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두 시간짜리 영화를 만들기 위해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어마어마한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런 만큼 영화의 모든 요소는 치밀하게 계획되어야만 한다. 배우들의 시계 역시 의상이고 소품이다. 커스튬과 세트 피스에만 관여하는 팀이 있는 만큼, 주인공이 찬 시계도 그 캐릭터와 맞아떨어져야 하고 영화 속 세계관을 묘사하는 데 도움이 되진 못할지언정 절대 방해해선 안 된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주인공이 무슨 시계를 찰지는 원작 소설에서 명시될 경우도 있고, 감독이나 제작진이 정해줄 수도, 때론 배우의 개인적인 시계가 등장할 때도 있다. 물론 가끔은 PPL도 피해갈 수 없다. 오늘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시계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제임스 본드 시리즈 – 롤렉스 서브마리너, 오메가 씨마스터 외
당신이 ‘영화 속 시계’라는 말만 듣고도 떠올렸을 007. 제임스 본드 덕에 턱시도에 다이브 워치를 차는 게 정석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사실은 턱시도에는 아무것도 차지 않거나 드레스 워치를 차는 게 맞다. 다만 제임스 본드는 정장을 입고 있을 때도 임무를 수행 중인 특수요원이라 단단하고 기능적인 시계가 필요했을 뿐.
롱런한 시리즈인 만큼 수많은 시계가 본드의 손목 위를 거쳐 갔다. 그러나 원작 소설에서 거론되는 시계 브랜드는 오직 하나. 본드의 차를 단순히 ‘스포츠카’라고 하지 않고 애스턴 마틴이라고 명시해야만 적성이 풀리는 작가 이안 플레밍이 고른 본드의 시계는 바로 롤렉스다.
플레밍의 개인적인 시계는 롤렉스 익스플로러였고, 첫 본드인 숀 코너리는 서브마리너를 찼다. 그 후 본드는 롤렉스 외에도 세이코, 론진, 브라이틀링, 해밀턴, 태그호이어 등 여러 시계를 찼지만, 가장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히게 된 것은 아마 피어스 브로스넌 때부터의 오메가 씨마스터일 것이다. 이때부터 오메가의 PPL 잔치가 시작된다. 피어스 브로스넌과 현행 본드인 다니엘 크레이그의 씨마스터엔 특수 장치가 장착되어 있고, 레이저를 쏘고, 폭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드의 필살 무기는 총이 아니라 시계라고 생각될 만큼 단순한 시계 이상의 기능을 보여준다. 90년대 007을 보며 자라온 수많은 소년의 가슴에 불을 지르며. 근래에는 관객들의 다양한 취향에 모두 어필할 생각인지 다니엘 크레이그는 영화 한 편당 여러 오메가 시계들을 돌려가며 차기도 한다.
르망 (Le Mans, 1971) – 호이어 모나코
1970년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배우는 단연코 스티브 맥퀸이었다. 레이싱 영화 르망 촬영 전, 소품 담당자는 롤렉스, 오메가, 티쏘, 불로바, 그리고 호이어의 시계들을 쭉 늘어놓고는 맥퀸에게 맘에 드는 것을 고르게 했다. 맥퀸이 처음 고른 것은 오메가였으나, 소품 담당자가 보니 맥퀸이 입어야 할 레이싱복 의상 가슴팍에 떡하니 호이어 브랜드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호이어라고 쓰인 옷을 입고 정작 다른 시계를 차는 것도 이상하지,’ 라고 옆에 있던 조연 배우가 말했다. 어쩔 수 없이 호이어 쪽으로 다시 간 맥퀸이 고른 시계는 독특한 모양의 모나코. 그 당시 더 유명하고 레이싱 역사도 길었던 모델인 오타비아를 제치고 선택된 모나코는 이른바 ‘맥퀸 시계’로 등극하여 많은 남성들의 위시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아메리칸 사이코 (2000) – 롤렉스 데잇저스트
사이코패스와 연관 지어지고 싶은 브랜드는 없나 보다. 패트릭 베이트먼이 차는 시계가 원작 소설에는 롤렉스라고 명시되었지만, 롤렉스의 항의로 대본에서는 단순히 ‘시계’로 대체되었다.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핏대 세운 건 롤렉스뿐만이 아니었다. 돈 많고 허영심으로 똘똘 뭉친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인 만큼 원작 소설에서는 특히 명품 브랜드 언급이 많은데, 덕분에 제작진이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미국 브랜드였던 랄프 로렌과 캘빈 클라인은 등장 자체를 거부했고, 그에 비해 유럽 브랜드들은 조금 더 호의적이었다. 영국의 비비안 웨스트우드, 이탈리아의 세루티가 의상 대부분을 제공했다. 다만 주인공이 사람을 죽일 때는 입어선 안 된다는 조건으로. 시체를 옮겼던 가방은 꼼데가르송이 반대해서 장 폴 고티에가 대신했다.
