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Jeep)‘는 어느덧 투박하고 각진 4륜구동의 SUV 차량을 일컫는 하나의 대명사가 됐다. 이 알파벳 네 글자가 갖는 이름의 무게는 과연 어떤 세월을 거쳐 왔을까. 전쟁에 뿌리를 둔 풍부하고 인상적인 역사의 브랜드, 진짜 지프를 소개한다.
전장의 자부심
지프의 이야기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미군은 전시 운송을 위한 경량정찰차랑(LRV)이 매우 필요함을 깨달았다. 미군의 요청을 받은 100여 개의 자동차 제조사들은 각자의 제안서를 보냈다.
당초 미군은 프리랜서 자동차 디자이너인 칼 프로스트가 설계한 시제품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 차량은 크고 강력하며 튼튼했지만, 전쟁 상황에서의 수행 능력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그에 따라 미군은 포드(Ford)와 윌리스-오버랜드(Willys-Overland, 이하 윌리스)에 프로스트의 시제품을 기반으로 재해석한 차량의 설계를 요청했다.
윌리스가 내놓은 결과물인 윌리스 쿼드는 지금의 미 국방부인 당시 미 전쟁부로부터 핵심 사양이었던 강력한 엔진 출력에 대한 찬사를 받았다. 뒤이어 강도 높은 테스트 과정이 이어졌다. 결국 미군은 윌리스와 계약을 체결했고, 이후 경량정찰차량에 대한 수요가 더욱 증가함에 따라 포드와도 계약을 맺게 된다.
이들의 인기와 효용성은 시작부터 분명했다. 차량은 강력하고 터프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고, 험난한 지형에서도 쉬운 조작이 가능했으며, 가끔 예기치 못한 장애물 사이에 끼어버리는 상황에서도 병사들이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관총을 비롯한 여러 무기도 쉽게 장착할 수 있었다. 부상병을 수송했던 윌리스 쿼드는 거친 물살을 가르며 질주했고, 중요한 의약품과 탄약, 식량과 같은 필수 물자들을 운반했다.
지프는 육군이 도입한 가장 작은 차량이었지만, 성능 하나만큼은 그 어떤 차량에도 뒤지지 않았다. 한 번에 최대 5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고, 심지어 에어 글라이더로 들어 올린 후 낙하산을 이용해 이동시킬 수도 있었다. 이는 전쟁이 그 어떤 험난한 조건 속에서도 군사들의 다양한 니즈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차량의 능력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켰다. 전쟁 기간에 두 회사가 디자인한 지프만 무려 64만 대에 달했다.
민수용으로의 전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윌리스는 전쟁뿐 아니라 일반 자동차 시장에서도 지프가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당시 윌리스 MB로 알려진 쿼드를 기반으로 쿠션 시트와 프레임, 서스펜션, 헤드라이트를 보강하고 뒷문을 달아 원래의 디자인에 수정을 더했다. 그 결과 1,090달러의 놀라운 가격표를 달고 모든 사람이 쉽게 몰 수 있는 현대화된 차량, CJ-21이 탄생했다.
이를 기점으로 윌리스는 다른 여러 모델의 제작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중 하나는 CJ-5였는데, 이 제품은 4기통과 6기통의 두 가지 모델로 판매됐다. 한편 이들은 윌리스 스테이션 왜건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1946년식 차량은 철강으로만 만들어진 최초의 스테이션 왜건이기도 했다. 비록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이 차량을 구입한 사람들은 매우 충성스러운 고객이었고, 이들은 계속해서 명성을 쌓아 나갔다.
스타일 업그레이드
1980년대 중반에 이르자 일상생활과 오프로드에 적합하면서도 더욱 사용이 손쉽고 편안한 지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그리고 1986년, 기존 CJ의 자리는 YJ 랭글러(Wrangler)가 대체하게 된다. 이 모델의 독특한 직사각형 헤드라이트는 당시 기준에서 상당히 현대적인 요소였으며, 엔진 트림도 4기통과 6기통 버전 중에서 선택하여 구매할 수 있었다.
YJ 랭글러는 섹시하면서도 스포티한 느낌을 풍겼고, 90년대 말 TJ 랭글러가 등장하기 전까지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2세대 모델인 TJ 랭글러는 직사각형이 아닌 둥근 라이트로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2003년에는 랭글러 루비콘(Rubicon)이, 2004년에는 랭글러 언리미티드(Unlimited)가, 2005년에는 언리미티드 루비콘(Unlimited Rubicon)이 출시되었다. 이후 2007년형 랭글러가 출시되며 상황도 크게 변한다. 이 최신 모델은 한 번에 최대 5명이 탑승할 수 있었고, 짐을 싣기 위한 공간은 이전보다 더 넓어졌으며, 문도 4개나 달려있었다. 물론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과 튼튼한 구조도 놓치지 않았다.
