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4월이다. 무언가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벌써 4월이라니 그저 만우절 농담으로 믿고 싶다. 새해를 맞이하여 야심 차게 결심한 누군가의 다짐은 어느 정도 지켜졌을까? ‘새해 다짐’과 자연스럽게 짝을 이루는 말이 ‘작심삼일’이라는 것은 다소 서글프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작심’할 수 있음에 감사할 일이다. 최소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테고 그렇게 하루씩 쌓아가다 보면 소위 말하는 ‘갓생’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2017년 어느 날의 약소한 다짐으로 ‘어쩌다 보니’ 시작했던 달리기는 어느새 7년 차에 접어들었고 도대체 왜 저런 해괴한 짓을 하나 싶었던 풀코스 마라톤도 정신 차려 보니 10번을 완주했다. 정말이지 베를린, 오사카 등 해외에서까지 ‘마라톤 겸 여행’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보면 규칙적으로 달리기를 즐기는 지독한 러너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사실 42.195km를 뛰는 것보다 당장 문밖을 나서는 것에 늘 괴로워하는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요즈음의 완벽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은 그러한 괴로움을 훌훌 털어내 준다. 만약, 달리기로 작심하고 싶다면 지금이 바로 문밖으로 나설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다.
MBTI가 J형인 사람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마음먹기 오케이. 그럼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빠르게 떠오를 것이다. 물론, ‘내가 가면 길이 된다’의 마인드도 좋지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달려본 사람들이 자주 찾는 코스를 추천한다. 많은 러너의 까다로운 발로 검증된 코스이기도 하고 그곳을 뛰다 보면 왜 이들이 이런 해괴한 짓을 계속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당신도 내년 이맘때,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길 바라본다.
“거, 뛰기 딱 좋은 날씨네”
잠수교 코스
반포한강공원-잠수교-한남대교, 6km
“용솟음치는 질주 본능으로 내달리는 러너들의 아우토반”
러너 사이에서 쓰는 ‘센 척 구간’이라는 용어가 있다. 주로 골인 지점이 보이는 마지막 400m 구간이라든지 풀코스의 경우 36-7km 지점 응원단이 많이 위치한 곳을 말하는데, 이 구간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온몸의 힘을 쥐어짜 멋지게 센 척하며 질주하는 것이 ‘국룰’이다. 서울의 많은 코스 중에 나도 모르게 센 척 구간의 힘을 끌어 올리게 만드는 곳이 있는데, 바로 잠수교 코스다.
반포한강공원 세빛섬 앞에서 시작하는 잠수교 코스는 우선 출발점부터 가슴이 웅장해진다. 광활하게 펼쳐진 한강 사이로 쭉 뻗은 잠수교와 어우러지는 형형색색의 조명, 그리고 구경꾼(사실, 나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의 활기는 보는 것만으로 기분 좋은 미소를 띠게 만든다. 800m 정도의 잠수교는 중간 부분이 솟아 있는 형태로 되어 있어, 내리막 구간에서 한계 이상의 페이스에 도전하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다리 위에서 마주하는 러너들의 힘찬 “파이팅”을 받다 보면 내면에서 용솟음치는 질주 본능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타이밍이 잘 맞으면 환상적인 무지개 분수 쇼와 함께 달릴 수 있어 ‘인생샷’을 건지기에도 좋다. 잠수교를 지난 다음에는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운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자.
TIP _ 컨디션에 따라 반환 지점을 조절하며 달릴 수 있다. 별도 차량이 없을 경우 고속터미널역의 짐 보관함에 맡겨두고 오는 것을 추천한다.
여의도공원 코스
공원 1바퀴 2.5km / 고구마 코스 8.5km
“4바퀴만 돌면 10km? 이거 완전 혜자 아니냐?”
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멘탈 관리’라고 생각한다. 달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무수히 많은 타협과 합리화의 유혹에 시달린다. 주로 위기를 감지한 뇌가 보내는 속삭임으로 ‘오늘은 그냥 nkm 정도만 뛸까’, ‘페이스를 조금 낮출까’, ‘저기까지만 걸어갈까’ 따위의 것이다. 늘 그렇듯 우리는 무언가 할 이유보다는 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데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달콤한 목소리를 이겨내고 묵묵히 달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장거리 훈련을 해야 할 경우 괴로움이 극대화되는데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한가지 팁은 생각하는 숫자의 단위를 바꾸는 것이다. 보통 여의도공원 코스에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10km를 뛰어야 하는 경우 ‘10km’보다는 여의도공원 1바퀴(2.5km) 기준으로 환산하여 ‘4바퀴’로 생각한다.
’30km나 뛰어야 하네’가 ’12바퀴만 뛰면 되네’로 전환되는 마법 같은 효과. 물론, 거리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의 경우 미묘한 안도감이 느껴진다. 순환 코스여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공원 내에 편의점과 화장실이 있어 급수도 비교적 편하게 챙길 수 있다. 대회와 동일한 조건으로 2바퀴(5km) 기준으로 연습하면 좋다.
