 시즌 2 재출전이라는 기회가 주어졌다.
최승국이 1라운드에서 만나게 될 상대는 인도의 수밋 쿠마르(22, 4승 0패)다. 레슬링 백그라운드를 가진 선수로 경량급 명문 팀 팀 알파메일에서 실력을 발전시켰다. 전적이 적은 선수이고, 승리 선수가 2전 2패, 1전 1패 전적인지라 MMA 입문자 정도로 간주된다. 초특급 엘리트 레슬링 배경을 갖춘 게 아니라면 조심스럽게 지난해 많은 경험을 한 최승국의 우세가 예상된다.
플라이급에 출전하는 두 번째 한국 선수는 ‘고등래퍼’ 출신 파이터 이정현이다. 로드FC에서만 2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8승 무패의 전적을 쌓았다. 좌우 훅이 모두 결정력이 좋아 4번의 KO(TKO)승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로드FC가 쉬운 상대만 줘서 래퍼를 겸업하는 상품성 있는 어린 선수를 띄워줬다는 의견도 있다. 마지막 경기인 11승 1무 12패의 타이키 아키바를 상대로 고전하면서 특히 의심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번 ROAD TO UFC는 본인의 진정한 실력을 입증할 기회다.
상대는 이번 대회 우승 후보 중 하나로 점쳐지는 필리핀계 미국인 마크 클리마코(25, 8승 1패)다. 미국 명문팀 아메리칸 킥복싱 아카데미(AKA) 소속으로 강력한 레슬링을 자랑한다. 지난 시즌 1에서 1라운드에서 4강에서 박현성에게 무너진 태국의 톱노이 키우람에게 패한 호리우치 유마에게 1라운드 KO패를 허용한 바 있다. 현재 미국에서 UFC 최고의 선수 공급처가 된 LFA에서 5전을 치른 만큼 시즌 2 플라이급에서 가장 검증된 선수라고 볼 수 있다. 이정현이 클리마코에게 승리할 경우 단번에 유력 우승 후보로 떠오를 수 있다.
그 외 이번 시즌 플라이급에서 주목해야 하는 선수로는 판크라스 플라이급 챔피언 츠루야 레이(20, 6승)가 있다. 고3 때 전국 고교 자유형 레슬링 선발대회에서 60kg급 준우승을 차지했다. 강력한 레슬링과 주짓수를 갖춘 선수로 이번 대회 유력 우승 후보로 꼽힌다.
밴텀급에는 ‘개미지옥’ 이창호가 출전한다. 주로 플라이급에서 5전을 치른 선수지만 이번 대회에는 밴텀급으로 출전한다. 원챔피언십에서 맹활약 중인 김재웅, 권원일이 있는 익스트림 컴뱃 소속 파이터로 이름처럼 끈적끈적한 그래플링이 주 무기다. 8강에서 만날 상대는 인도의 라나 누더라 프라탑 싱(26, 11승 1패)이다. 그래플러 타입의 선수로 ONE의 마이너리그 격인 워리어즈 시리즈에서 한국의 조승현에게 길로틴 초크 서브미션 승을 거둔 바 있다.
밴텀급에서 주목해야 할 선수는 카미부코 슈야(28, 12승 1승 1패)다. 엘리트 레벨에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유도 선수 출신으로 끈적끈적한 그래플링을 자랑한다.
페더급에는 더블지FC 페더급 챔피언 김상원이 출전한다. 한국 양대 명문 팀인 코리안탑팀(KTT) 소속으로 난전에 강하다. 전 AFC 페더급 챔피언 문기범을 타격으로 무너뜨린 후 리어네이키드 초크로 꺾었고, 지난 시즌 출전자인 홍준영과 1무 1패를 기록했다.
상대는 재수생인 슈토 페더급 챔피언 사스 케이스케(28, 11승 1무 2패)다. 지난 시즌 의외의 강자 이자에게 1라운드 패했지만, 에피소드 5 논토너먼트 경기에서 바라진에게 승리했다. 지난 시즌 최강자 라인이었던 이자, 마츠시마 코요미, 이정영 레벨에는 못 미치는 걸로 보이지만 아시아 레벨에선 잔뼈 굵은 강자다.