아폴로 13 (1995), 퍼스트 맨 (2018) –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영화들이라 우주 비행사들의 손목에서 문워치가 보이지 않았다면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신뢰도가 떨어졌을 정도이다.
1963년, NASA는 우주 비행사들이 달에서 쓸 시계를 찾고 있었다. 정확한 용도는 밝히지 않은 채 열 군데 시계 브랜드에 연락했고, 그중 롤렉스, 오메가, 론진만이 NASA가 요구하는 기계적 사양에 맞는 후보를 제출했다. 학대에 가까운 NASA의 혹독한 열 가지 테스트를 모두 통과하고 채택된 것은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뿐이었고, 결국 1969년 아폴로 11호를 통해 인류 최초로 달에 간 ‘문워치’가 된다.
스피드마스터가 임무 중 직접적으로 비행사들의 목숨을 구하는 데 사용된 기록도 있다. 1970년, 아폴로 13호가 달을 향해 가던 중 산소 탱크가 폭발해 전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었다. 임무 중지 교신을 받은 아폴로 13호는 달에 착륙하지 않고 달의 중력을 이용해 지구로 방향을 바꾸었다. 로켓 엔진을 가동해 궤도를 바로잡아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생명 유지 장치와 통신 장비에 쓰기도 턱없이 부족한 전력. 전기로 작동하는 우주선 내부 장치들은 전부 먹통이거나 절전 상태였지만, 마침 손목시계는 기계식이었다. 휴스턴에 있는 NASA 관제 본부에서 마친 계산에 따라, 비행사들은 소중한 로켓 연료를 태우는 시간을 전부 스피드마스터의 크로노그래프로 측정했다. 아폴로 13호 승무원들이 무사히 지구로 복귀한 후, NASA에서는 오메가에게 영광의 ‘실버 스누피’ 메달을 수여했고, 어김없이 오메가는 스누피 한정판을 찍어냈다.
톰 행크스 주연의 ‘아폴로 13’은 제목 그대로 아폴로 13호 이야기를, 라이언 고슬링 주연의 ‘퍼스트 맨’은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이야기를 꽤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미 결말을 아는 상태에서 봐도 긴박하고 재밌는 영화들이다.
배트맨 비긴즈 (2005)-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
지금껏 소개한 시계들은 배우가 직접 고른 것도 있었고, 원작에 명시되었거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 그리고 간접광고의 손길이 닿은 것도 있었다. 이번엔 주인공의 내면과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잘 아는, 감독과 제작진이 정해준 시계다.
예거 르쿨트르의 대표적인 드레스 워치 모델로 자리 잡은 리베르소의 태생은 사실 스포츠 워치다. 1930년대, 폴로를 하다가 공에 맞아 시계 유리가 깨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다이얼을 뒤집어 놓을 수 있게 설계된 것이다. 물론 모델에 따라 뒷면에 또 다른 시계가 있는 것도 있다.
앞면만 봐도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에게 어울리는 고급 시계지만, 웨인처럼 숨기고 있는 다른 면이 있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시계 캐스팅이 있을까 싶다. 우연일까? 브루스 웨인이 몰던 람보르기니의 ‘무르시엘라고’는 스페인어로 박쥐란 뜻인 걸 보아, 절대 우연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