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계는 지금 시대에 다소 애매한 존재다. 클래식한 감성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아날로그 시계가 더 매력적으로 여겨질 테고, 실용성에 방점을 두는 사람들에게는 스마트워치가 훨씬 많은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클래식 시계보다 더 과거의 유산처럼 느껴지기도 할 정도. 그래서 카시오 데이터뱅크(Casio Databank)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은 호기심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디지털 기술이 막 일상에 녹아들던 시절의 낭만, 작은 시계 속에 미래를 담고자 했던 상상력으로 자리매김했던 그 시절의 카시오 데이터뱅크. 어느덧 4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상황 속에서, 데이터뱅크는 전과는 다른 의미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 그 작고 네모난 시계 안에 담긴 시간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시계에 전화번호를 담다
계산기가 중요한 게 아닌데
시작에 앞서 글 전반의 전제를 깔아두고자 한다. 카시오 데이터뱅크를 주제로 다루지만, 그 안에 카시오의 계산기 시계를 포괄하는 것으로. 사실 데이터뱅크와 계산기 시계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자 분리된 라인이다. 데이터뱅크 중에는 계산기 기능이 없는 모델도 더러 존재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경계가 무의미해질 정도로 계산기 디자인이 데이터뱅크의 대표 이미지가 되었다.

데이터뱅크의 핵심은 이름 그대로 ‘데이터’에 있다. 이를테면 전화번호나 일정, 메모와 같은 디지털 데이터를 저장하고 불러올 수 있는지가 데이터뱅크의 근본적인 정의에 가깝다. 손목 안에 온갖 디지털 기능을 가져다 놓은 스마트워치의 태동이자 청사진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데이터뱅크인 것이다. 오로지 수기로 된 기록에 의존하던 그 시절, 시계 속에 연락처를 담아둘 수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안 그래도 쿼츠 파동으로 침체한 기계식 시계에는 또 한 번의 악몽 같은 소식이기도 했다.
카시오 데이터뱅크가 최초로 정보를 저장한 시계일까? 그렇지는 않다. 세이코의 자회사 펄사(Pulsar)가 1982년 출시한 NL-C01이 이러한 방식의 첫 제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83년에 출시된 CD-40이 카시오가 처음으로 선보인 정보 저장 기능 시계. 그 외에도 세이코의 UC 시리즈, 시티즌의 보이스 메모(Voice Memo) 등 여러 브랜드에서 비슷한 시계를 선보였지만, 데이터뱅크의 인기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80년대에만 수백만 대가 판매되며 전 세계적으로 폭넓은 명성을 펼쳤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사용법, 출시 기준 40달러 내외의 저렴한 가격, 미래지향적이면서 깔끔한 디자인까지. 거기에 데이터뱅크의 인기에 불을 지른 결정적 요인이 있었으니, 바로 영화 <백 투 더 퓨처>다. 80년대 스타일의 상징과도 같은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의 손목에 채워진 계산기 시계 CA-50은, 마치 앞으로 나아가게 될 미래를 담은 집약체처럼 보였으니까. 덕분에 비슷한 형태인 데이터뱅크도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데이터뱅크의 변천사
기술 발전의 지표

데이터뱅크는 서둘러 발전의 걸음을 내딛는 시대에 맞춰 꾸준히 진화했다. 초창기 핵심 기능이었던 연락처 저장의 경우, 초기 모델은 보관할 수 있는 최대치가 10개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50개, 100개, 300개까지 확대됐다. 모델에 따라 스케줄과 비밀 메모 기능이 메모리 크기를 공유하기도 해서, 나만이 볼 수 있는 은밀한 정보도 수십 개씩 담고 다닐 수 있었다.
1987년 출시된 DBA-80에는 오디오에 기반해 전화를 거는 폰 다이얼러 기능이 추가됐다. 전화를 걸고자 할 때 이 기능을 실행하면, 저장해 둔 전화번호의 주파수 음이 출력된다. 시계를 수화기 가까이 대 소리를 인식시키면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번호가 입력되는 것이다. 한때 명탐정 코난에서 무리수로 조롱받았던 ‘목소리로 전화하기’도 이러한 원리에서 탄생한 장면이다.