페더급에서 주목해야 할 선수는 1라운드에서 맞붙는 중국의 이자(26, 22승 4패)와 아프가니스탄의 압둘 아짐 바다흐시(27, 13승 3패)이다. 이자는 지난 시즌 결승에서 이정영을 맞아 사실상 이겼다는 평가가 많이 나오는 선수다. 강력한 맷집과 체력, 준수한 그래플링의 소유자로 아시아 비 UFC 레벨에선 확실히 최정상급 강자임을 증명했다. 바다흐시는 정상급 단체인 ACB와 브레이브CF에서 활약한 KO 파워가 뛰어난 강자다. 물론 러시아 강자들에게는 조금 못 미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충분히 검증된 강자라 볼 수 있다.
‘강철부대’ 출신부터 심상치 않은 다크호스까지
라이트급에는 무려 세 명의 한국 선수들이 참가한다. 라이트급이면 벌써 아시아에서는 꽤 중량급에 들어가기 때문에 선수 풀이 좁아지기 때문에 한국 선수들이 기회를 많이 받은 거 아닌가 싶다.
먼저 재수생 기원빈이다. 지난해 많은 사람이 김경표와 함께 결승에 오를 걸로 예상했지만 둘 다 준결승에서 져버렸다. 엄청난 근육질의 몸매로 근성 있는 경기를 펼친다. 하지만 다소 느리고, 뻣뻣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지난 시즌 준결승에서 제카 사라기에게 뒷손 오른손 어퍼를 치려다 오른손 카운터를 맞고 실신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1라운드 상대는 중국의 바하터보레이 바터보라티(25, 7승 1무 1패)다. LFA 웰터급에서 활약하다 이번에 체급을 내려 ROAD TO UFC 라이트급 토너먼트에 참전한다. 리징량과 같은 신장 위구르 출신 타격가로 킬클리프FC에서 훈련하고 있다.
김상욱은 예능 ‘강철부대’, ‘피지컬 100’ 등 프로그램에 출연 경력이 있는 레슬러다. 한국 MMA 역사상 최고의 그래플러 ‘스턴건’ 김동현의 제자로 레슬링 압박이 강력하다. 압도적으로 패했지만, 올해 데미안 마이아와 그래플링 시범 경기를 한 적도 있다. AFC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코리안좀비짐 소속의 박재현에게 패했으나 오히려 김상욱이 선발돼서 많은 사람이 의외라고 반응했다. 그만큼 예능 출연 경험이 UFC에게 강력하게 어필한 걸로 보인다.
상대는 일본의 마루야마 카즈마(30, 12승 6패)로 키가 큰 것만 빼면 평범한 선수다. 출전 선수 명단이 공개됐을 때 일본에서도 의외라는 평가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다크호스인 홍성찬이 있다. 코리안탑팀(KTT) 소속으로 강력한 레슬링 압박을 자랑한다. 현재 블랙컴뱃에서 라이트급 챔피언을 하고 있는 이송하에게 승리한 경험이 있다. 코리안탑팀 선수답게 해외 단체 경험도 많고, TFC에서 UFC 출신 윌 초프를 상대로 승리한 바도 있다. 2015년 YTN에서 기획한 <‘100명 중 1명’ UFC 꿈꾸는 무명 파이터의 하루>란 다큐에 출연했는데 마침내 UFC에서 뛸 기회가 걸린 토너먼트에서 뛰게 됐다. 피자를 너무 사랑해 은퇴 후 피자집을 차리는 게 꿈이다. 인지도는 가장 낮지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시즌 의외의 한방을 보여줄 선수로 기대받고 있다.
1라운드 상대는 UFC에서 1승 2패로 방출된 롱주다. 중국 명문 엔보 파이트 클럽 소속의 타격가로 티베트족 계열이다. 타격은 꽤 날카롭지만, 그래플링에 취약하고, 무엇보다 체중을 잘 못 맞춘다. 최근 세 경기 계체 체중이 모두 158파운드, 160파운드, 161파운드였다. 롱주가 계체를 못 맞춘다면 토너먼트 특성상 홍성찬이 부전승으로 4강에 진출할 가능성도 있다.
