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지닌 두뇌 게임이, 이제는 시대를 앞서가는 가장 세련된 취미로 각광받고 있다. 고요와 적막만이 감돌던 체스 모임에 감각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체스판과 기물만이 전부였던 테이블 한편에 맥주가 놓인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서울에서도 이런 모임이 열리고 있으니까.
해방촌의 한 공간.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낯선 사람들이 마주 앉는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어색함보다 웃음이 먼저다. 같은 공간, 같은 체스판이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저녁을 보내는 사람들. 이 익숙지 않은 풍경을 서울에 처음으로 가져온 곳이 바로 서울체스클럽이다. 흐름을 견인하는 이 모임에 에디터가 직접 참여해 김승현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체스가 달라졌어요
고루하던 과거는 뒤로 하고

서 있는 사람들 중 감히 속삭이려 드는 사람도, 체스판을 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모두들 긴장해서 젊은이와 그의 손,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 가장자리에 벌써 희미한 승리의 미소가 보이지 않는가? 중대한 결심을 알리는 콧날의 가벼운 씰룩거림이 눈에 띄지 않는가? 다음 수는 무엇일까? 대가는 어떤 치명적인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 파트리크 쥐스킨트 <승부> 중에서
룩셈부르크의 한 정자에서 벌어진 두 남자의 체스 대국을 그린 이 구절은, 지금껏 체스가 어떤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구경하는 사람조차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는 엄격하고 진지한 공기. 상대의 가벼운 표정 변화조차 놓치지 않는 치열한 몰입의 시간.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체스는 유희를 위한 게임이라기보다는 혈투에 가까운 두뇌 싸움의 현장에 가까웠다.
그런데, 체스계에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체스를 즐기는 방식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이다. 게임 중에 가볍게 맥주나 와인을 곁들이고, DJ의 선곡에 맞춰 몸을 가볍게 흔들며 기물을 옮긴다. ‘대국 중 불필요한 대화 금지’라는 오리지널 룰 또한 없다. 오히려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이것이 LA와 런던, 베를린 등 트렌드를 견인하는 도시에서 활발히 열리고 있는 체스 소셜링 클럽의 모습. 불과 2, 3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체스가 ‘너드’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 또한 옛날이야기. 2025년 10월 미국에서 열린 페이 웹스터의 초청 토너먼트는 그 결정적 순간이었다. 에리카 드 카시에, 라이오넬 보이스 등 화려한 라인업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띈 건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였다. 2025년 애플뮤직 올해의 아티스트인 그가 체스판 앞에서 보여준 몰입은, 체스가 2030 세대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문화 콘텐츠로 다가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서울의 유일한 체스 소셜링 클럽, 서울체스클럽. 이를 이끄는 김승현 대표는 이 사실에 대해 쑥스러움과 부담을 내비쳤지만, 그와 별개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3월 18일 해방촌 댕크야드에서 열린 모임에 방문한 한 참가자는 “다른 클럽이 체스에만 집중하는 데 비해 훨씬 가볍게 게임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라며 “체스도 하고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무이하다”라고 언급했다. 그가 근 3개월 동안 대여섯 번의 주말을 모임에 할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커뮤니티를 지향하다
어쩌면 체스보다 중요한 것
서울체스클럽은 김승현 대표의 두 가지 경험이 맞물린 지점에서 시작됐다. 해외 생활을 하며 외로움 속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그는 항상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바랐다. 그러던 중 방문한 곳이 바로 LA 체스 클럽. 유년 시절 잠시 체스를 배웠던 기억을 더듬으며 보낸 커뮤니티에서의 시간은, 그에게 있어 무척이나 와닿는 경험으로 남았다. 그토록 원했던 연결의 실마리를 찾은 듯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잠시 방황하던 시기에 떠난 핀란드 여행은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그는 거리를 걸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생각하는 행복은 뭔지, 행복한 사람의 조건은 어떤 건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던 김승현 대표에게는 이에 대한 답변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대부분 비슷하게 말하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고, 안전한 커뮤니티에 소속되어 있는 것. 그게 핀란드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었어요. 본인이 속한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강조하더라고요. 해외 생활을 하면서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던 차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국으로 돌아가서 이를 실현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어요.”
서울체스클럽에는 모임마다 적게는 20~30명, 많으면 70~80명 정도가 참석한다. 창설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이뤄낸 성과다. 기존 체스 유저에게는 새로운 체스 커뮤니티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운 일이었기 때문에, 초반에는 이들이 모임의 다수를 이뤘다. 그러다 차츰 체스를 매개로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신선한 공간이라는 입소문이 돌면서, 실력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클럽을 찾았다.

