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편에서 AMD의 너무나도 짧았던 꽃길과 절망스러웠던 고난의 행군을 소개했다. 당시 AMD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서 나온 명대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모든 순간은 시간 속으로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몰락을 향해 휩쓸려가던 AMD의 미래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AMD는 살아남았다. 그것도 유저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으며. 도대체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몰락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걸까? 2012년 이후 AMD의 이야기는 지켜보는 이에게 깊은 감명을 선사할 만큼, 마치 한 편의 장엄한 신화와도 같았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마저 풀어내 볼까 한다.
이것이 회사의 미래다 -희망 편-
불도저 아키텍처의 실패는 AMD를 커다란 위기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그대로 무너져 내릴 만큼 대안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미세 공정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AMD는 CPU 패키지의 남는 공간에 GPU를 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RADEON’ 시리즈로 유명한 그래픽 칩셋 업체 ‘ATI’를 무리해가면서까지 인수했던 이유도 이런 계획의 일환이었다. AMD는 장고 끝에 ‘APU (Accelerated Processing Unit)’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선보였지만, 중앙 처리와 그래픽 처리 중 어느 쪽도 좋지 못한 어중간한 성능으로 좋은 반응을 끌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런 와중에 2012년 AMD의 부사장이 새로 취임하게 된다. 격변의 시작을 알린 주인공은 바로 리사 수. AMD의 새로운 부사장으로 임명된 그는 APU를 활용할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서게 되는데, 바로 콘솔 게임기 시장이 타깃이었다. 어중간한 성능의 APU지만 콘솔 게임기 제조사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이 APU는 플레이스테이션 4와 엑스박스 One에 채용되는 위업을 달성했다. 다행히 플레이스테이션 4가 9천만 대라는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AMD는 자금 문제에서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됐다. 이 공적을 인정받아 리사 수는 AMD의 CEO 자리에 오르게 된다.
AMD의 귀환
이 변곡점을 지나면서 AMD의 역공이 시작됐다. 인텔이 ‘코어 I’ 시리즈로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승승장구하는 동안 AMD는 사력을 다해 차세대 ‘ZEN’ 아키텍처를 준비하여 ‘라이젠’ (Ryzen)을 발표한다. 인텔의 최고가 제품과 비교하기는 모호하지만, 충분히 만족할만한 성능과 엄청난 가성비를 무기로 시장에 충격을 던져 주기 충분했다. 이제 다시 PC 조립에 AMD 제품의 리스트를 올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AMD의 위대함은 지난해 발생한 보안 취약점, 통칭 ‘CPU 게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인텔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패치를 제공했다. 하지만 처리 속도가 하락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유저들의 원망을 받게 된다. 반대로 AMD는 설계 구조상 문제가 생길 여지가 별로 없다. 게다가 약간의 문제는 성능 하락이 거의 없는 패치로 해결이 가능했다. 라이젠의 엄청난 가성비와 CPU 게이트의 좋은 대응 덕분에 AMD의 CEO 리사 수는 전 세계 컴덕들의 여신이자 컴퓨터 요정으로 등극하게 된다.
라이젠이 뭐길래?
도대체 라이젠이 어떤 물건이길래 유저들의 갈대와 같은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AMD CPU의 가장 큰 문제는 연산 처리 속도가 느리다는 점이었다. 불도저 아키텍처의 전례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AMD의 장점인 코어 수가 많은 것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무조건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많은 프로그램이 여러 코어에 일을 분배해 처리하는 프로세스가 최적화된 것은 아니었기에, 인텔처럼 클럭 속도가 높아 연산 처리가 빠른 것이 효율적이었다.
이전의 AMD CPU는 인텔의 제품보다 클럭 속도가 느려 사용자들이 만족할만한 성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라이젠은 클럭 속도를 꽤 쓸만할 정도로 향상하면서, 가격은 인텔에 비해 압도적으로 저렴하다. 가성비를 잡은 라이젠에게 유저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흔히 대부분의 인식과는 달리 라이젠이라는 CPU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리사 수 혼자만의 공적이 아니다. 짐 켈러 같은 우수한 설계자와 많은 엔지니어의 노력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AMD를 수렁에서 구해내고 라이젠의 설계에 참가한 리사 수의 리더십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AMD의 손으로 인텔을 독주를 막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컴퓨터 시장은 단 1년 사이에도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인텔은 지금까지 CPU 시장을 선도하며 훌륭한 제품들을 많이 선보였다. 하지만 너무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던 탓일까. 기술 개발 인력을 대거 해고한 결과 코어 i9 세대, 커피레이크 리프레시에서 극심한 발열 문제를 야기하며 유저들의 불신을 키우고 있다. 그 사이에 AMD가 라이젠으로 인텔의 턱밑까지 추격한 것이다.
올해 중순, AMD의 CPU인 라이젠 3세대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아직 많은 정보는 없지만, 라이젠 3세대는 그동안 인텔에 다소 밀렸던 처리 능력이 향상되어 대등한 승부를 겨루게 됐다. 그리고 얼마 전 발매 된 라데온 7은 비록 엔비디아의 GPU보다는 성능이 뒤처지지만, RTX 시리즈의 불량률이 이슈화된 지금 대체품으로 고려해볼 만하다. 게다가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비전도 있다.
심기일전하여 회심의 일격을 가하려는 AMD와 이를 막으려는 인텔. 어느 쪽이 승자가 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지만, AMD가 시장에 일으킬 파란을 유저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