라이트급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선수는 일본 엘리트 레슬러 출신 하라구치 신(24, 5승 1무효)이다. 2020년 전 일본 프리스타일 레슬링 우승자로, 그라찬 라이트급 챔피언이다. 테이크다운이 뛰어나고 파운딩도 강력하다. 키가 167cm로 작기 때문에 이번 토너먼트가 끝나면 UFC에서는 페더급으로 전향할 거라고 한다.
AFC 챔피언과 엘리트 격투가도 참전
논토너먼트 웰터급 경기에는 전 AFC-더블지FC 통합 웰터급 챔피언 김한슬과 AFC 미들급 챔피언 유상훈이 출전한다. 김한슬은 ‘코리안 좀비’ 정찬성의 제자로 카운터 왼손 펀치의 파괴력이 뛰어난 선수다. 시즌 1 논토너먼트 경기에도 출전해 서브미션 승을 거뒀지만, 부상으로 인해 두 번쨰 논토너먼트 경기 출전이 무산되면서 UFC 진출 기회를 놓쳤다. 이번에도 승리한다면 UFC에서 계약을 거절할 명분이 별로 없다. 현재 가장 유력한 UFC 계약 후보다.
김한슬과 맞서는 상대는 중국의 타이이라커 누얼아지(22, 8승 1패 1무효)다. 카자흐족 출신으로 중국 명문 엔보 파이트 클럽의 타격가다. UFC 파이트 패스 산하 단체인 JCK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승리한 경기는 모두 타격 피니시일 정도로 결정력이 뛰어나다.
유상훈은 우슈 산타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이자, 세계선수권 동메달리스트인 엘리트 타격가다. 최근에는 양감독TV 유튜브에서 쌍칼 캐릭터로 물오른 개그 폼을 보여주고 있다. 유상훈은 과거 UFC 진출 문턱에서 좌절한 바 있다. 그는 2019년 라이트급으로 DWCS에 출전했으나 피터 배럿에게 판정패 당했다. 배럿은 UFC와 계약했으나 2연패를 당하고 방출됐다.
유상훈의 상대는 필리핀-스위스 혼혈 파이터인 크리스 호프먼(33, 8승 1패)이다. 묘하게 한국과 인연이 있는 파이터로 데뷔전을 현 UFC 해설위원인 김두환과 치렀으나 펀치에 KO 당했다. 지난 3월에는 유상훈의 부산 팀매드 팀메이트 김민석을 KO로 잡아냈다. 다소 턱이 약한 유상훈에게 위협적인 상대가 될 가능성이 있다.
과연 21호 한국 선수가 탄생할 수 있을까?
비 UFC 선수들 중에서 단연 최고의 선수들만 나갔던 시즌 1에 비하면 이번 시즌 선수들의 경력은 다소 아쉬워 보인다. 그 화려했던 선수진 중에서도 오직 박현성과 이정영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특히 이정영은 판정단 구성이 달랐다면 패배할 수도 있는 경기였다. 생각보다 아시아 수준도 만만치 않았다.
반면 다른 지역 참가자들의 수준은 더 오른 것처럼 보인다. 나카무라 린야를 제외하면 다소 아쉬웠던 일본 선수진은 각 체급 정상급 유망주들로 채워졌다. 이번 시즌에는 LFA나 ACB(현 ACA) 같은 유명 단체에서 활약한 경험이 있는 선수들이 다수 출전한다.
여러모로 시즌 1 때보다 한국 선수들에게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 걸로 보인다. 다만 UFC에서 ROAD TO UFC 시즌 1의 흥행으로 이번 시즌에는 보다 후하게 계약을 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특히 지난 시즌 여섯 명의 선수 중 단 한 명에게만 계약을 줬던 논토너먼트 경기에서 보다 후하게 계약이 주어질 수 있을 걸로 예상된다.
과연 한국 21호 UFC 선수는 누가 될까. (비 UFC) 아시아 최강자를 가리는 ROAD TO UFC를 주목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