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시계도 대량 생산 시대. 비슷한 디자인과 정해진 기능, 반복되는 마케팅 언어에 피로감을 느낀다면? 일본 독립 시계를 주목하자. 만든 이의 손길이 담기고, 시간을 해석하는 고유한 방식이 살아있는 일본 독립 시계의 세계. 이곳에는 스위스의 전통 워치메이킹이나 독일의 기계공학 중심주의와는 또 다른, 고요하고 섬세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일본 독립 시계가 특별한 이유
손끝으로 시간을 묻다
미니멀한 디자인
일본 독립 시계에서 먼저 눈에 띄는 건 절제된 디자인이다. 단순히 장식을 배제한 미니멀리즘을 말하는 건 아니다. 시계의 얼굴은 조용하고 단정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날카롭고 선명하게 살아 있는 디테일. 들여다볼수록 복합적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일본 전통 미학의 깊이와 섬세함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이는 일본 고유의 미학, 와비사비(wabi-sabi)와 닮아 있다. 화려함이나 완벽한 대칭보다는, 소박함과 비대칭의 구조 안에서 고유의 깊이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래서일까. 일본 독립 시계는 조용하지만 결코 단조롭지 않다. 고요함 속에 응축된 절제가 강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독립 시계가 세계 시계 커뮤니티에서 작지만 강한 존재감을 지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량 생산

일본 독립 시계는 대부분 소수의 장인 또는 작은 공방에서 만들어진다. 생산되는 물량도 극히 소량. 케이스 가공, 무브먼트 조정, 마감까지 대부분의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며, 이는 시계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 점의 시계를 완성하는 데 수십 시간이 걸리며, 같은 모델도 각각 조금씩 다른 표정을 지닌다.
나사 하나, 브릿지 마감 하나까지도 장인의 손끝에서 조율된다. 다이얼 마감, 인덱스 배치, 핸즈의 균형감 같은 아주 미세한 요소까지도 정교하게 계산된 시계는 워치메이커의 철학과 감각을 담은 하나의 기록물이 된다.
일본 제조 기술의 정밀성
일본 독립 시계의 기반은 일본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정밀 제조 기술에 있다. 부품 하나하나의 치밀한 가공, 오차 없는 조립, 눈에 띄지 않는 디테일까지 완성도 높게 조율하려는 집요함은 독립 시계의 기술적 기반을 이룬다.
일본은 카메라, 정밀 광학, 반도체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초정밀 가공 기술을 가진 나라. 이 기술적 전통은 자연스럽게 시계 산업에도 스며들었고, 시계라는 매우 작은 기계 안에 정밀성과 철학으로 응축됐다. 세이코(Seiko)의 스프링 드라이브가 대표적인 예다. 기계식 시계 메커니즘 위에 전자 제어 시스템을 얹어 정확성과 안정성을 높인 하이브리드 무브먼트는 정밀 제어 기술의 결정체.

미나세(Minase)는 정밀 절삭 공구를 만들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다. 미나세 시계는 빛이 반사될 때 훨씬 선명하고 날카로운 빛의 경계가 생기는데, 이는 숙련 장인이 손으로 연마한 결과물. 케이스의 평면, 베젤, 러그 등 표면을 일정한 각도에서 정밀하게 연마하여 거울처럼 매끄러운 광택을 내는 자라츠 폴리싱은 산업 기술로부터 시작했다.
기계식 무브먼트에 대한 애정
일본 독립 시계 장인에게 무브먼트는 단순 구동 장치가 아니다.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개념을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게 만드는 정서적 구조물이다. 일반 기계식 시계는 시간당 몇 번의 진동(Beat Per Hour)로 정밀도를 측정하는 데 비해, 일본 독립 시계는 그 진동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호흡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고의로 로우비트(low beat) 무브먼트를 선택하거나, 진동수에 미세한 변화를 주어 시계가 더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연출하는 식이다. 이는 마치 시간의 흐름을 더디고 고요하게 만들어주는 설계와도 같아서, 무브먼트는 시계 속 흐르는 정서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그 접근 방식은 스위스나 독일과 다르지만, 그에 못지않은 진지함과 섬세함이 있다는 의미다.
일본 독립 시계 브랜드는 보통 두 가지 방식으로 무브먼트를 다룬다. 하나는 직접 무브먼트를 만드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무브먼트를 정교하게 커스터마이징하는 방식이다. 전자는 대표적으로 마사히로 키쿠노를 들 수 있다. 그는 전통 일본 시계 와도케이(Wadokei)에서 영감받은 기계식 시계를 만드는데, 모든 부품을 수작업으로 깎아 제작한다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나오야 히다가 있다. ETA나 Valjoux 등 범용 무브먼트를 기반으로, 기어비나 브릿지 구조, 플레이트 재가공 등 세밀한 커스터마이징을 거치는 방식이다. 이는 단지 부품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무브먼트의 정신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작업과도 같다.
일본 독립 시계 브랜드는?
또 다른 시간의 언어
마사히로 키쿠노
“지금 차고 있는 시계는 정말 ‘자연스러운’ 시간을 알려주는가?” 일본의 독립 시계 제작자 마사히로 키쿠노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가 만든 시계는 단순히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가 아니라, 자연의 리듬과 인간의 시간 감각을 되살리는 철학적 작품. 에도 시대의 전통 시간 측정 방식인 와도케이(Wadokei)를 현대 손목시계에 적용한, 시침 시계(Temporal Hour Watch)다.

