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은 흑과 백뿐이었던 스크린에 색채를 더해 주었지만, 어쩐지 현실의 빛깔은 그 색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물질의 풍요로 달랠 수 없는 마음의 바래짐을 어루만져줄 무언가를 찾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 그 역할을 기꺼이 맡아 줄 현실과 필요의 대척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낭만이어라. 다채로운 일상을 위한 실마리가 될 누군가의 삶을 톺아보며, 그 이야기에 담긴 낭만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여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를 넘어 미국인의 마음속에 영원한 낭만으로 자리 잡은 인물이 있다. 그가 지금껏 사랑받는 이유는 배우로서 남긴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반세기에 걸친 애틋한 사랑부터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까지, 그가 걸어온 삶의 족적 하나하나에 묻어나는 낭만이야말로 진짜 이유일 것이다. 폴 뉴먼(Paul Newman), 그의 면면을 들여다보자.
시대를 풍미하다, 배우 폴 뉴먼
N1 덱 재킷에 담긴 청춘의 멋
폴 뉴먼이 데뷔한 195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반항아의 시대. 남자의 가슴을 들끓게 하는 날카로운 청춘에 모두가 빠져 있던 때였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은 말론 브란도와 제임스 딘이었지만, 못지않게 하나의 맥을 이룬 인물이 폴 뉴먼이다. 앞서 언급한 두 사람이 보다 원초적인 반항에 가까웠다면, 폴 뉴먼은 섬세하고 지적인 면모를 겸비한 또 다른 결의 반항아로 아이코닉을 완성했다.
그를 일약 스타덤에 앉게 해준 건 영화 ‘상처뿐인 영광(Somebody Up There Likes Me)’이었다. 작품을 맡게 된 배경도 극적이다. 주인공 역할로 캐스팅됐던 제임스 딘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폴 뉴먼이 그 배역을 대신하게 된 것. 그는 영화 속에서 미국의 복싱 영웅 록키 그라지아노가 되어 불안과 반항으로 가득한 젊은 날의 초상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를 제대로 담아낸 사진이 있었으니. 바로 상처뿐인 영광 촬영 현장에서 찍은 한 장의 비하인드컷이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삐딱한 모습은 그 시대 청년의 표상이나 다름없었다. 2008년에야 비로소 공개된 이 사진이 불어온 반향은 가히 대단했는데, 그가 착용한 재킷의 폭발적인 인기가 이를 증명한다.
값비싼 브랜드 로고도 화려한 디자인도 없는 옷의 정체는 다름 아닌 군복, N1 덱 재킷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N1 덱 재킷은 소수의 바이크족 정도만 알음알음 착용하던 비주류 패션이었다. 하지만 60여 년 전에 찍은 사진에 고스란히 담긴 폴 뉴먼의 멋에 21세기 남성들은 완전히 매료됐다. 이때부터 N1 덱 재킷은 남자다움을 나타내는 의상으로서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여느 시대의 아이콘이 그랬듯 폴 뉴먼도 한때 빛나다 사라질 줄 알았지만, 그는 눈을 감기 직전 해까지 연기 활동을 놓지 않았다. 말론 브란도의 그늘을 벗어나려 애썼던 그는 시간이 흘러 대중에게 더 오랫동안 사랑받은 배우로 기억된다. 폴 뉴먼은 스크린 속 퍼포먼스를 넘어 시대를 초월한 스타일 아이콘으로, 영원한 청춘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진짜 프로, 카레이서 폴 뉴먼
하나의 페르소나가 된 선글라스
뉴먼에게는 누구에게도 없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로 공인 레이스에서 우승한 최연장자 드라이버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그랑프리 소재 영화 ‘위닝(Winning)’의 주연을 맡은 계기로 레이싱에 빠진 그는 4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처음 트랙에 올랐다. 당시 얼마나 심취했는지 촬영에 필요한 모든 운전을 직접 하겠다고 고집했을 정도다.
남들이었다면 은퇴하고도 남을 연배에 첫 커리어를 시작한 그를 오해할 수도 있겠다. 톱배우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에 주목 받은 거 아니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처음에야 그 유명한 폴 뉴먼이 레이싱을 한다고 이목이 쏠렸지만, 점차 수많은 우승을 거머쥐며 연예인이 아닌 카레이서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을 살펴보면 유독 선글라스를 낀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취미를 넘어 프로로 활약했던 폴 뉴먼에게 선글라스는 액세서리를 넘어 생활 필수템. 경주에 참여할 때뿐만 아니라 외부 행사 자리에서도, 가족과 하이킹을 가도 선글라스는 빠지지 않는 단짝이었다. 짙은 남성미를 눈에 장착한 그를 선망해 마지않는 남성이 속출하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니겠는가.
사실 선글라스는 뉴먼에게 패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를 잘 보여주는 뉴욕타임스 기자의 말이 있다. “폴 뉴먼을 처음 만난다면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당신을 알아가면서 가끔 선글라스 테두리 너머를 들여다볼 것이다. 당신을 신뢰하게 되면 선글라스를 왼쪽 귀에 걸게 될 것이다. 다음에 만날 때는 안경을 벗을 것이다.”