TIP _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경우 여의도지구대 쪽 터널로 빠져나와 한강공원 코스로 연계하는 커스터마이징도 가능하다. 여의도 전체를 도는 ‘고구마 코스’다. 17km가 단 2바퀴면 끝난다. “와! 이거 완전 혜자 아니냐?!”. 두 코스 모두 인근의 IFC몰에서 짐 보관을 할 수 있으니 이건 뭐 치트키가 따로 없다.
석촌호수 코스
동호 및 서호 1바퀴 2.5km
“혼자여도 외롭지 않아!”
본디 러닝 코스란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곳이 좋은 법이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은 피차 불편하기도 하고 페이스에 오롯이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백색소음을 찾는 것처럼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달리고 싶을 때도 왕왕 있다. 그럴 때는 석촌호수가 제격이다.
우선, 여의도공원처럼 10km가 4바퀴면 끝나는 장점이 있고 롯데월드타워, 롯데월드 등 달리는 내내 볼 것이 많은 덕분인지 분명 같은 2.5km인데도 체감상 더 짧은 느낌이다. 아마도 건너편이 보이고 동호와 서호가 분리되어 있는 형태로 되어 있어 심리적으로도 1바퀴가 더 가깝게 다가온다.
물론, 벚꽃 시즌이나 이벤트 기간 중에는 수많은 커플 사이를 “습습- 후후-”하며 요리조리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혼자라면 괜찮다. 다음 바퀴 때 그들을 또 만난다면 우리가 그만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
TIP _ 빽빽한 나무들이 호수를 감싸고 있어 여름에는 그늘 밑에서 시원하게, 겨울에는 바람을 막아줘서 포근하게 달릴 수 있다. 바닥에 폭신한 충전재가 깔려있어 발의 피로감을 줄여주는 것은 덤. 롯데월드몰 지하 1층의 물품 보관함도 무료(2시간)로 이용할 수 있다.
노들섬 코스
용산역-용산 기찻길-한강대교-노들섬, 6km
“런생샷을 원한다면 노들섬으로”
개인적으로 사진 찍히는 것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잘 있다가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갑자기 얼굴 근육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서 이상하게 뚝딱거리는 탓이다. 자연스레 사진첩에는 인물보다는 풍경 중심의 사진만 잔뜩 남아있었다.
이따금씩 이런 성향이 조금 아쉬울 때가 있는데 달리기는 뚝딱이에게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내려준다. 러닝 크루나 스포츠 브랜드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경우, ‘금손’ 포토그래퍼님들이 친히 ‘찍터벌(사진 찍기+인터벌 트레이닝)’을 하시면서 굉장히 자연스럽게 멋진 사진을 찍어 주신다. 빛과 소금 같은 분들 덕분에 소개팅 포트폴리오로 써도 손색이 없을 출중한 사진을 많이 건질 수 있다.
특히, 노들섬은 ‘런생샷’을 노리기에 더없이 좋은 코스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촬영지로 유명한 용산 기찻길 앞에서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특유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이윽고 한강대교를 지나 노들섬으로 진입하면 환상적인 풍경에 다시 한번 입에서 탄성이 나온다. 서울의 전경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노을 앞에서는 제아무리 사진 뚝딱이라도 “저.. 사진 한 번만 찍어주세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멋진 풍경 속에서 달리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니 참 황송할 따름이다.
TIP _ 노들섬 내에 카페와 화장실도 있으니 잠시 쉬어가도 좋다. 용산역의 물품 보관함을 이용하자.
연트럴파크 코스
홍대입구역-경의선 숲길공원-홍제천, 7km
“홍대에서 달리기를 한다고?”
서울의 이곳저곳을 달리다 보면 제법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잔뜩 모인 사람들의 말소리와 거리의 소음으로 떠들썩하다가도 조금만 뛰어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발소리와 숨소리만 남은 고요함이 찾아온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만의 달리기에 오롯이 침잠하는 기분 좋은 시간.
홍대입구역부터 경의선 숲길공원 그리고 홍제천으로 이어지는 연트럴파크 코스에서 그 소중한 감정을 여실히 누릴 수 있다. 홍대 특유의 화려함도 잠시, 경의선 숲길공원을 따라 연남동 아파트가 늘어선 곳으로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지고 터널을 지나 홍제천으로 진입하면 쭉 뻗은 주로가 나를 맞이한다. 더 달리고 싶어진다면 안심해도 좋다. 이 길은 난지한강공원까지 논스톱으로 쭉 이어져 있으니.
TIP _ 연트럴파크 코스는 저녁도 좋지만 특히 오전에 뛰는 것을 추천한다. 홍대피플의 라이프 사이클을 고려하면 비교적 오전에 거리가 한산하기도 하고,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탁 트인 한강을 보며 달리는 맛이 한강공원의 그 어떤 포인트보다도 좋다. 물품 보관은 홍대입구역을 이용하면 된다.
다음 편엔 ‘장비빨’ 세우기 좋아하는 러너를 위해 러닝 아이템에 대한 이야기로 찾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