1991년에 출시된 VDB-1000은 스마트워치에 훌쩍 가까워졌다. 데이터뱅크 라인 최초로 터치스크린을 탑재한 모델이기 때문. 버튼이나 용두 없이 손끝만으로 모든 작업이 가능했다. 1999년에 발매된 DBC-V50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약 30초간의 음성을 저장할 수 있었다. 별도의 녹음기를 들고 다녀야 했던 시대였기에, 음성 녹음 기능은 시계를 한층 기능적인 존재로 격상시켰다. 물론 원자시계 신호를 도입하는 등 정밀한 시간 측정이라는 본질 또한 놓치지 않았다.
데이터뱅크는 해마다 새로운 기능을 더하는 동시에, 기술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지속적으로 질문했다. 단순히 더 많은 기능을 담는 게 다가 아니었다. 그 기능이 손목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 어떻게 경험되는가에 대한 실험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스마트워치의 기능들이, 실은 이 작은 디지털시계 안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레트로의 아이콘이 되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카시오 데이터뱅크가 아무리 혁신적인 기능을 자랑했다고 한들, 지금 시대엔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연락처 저장도, 계산기도, 심지어 시간 확인조차 스마트폰 하나로 해결되는 세상. 시계 자체의 존재 의미마저 흔들리는 시대다. 그럼에도 데이터뱅크는 여전히 생산되고 있으며, 의외로 착용한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나곤 한다. 기묘한 이야기, 조커, 브레이킹 배드 등 미디어에서도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데이터뱅크가 지금까지 생존해 온 근간에는 ‘품질’이라는 한 단어가 있다. 웬만한 시계보다 얇고 가벼워 탁월한 착용감을 자랑하고, 10년은 거뜬히 버틸 만큼 내구성도 훌륭하다. 편의성도 장점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밴드를 사용하는 DBC-611의 경우, 도구 없이 홀더만으로 밴드 길이 조절이 가능해 시계방을 찾을 필요도 없다. 가격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큰 메리트다. 4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도, CA-53W는 여전히 3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금액으로 구매할 수 있다.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전한 인기의 결정적인 요인은 디자인 아니겠는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유니크한 실루엣으로 데이터뱅크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예전에는 신식 기술로 여겨졌던 계산기 기능이, 이제는 레트로 트렌드에 적격한 아날로그의 산실처럼 여겨진다. 하기야 복고 유행을 타기 위해 그 시절 감성을 흉내 내는 아이템과, 태생적으로 레트로 그 자체인 데이터뱅크가 품은 감성의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데이터뱅크의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기능성과 실용성을 극대화한 결과물이다. 버튼 배열, 각 잡힌 케이스, 명확한 디스플레이까지 모든 요소가 목적에 충실하다. 물론 계산기가 달린 시계라는 이유만으로 공대생 시계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처럼 기능이 형태를 지배하는 도구적인 아름다움은, 고프코어나 테크웨어처럼 실용을 미학으로 삼는 스타일과 찰떡. 의외로 캐주얼한 차림에도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다. 패션 아이템으로서도 활용도가 높은, 충분히 실용적인 존재인 셈이다.
희소성 높은 컬래버레이션
후지와라 히로시도 눈여겨봤다
카시오 데이터뱅크는 대중적 인기에 비해 협업이 잦은 시계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몇 안 되는 컬래버레이션 모델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패션 신의 거장인 후지와라 히로시와의 컬래버. 화면 백라이트에는 구 일렉트릭 코티지(Electric Cottage), 현 프라그먼트(Fragment)의 상징인 번개 로고가 들어가 있다. 그래픽은 우라하라 패션의 숨은 주역인 세븐스타즈 디자인(7STARS DESIGN)과 함께 진행했다고.

지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일본 스트리트 브랜드 맥대디(MACKDADDY). 2007년 당시 브랜드의 10주년을 기념하는 협업으로 카시오와 함께했다. DBC-32CM 모델에 강렬한 퍼플과 그린 컬러를 적용해 스트리트 감성을 녹여낸 게 특징. 유리 부분에는 맥대디 로고를 프린트했으며, 뒷면에는 ‘10th ANNIVERSARY’ 문구를 각인했다.

2025년에도 데이터뱅크의 컬래버는 현재진행형이다. 45주년을 맞이한 팩맨이 카시오를 만나 탄생한 이 시계는, 유쾌한 디자인과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로 순식간에 시간여행을 경험케 한다. 아케이드 게임기를 재현한 노란색 베젤, 팩맨이 미로를 달리는 모습이 담긴 키패드가 기존 데이터뱅크와는 또 다른 맛의 레트로를 구현해 낸다. 포장마저 그 시절 오락실 기계가 떠오르게끔 공을 들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데이터뱅크의 시간은 항상 어긋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전에는 미래의 기술을 담았고, 지금은 과거의 향수를 자아내니까. 그리고 그 간극이야말로 데이터뱅크의 존재감을 완성하는 핵심이다. 한때는 손목 위의 작은 컴퓨터로, 지금은 복고의 정수를 품은 스타일 아이템으로. 카시오 데이터뱅크의 시간은 여전히 어긋난 채 유유히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