뉴먼의 이름만큼이나 명성을 얻은 건 그의 푸른 눈이었다. 모두가 그 오묘한 색채에 흠뻑 빠져 있었지만 정작 그는 못마땅했다. 아무리 열심히 성과를 만들어도 돌아오는 말이 ‘눈 좀 보여달라’였으니 그럴 수밖에. 뉴먼은 그렇기에 더더욱 선글라스로 눈을 덮어 버렸다. 자신의 노력과 진가를 인정받기 위해 모두가 사랑하는 장점을 가려버리는 상남자 모먼트. 삶에 대한 그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순애보만 50년째, 애처가 폴 뉴먼
전설의 ‘폴 뉴먼 데이토나’ 주인공
2017년, 경매 시장을 뒤흔든 역대급 매물이 등장했다. 전 세계 언론과 수집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화제를 불러 모았고, 결국 200억 원이 넘는 경매 신기록까지 수립하게 된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비싼 시계라는 영예로운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던 모델. 바로 롤렉스 데이토나 Ref. 6239가 품은 비하인드 스토리다. 그리고 이 시계를 아는 모든 사람은 모델명 대신 이렇게 불렀다. ‘폴 뉴먼 데이토나’라고.
카레이서라면 시계에 관심을 가지는 게 인지상정. 뉴먼은 레이싱을 위한 크로노그래프 워치를 여럿 소장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Ref. 6239는 20여 년간 꾸준히 착용하며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모델이다. 그가 유독 이 시계를 애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래도 아내인 조앤 우드워드(Joanne Woodward)의 선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폴 뉴먼은 할리우드에서 소문난 애처가였으니 말이다.
시계가 품은 서사의 하이라이트는 시계 뒤편에 숨어 있다. 바로 케이스백에 새겨진 ‘운전 조심하세요(Drive Carefully Me)’라는 문구다. 뉴먼을 향한 애정 어린 마음이 오롯이 녹아든 간결한 글귀는 그들의 사랑을 완벽하게 함축했다. 국민 배우 폴 뉴먼의 애착 시계이면서 동시에 부부의 러브 스토리를 간직한 덕에 전무후무한 가치를 인정받는 시계가 된 것이다.
당시 할리우드는 짧은 결혼 생활이나 불륜처럼 사생활에 대한 잡음이 만연했던 곳이었다. 당장 말론 브란도만 해도 숱한 스캔들에 열 명이 넘는 자녀를 슬하에 뒀다. 그렇기에 50년 동안 조용히 결혼 생활을 이어간 폴 뉴먼이 두드러질 수밖에. 집에 스테이크가 있는데 뭐 하러 밖에서 햄버거를 먹냐는 그의 장난스러운 농담에는 아내에 대한 짙은 사랑이 묻어난다.
그렇다고 이들의 사랑이 동화처럼 완벽했던 것만은 아니다. 폴 뉴먼이 조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으니. 하지만 그는 이를 자신의 과오라고 분명하게 인정했으며,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들의 처음이 부적절했던 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후 뉴먼이 여생을 아내와 가족에게 헌신했다는 점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기부금만 몇천억, 자선가 폴 뉴먼
애용템은 회사 모자?
어느덧 3년 뒤면 폴 뉴먼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0주기. 그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질 법한 긴 시간이지만, 지금도 폴 뉴먼의 얼굴은 미국 사람에게 굉장히 친숙하다. 스크린에서 부단히 열일했던 미모 덕택도 있겠지만, 지금도 식품 라벨에서 꾸준히 얼굴을 비추고 있기 때문. 사후에까지 광고 모델을 하는 거냐고? 그럴 리가. 뉴먼의 얼굴이 떡 하니 붙은 제품을 생산하는 뉴먼스 오운(Newman’s Own)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설립한 식료품 회사다.
미식가이기도 했던 뉴먼은 본인의 특제 샐러드드레싱을 판매해 보고자 하는 생각으로 뉴먼스 오운을 시작했다. 이름과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혔으니, 그 명성에 힘입어 인기를 끄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이름값만으로 연명하는 회사나 제품의 생명은 짧기 마련. 그의 회사는 좋은 품질을 기반으로 스파게티 소스, 팝콘, 쿠키 등 다양한 제품군을 선보였고,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다.
뉴먼이 탁월한 사업가라는 점이 우리의 낭만에 귀감이 되지는 않을 터. 뉴먼스 오운의 특이점은 모든 수익금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는 것이다. 부의 재분배를 위한 사회적 활동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두는 뉴먼스 오운은 지금껏 6억 달러, 환산하면 8,700억 원에 달하는 어마무시한 금액을 자선 활동에 보탰다.
이러한 폴 뉴먼의 행적은 그의 평소 복장에서도 엿볼 수 있다. 소더비에서 1,300만 원에 가까운 금액에 낙찰된 그의 모자 컬렉션을 보자. 뉴먼스 오운뿐만 아니라 ‘홀 인 더 월 갱(Hole in the Wall Gang)’의 로고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역시 폴 뉴먼이 난치병 환아를 위해 설립한 아동 기구다. 검소한 면모를 비롯해 얼마나 자선 활동에 적극적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가 아이들을 위해 헌신한 배경에는 가슴 아픈 개인사가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아들인 스콧 뉴먼(Scott Newman)이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약물 및 알코올 남용으로 사망한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을 겪은 뉴먼은, 그 아픔을 딛고 청소년 약물 오남용 예방 재단인 ‘스콧 뉴먼 센터’를 설립했다. 자신이 겪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는 삶의 나침반이 되어 뉴먼스 오운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폴 뉴먼은 자신의 유명세를 절대 과시하지 않았다. 외려 평생을 ‘폴 뉴먼’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자신의 페르소나와 가능한 한 먼 배역을 찾았고, 평범한 남편이자 아버지의 역할에 충실했으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누구보다 더 힘썼다. 뉴먼이 세상을 떠난 날, 웨스트포드 마을 사람들은 훌륭한 이웃이었던 그를 일제히 추모했다. 폴 뉴먼이 보여준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삶의 가치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