재방문율이 높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서울체스클럽은 회원제가 아닌 매회 개별 신청을 통해 운영되므로, 연속성을 띤 정기 모임과는 성격이 다르다. 어찌 보면 사람 간 끈끈한 유대를 형성하기 쉽지 않은 느슨한 연결 구조인 셈. 그럼에도 사람들은 몇 번이고 다시 모임을 방문했고, 자주 보는 얼굴이 생기면서 일종의 연대가 형성됐다. ‘체스 클럽 오면 볼 수 있는 친구’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공식적인 뒤풀이는 마련되지 않지만,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자리를 갖는 일도 흔하다.
김승현 대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연결’이다. 아무리 체스가 마이너한 취미라 한들, 엄연히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함께하는 게임이다. 체스를 두면서 편하게 상대방을 알아가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면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 고립과 단절이 익숙한 세태 속에서 서울체스클럽은 조금 다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우리는 왜 체스를 해야 하는가
체스판에는 사유가 있다
이들이 유대감을 강조한다고 해서 체스를 단순히 친목을 위한 도구로만 치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울체스클럽은 체스를 둘 사람을 모집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체스를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실행한다. 달마다 열리는 입문자 클래스, 체스 토너먼트, 스피드 체스 등 초심자부터 실력자까지 다양한 감각으로 체스를 즐길 수 있는 자리를 꾸준히 마련하고 있다.
모임에 나와 체스를 두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지각색이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비교적 편하게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체스 타이머까지 사용하며 진지하게 대국에 임하는 이들도 있다. 보통 두세 판 정도 간격으로 상대를 바꿔가며 진행되기 때문에, 한 번의 모임을 나가더라도 여러 형태의 체스를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도 많은 사람이 체스에 빠진 이유는 뭘까? 김 대표는 체스의 매력을 ‘사유하는 힘’으로 정의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 환경 속에서, 사회 구성원은 원하든 원치 않든 지나치게 많은 정보에 노출된다. 하지만 오프라인 체스판에는 AI도, 숏폼도 없다. 한 수 한 수를 곱씹고 되돌아보며 나 자신에게, 본인의 생각에 또렷하게 집중하는 순간.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분리되는 디톡스의 시간이 체스의 강점이다.
“한 번은 저한테 이런 말을 해주신 분이 있었어요. 휴대폰 없이 이렇게 시간을 오래 보낼 수 있는 게 신기하다고요. 저도 사실 인지하지 못한 부분이었거든요. 집에 있거나 일상을 보낼 때는 휴대폰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클럽에 나오면 적어도 체스를 둘 때만큼은 휴대폰을 안 보게 되니까, 디지털의 피로함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거죠.”

체스가 정신 건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연구를 통해 입증되기도 했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낮춰 심적 안정을 선사하고, 현대인의 고질적인 문제인 집중력 부족을 눈에 띄게 개선한다. 도박과 알코올 중독으로 무너져가던 인도의 마을 마로티찰을 되살린 건 무엇도 아닌 체스였다. 체스가 전하는 힘은 서울체스클럽을 찾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조용히 확인된다.
서울체스클럽의 모습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
주에 1~2회 열리는 서울체스클럽의 모임은 매 회차 다채로운 형태로 변모한다. 어느 날은 체스뿐만 아니라 다른 보드게임이 곁들여지고, 또 어느 날은 누자베스의 음악이 그날의 테마로 얹어진다. 소셜링에 초점을 맞추기도, 완전히 체스에 집중하기도 한다. 에디터가 방문한 날에는 ‘인터내셔널 체스 나잇’이 열렸다. 다양한 국적이 한자리에 모여 체스를 두는 풍경은 생경하면서도 반가운 장면이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하면 스티커를 받아 옷에 붙인다. 참가자의 체스 실력을 구분하기 위함이다. 마련된 체스판에 자리를 잡으면, 차례차례 오는 참가자들이 맞은편을 채운다. 꼭 비슷한 수준끼리만 게임하게 되지는 않는다. 실력의 격차가 큰 사람끼리 붙는 경우도 왕왕 볼 수 있었는데, 능숙한 이들은 하나같이 상대방에게 따뜻한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잘하든 못하든 거리낌없이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 덕분에 처음 걸음한 사람도 부담이 덜하다.

공간은 왁자지껄하다가도 한순간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누군가는 체스판이 아닌 상대방에게 시선이 가 있었고, 또 누군가는 이마를 짚으며 다음 수를 고뇌하고 있었다. 영어와 한국어가 자연스럽게 오갔다. 맥주는 훌륭했고, 빈티지 스피커에서는 느낌 기분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운영진이 신중을 기해 장소를 선정한 이유를 여실히 느낄 정도로 공간과 모임은 조화를 이뤘다.
체스라곤 룰 정도만 아는 에디터도 승부에 참여했다. 혹여 민폐가 될까 연거푸 미안함을 표했는데, 상대방은 본인도 몇 년 만에 한다며 아무렇지 않아 했다. 매 수마다 헤맸다. 퀸을 잡을 수 있는 상황에서 요상한 수를 두는 바람에 서로 웃음보가 터지기도 했다. 결과는 당연히 패배. 그럼에도 즐거웠다. 때로는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예정된 마무리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람들은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운영진은 가게에 양해를 구하고 1시간을 연장했다. 먼저 일어나는 참여자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게임을 마무리하며 상대방에게 다음을 기약했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막지 않는 자유분방함 속에서 유대와 연대는 그렇게 찬찬히 피어나고 있었다.
서울체스클럽은 활동 범위를 차츰 넓혀가는 중이다. 다가오는 5월에는 런던의 대형 체스클럽인 나이트 클럽(Knight Club)과의 협업이 예정돼 있다. 김승현 대표의 바람은 명확하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건전한 취미로서 체스가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 사람과 문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부담 없이 올 수 있는 커뮤니티로 자리 잡는 것. 그가 그려나가고자 하는 소박한 듯 원대한 그림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