와도케이는 하루를 낮과 밤으로 나누고, 각 시간을 다시 6등분해 계절에 따라 시간의 길이가 달라지는 구조다. 마사히로 키쿠노는 이를 정교한 기계식 시계로 손목 위에 구현했다. 낮 시간이 길어지는 하지에는 낮 인덱스 간격이 넓어지고 밤 인덱스가 좁아지는 식이다. 동지에는 그 반대가 된다. 이처럼 시계 다이얼 위에서 실제 해가 떠 있는 시간을 기준으로 시간의 흐름을 직관적으로 읽게 한 것이다.
와도케이는 기계식 시계의 기술적 한계를 넘어선다. 시간의 흐름을 단순히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계절의 변화, 인간 감각의 리듬까지 품어내는 것이다. 이는 시계를 통해 시간을 체감하게 하는 예술적 도전이자, 시간 그 자체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아닐지.
쿠로노 도쿄

일본의 독립 시계 제작자 하지메 아사오카가 설계한 디자인 중심의 시계 브랜드다. 아사오카는 원래 초정밀 투르비옹이나 미닛 리피터같은 복잡 기능 시계를 제작하는 독립 시계 장인으로 유명했는데, 높은 가격으로 접근이 어려웠던 게 사실. 쿠로노 도쿄는 이러한 장벽을 허물고, 그의 하이엔드 워치메이킹 철학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등장했다.
쿠로노 도쿄의 디자인은 전적으로 아사오카가 맡는다. 일본 전통의 절제된 아름다움과 20세기 초 아르데코 스타일을 절묘하게 융합해, 우아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케이스 사이즈는 주로 37~38mm. 손목에 단정히 올라가며, 다이얼은 깊이 있는 컬러와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인다. 클래식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전 모델은 한정 수량으로만 생산된다. 예약 판매나 추첨 판매 방식으로 구매 기회를 제공하며, 희소성과 소장 가치도 높다. 가격대는 대체로 20~40만 엔대 수준. 독립 시계 장인의 철학과 감성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미나세
일본 아키타 현에서 정밀 금속 공구를 제작하던 쿄와 정공이 설립한 독립 시계 브랜드. 금속 가공을 극한까지 이해한 엔지니어가 만든 시계답게, 겉으로 드러나는 디자인보다 내부 구조에서 그 진가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미나세의 기술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는 바로 케이스 인 케이스(case-in-case) 구조다. 외부 케이스와 내부 구조가 완전히 분리 가능한 방식으로 설계되어, 다이얼과 인덱스, 핸즈, 글라스까지 각각 모듈처럼 분해, 조립할 수 있다. 이는 시계 전체를 오버홀이 아닌 복원 수준으로 관리할수 있다는 뜻이 되며, 시계는 하나의 ‘분해 가능한 조형물’로 여겨진다.
거울같이 왜곡 없는 표면을 만드는 자라츠 폴리싱은 미나세를 대표하는 마감 기법. 표면을 일정한 각도에서 정밀하게 연마하여, 빛이 반사됐을 때 훨씬 선명하고 날카로운 빛의 경계가 생긴다. 미나세의 대표 모델 Divido는 하나의 브레이슬릿을 연마하는 데만 무려 479단계의 공정을 거친다고 한다. 수작업 마감에만 15시간 이상이 소요될 정도로 정밀 가공된 조각 예술인 셈.
나오야 히다
시계 애호가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 하지만 일반 시계 시장에서는 아직 낯선 이름 나오야 히다. 첫 모델이 등장한 것은 2019년으로, 그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나오야 히다는 전 세계 시계 애호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단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과소평가되기엔 나오야 히다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특별하다는 의미다.
나오야 히다는 시계 디자인의 황금기를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라고 말한다. 스위스 전통 워치메이킹의 기술적 완성도와 미적 감각 모두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그의 창작은 단순히 그 시대의 시계를 복제하거나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전적 아름다움을 창작의 출발점으로 삼되, 그 시기의 정신과 균형미, 비례감을 오늘날의 정밀한 가공 기술과 결합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현대 기술로 완성한 고전의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나오야 히다 시계를 처음 본 이들은 대부분 다이얼에서 강한 인상을 받는다. 화려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절제된 디자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 디테일이 시선을 붙잡는다. 예를 들면, 실버 소재를 사용한 솔리드 플레이트에 손으로 직접 인덱스를 새겨 넣는 식. 인덱스와 숫자는 레이저나 프린트가 아닌 장인이 조각도로 한 획씩 새긴다. 그 결과는? 그저 ‘선명하다’는 수준을 넘어, 입체감과 질감이 마치 부조처럼 떠오르는 듯 하다.
Knot

2014년 도쿄 하라주쿠에서 시작된 knot은 일본 시계 시장에서 보기 드문 방향성을 지닌 브랜드다. 모토는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고품질 시계’. 장인의 기술과 디자인의 자유로움을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Knot의 철학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전통, 사람과 디자인을 잇는(knot) 시계다.
Knot의 가장 큰 매력은 나만의 시계를 만드는 즐거움에 있다. 모듈형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을 통해 시계 본체와 스트랩을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으며, 수십 가지 옵션 중 직접 선택할 수 있다. 단순 패션 아이템을 넘어, 시계가 나만의 취향을 반영한 하나의 창조적 경험이 되는 순간이다.

일본 각지 전통 공예와의 협업도 활발하다. 교토의 기모노 원단, 도치기의 가죽, 히로시마 데님 등 일본 지역성과 장인정신을 담은 스트랩이 인기. 단순한 부속품을 넘어, 시계 하나하나에 문화적 이야기를 더하는 역할을 한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디자인은 일상에서의 활용도를 높인다. 베이직한 원형 케이스, 선명한 다이얼, 군더더기 없는 핸즈 등 복잡한 디테일보다는 간결하고 정제된 균형감이 특징. 포멀과 캐주얼을 모두 아우르는 디자인으로, 합리적인 가격에 나만의 시계를 갖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