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클래스가 후덜덜하기로 유명한 역사 고증 드라마들. 한 에피소드당 많게는 78억까지 들어갔다는데 이왕 매달 구독료 내면서 넷플릭스 멤버십 가입한 거, 이렇게 대대적인 투자로 공들여 제작한 작품 안 보면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다. 그 어마어마한 제작비에는 나의 기여도 미미하게나마 포함될 테니 말이다.
영국, 프랑스, 로마, 러시아, 독일 등 국가도 가지각색, 고대부터 중세, 현대까지 시대 배경도 다채롭게 대기 중이다. 고고함의 상징, 왕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훔쳐보는 재미는 또 어떻고. 역사가 반증하는 실화 기반 사건들의 자극과 수위, 스케일은 현대극이 따라가려 해도 결단코 따라잡을 수 없을만한 수준이니 학창 시절 암기만 가득한 역사 수업 떠올리며 ‘지루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은 접어두고 입장하시길.
더 크라운
영국 왕실을 배경으로 20세기 후반을 화려하게 장식한 주요 사건들,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음모와 사랑, 권모술수가 그대 앞에 펼쳐진다. 왕실과 총리 관저 사이에서 벌어지는 암투,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재위 중 벌어진 정치적 투기와 베트남 전쟁, 달 착륙 에피소드, 찰스와 카밀라 이야기 등 세계 역사의 지각을 형성한 굵직한 사건들까지. 더 크라운은 영국 역사와 현대사를 관통하는 웰메이드 역사 드라마다.
20세기 후반의 버킹엄 궁은 물론 실제 의상과 헤어스타일까지 거의 똑같이 재현해내느라 한 에피소드당 700만 달러 정도가 투입됐다니, 제작비만 들어도 어느 정도 스케일인지 감이 오지 않는가. 참고로 클레이 포이가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한 시즌 1~2는 골든 글로브, 에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기도 했었다. 실존 인물과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드라마라서 캐스팅된 배우와 실제 인물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더해서 일반인들로서는 가늠이 안 되는, 왕실의 내밀한 뒷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어서 더 흥미로운 관전이 될 것이다.
로마 제국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이 신비로고 강렬한 국가는 누가, 어떻게 건설한 것일까. 전쟁과 정복, 음모와 암살, 정치와 광기 위에 설립된 제국, 고대 로마가 되살아나고, 콤모두스, 카이사르, 칼리굴라 등 로마 제국을 호령했던 통치자들의 시대가 부활했다.
역사적 고증을 결합한 다큐멘터리 드라마임에도 19금 딱지가 붙은 이유는 실존했던 역사가 웬만한 픽션보다 더 잔인하고 자극적이며, 그런 면모까지도 충실하게 재현해냈기 때문에. 몰입감 있는 구성 덕에 킬링타임 드라마로도 제격이다. 피와 권력으로 얼룩진, 매혹적인 고대 로마의 맛을 느끼고 싶다면 주저 말고 감상해 보시길.
라스트 킹덤
영국이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9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마지막 왕국을 물려받은 알프레드. 잉글랜드의 핏줄로 바이킹 전사가 된 우트레드. 이들은 적인가, 동지인가. ‘데인족’이라 불리는 바이킹의 침략에 대항해 잉글랜드 왕국이 태동하던 이 시기에 두 남자의 운명이 맞물리기 시작한다.
영국의 역사소설가 버나드 콘웰의 소설 ‘색슨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중세 시대극으로 브리튼 섬에 있는 여러 왕국들과 바이킹의 전쟁, 왕국들 간의 배반과 동맹을 면밀하게 그려내는데. 일단 한번 시작하면 빠져들게 되는, 중세 덕후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에 별 관심 없었더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음화를 누르게 만드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또한, 시즌 별로 적어도 2~3번의 호화로운 대규모 전투씬이 등장하는데 실제 9세기 전투를 방불케 할 정도로 퀄리티가 역대급이니 기대해도 좋다.
베르사유
역사상 가장 호화로운 궁전, 베르사유는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서 바라보면 사랑과 권력을 향한 암투가 벌어지는 전쟁터이자 귀족들을 통제하기 위한 사치의 감옥이었다. 프랑스 절대 왕정의 확립을 위해 건축된 화려한 궁전 그 이면에 깔려있는 어둡고 섬뜩한 이야기들은 심장 쫄깃한 스릴을 선사하고. 그래서일까, 주인공 루이 14세와 그의 동생 필리프는 치명적인 퇴폐미와 함께 음침한 아우라, 살짝의 광기를 지니고 있다.
프랑스와 캐나다가 합작으로 제작한, 프랑스의 역사물임에도 영어권 배우들을 다수 캐스팅하고 대사 또한 영어로 제작됐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포인트. 프랑스 내 격렬한 비판은 피해 가지 못했으나, 흥행 몰이에는 성공해 시즌3까지 이어졌다. 가장 화려했던 시대를 재현한 만큼 어마어마한 투자가 들어갔는데, 회당 제작비가 260만 유로, 약 35억 원에 육박한다고.
실제 베르사유 궁전 휴관일에 맞춰 촬영을 진행했고, 디자이너 마들린 퐁텐이 중세 프랑스의 전통 의상 디자인을 맡았다. 더불어 당시 그려진 미술품과 베르사유의 정원, 귀족들의 화려한 파티 등 사치의 절정을 달리는 볼거리가 끊이질 않는다.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인들의 쟁투도 상당한 묘미. 프랑스판 여인천하가 따로 없다. 참고로 포르노 드라마라는 오명이 생길 만큼 살색 장면이 난무하므로 가족과 함께 시청하는 건 지양하시길.
마지막 차르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생과 사를 다룬 러시아 역사극. 다가오는 전쟁의 위협, 그리고 혁명의 기운. 세상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지만,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그 파도에 저항하려 한다. 권력을 지키고자, 헛되이 몸부림친다. 그러나 시대는 혼란 그 자체였고 황제는 무능했다.
그 시절 권력을 휘두르며 러시아 왕조의 몰락을 부추긴 핵심 요인, 라스푸틴의 이야기 또한 극의 몰입을 더하며 매우 흥미롭게 흘러간다. 실제 라스푸틴의 이야기로 만든 노래는 그의 악랄함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데 곁들여 감상해 봐도 좋을 듯. 영국, 프랑스와는 또 다른 러시아 특유의 분위기는 익숙하지 않아서, 낯설기 때문에 한결 신선하게 다가올 것이다.
바바리안
게르만 부족으로 태어났지만 고국을 떠나 제국의 시민으로 자란 로마군 지휘관 아르미니우스. 운명의 장난인 건지 그는 핏줄의 고향을 징벌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로마를 향한 충성심을 지킬 것인가, 부족을 택할 것인가. 고뇌 끝에 결정이 역사적인 전투로 이어지는데.
로마 제국, 라스트 킹덤과 함께 휘황찬란한 액션씬을 겸비한 독일 역사 드라마로 제작 국가 역시 이야기의 주체인 독일이다. 리얼리티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극 중 게르만족 캐릭터는 진짜 독일어를, 로마인 캐릭터는 라틴어를 사용하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아르미니우스를 중심으로 한 전형적인 영웅 드라마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두 가지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의 심리 갈등에 초점을 맞추는 중의적 연출이 이 작품을 더욱 세련되게 만드는 차별점 아닐까. 더군다나 똑같이 로마가 등장하지만, 앞서 소개한 로마 제국과는 달리 게르만족의 시각에서 역사를 해석했다는 점도 꽤나 흥미로운 시선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