형제 모델들
하지만 지프를 이토록 유명하게 만든 것은 랭글러만이 아니었다. 지프는 70년대에 SJ 체로키(Cherokee)를 출시한다. 물론 체로키는 오늘날의 운전자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지만, 최초의 체로키는 사실 스테이션 왜건에 더 가까웠다. 실제로 이 모델은 60년대에 출시된 지프의 왜거니어 스테이션 왜건(Wagoneer station wagon)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기도 했다.
투도어 스타일은 기존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샀고, 결국 84년, XJ 체로키가 태어났다. 당시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SUV)’이라는 용어는 그리 잘 알려진 편이 아니었는데, 지프는 이들을 ‘스포츠 왜건’으로 소개했다. 스테이션 왜건과 SUV의 만남은 독특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콤팩트하고 가벼우며, 동시에 다양한 상황에서도 비교적 쉽게 운행할 수 있는 민첩함을 갖춘 혁신적인 차량이었다.
1993년, 모두의 찬사를 받으며 그랜드 체로키가 첫선을 보였다. 이 모델은 운전석의 표준 에어백과 오류 발생 시 매번 피드백을 제공하는 계기판, 그리고 선글라스 및 열쇠를 보관할 수 있는 오버헤드 콘솔 등 편의성을 대폭 키워 당시 출시되었던 SUV 모델들과의 경쟁 속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걸어가면서 시동을 걸 수 있는 키리스 엔트리 시스템(keyless entry system)도 돋보이는 옵션 중 하나였다.
지프는 2000년대 전반에 걸쳐 기존의 모델과는 다른, 지금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여러 차량들을 내놓기도 했다. 그중 체로키와는 달리 곡선의 실루엣으로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지녔던 2002년의 지프 리버티(Liberty) 같은 차량도 있었는데, 해당 모델은 2007년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외에도 그랜드 체로키에 몇 개의 좌석이 더 추가된 2006년의 커맨더(Commander)가 있었다.
콤팩트한 사이즈를 내세우며 선보였던 2007년의 컴패스(Compass)는 사실 지프에게는 극적인 실패작이었다. 4륜구동이었던 이 모델의 트렁크는 대부분의 SUV보다 작았다. 같은 해에 패트리어트(Patriot)가 출시되기도 했지만, 조금 더 넓어진 트렁크를 제외하면 컴패스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연비도 별로 좋지 않았고, 오프로드 주행 성능마저 취약했다.
문화 아이콘
아이코닉한 차량들이 그래왔듯이, 지프 역시 대중문화의 역사에도 여러 번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티라노 사우르스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던 지프 랭글러 사하라 트렉(Sahara’s trek)이었다. 또한 항상 CJ-5를 비췄던 미녀 삼총사도 빼놓을 수 없다. 지프 체로키 역시 ‘구니스’, ‘트위스터’, ‘분노의 질주: 더 세븐’ 등의 영화에 모습을 비췄고, 심지어 분노의 질주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까지 했다.
지프는 유명인사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차량이기도 하다. 르브론 제임스의 차량 컬렉션에는 랭글러가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데이비드 베컴은 랭글러 언리미티드를 타고 다닌다. 어마어마한 차량 컬렉션으로 유명한 랄프 로렌은 1948년식 랭글러, 1976년식 CJ-5 같은 고풍스러운 클래식카 마니아이기도 하다.
가장 충성스러운 팬 중 한 명으로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40년대에 육군 예비역으로 복무하면서 첫 지프를 갖게 됐다. 이때부터 시작된 그의 지프 사랑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실제로 그가 몰았던 CJ-8 스크램블러 레니게이드(Scrambler Renegade)는 ‘Gipper’ 번호판을 달고 산타 바바라의 레이건 렌치 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이름의 유래
그래서 도대체 지프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수십 년 동안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여러 이야기가 난무한다. 그중 하나는 E.C. Segar의 만화 속 주인공인 뽀빠이와 연관되어 있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프의 이름은 뽀빠이 속 애완동물인 유진 더 지프(Eugene the Jeep)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이 강아지와 고양이 사이 어딘가쯤에 위치한 캐릭터는 지프의 자동차들이 그러했듯이, 무엇이든 거뜬히 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외에도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도 있다. 전시에 제작된 포드의 자동차인 GP에 대해 많은 사람은 이것이 ‘General Purpose’의 첫 글자를 딴 것이라고 믿지만, 공식적인 내용에 따르면 ‘G’는 정부(government)를 뜻하고, ‘P’는 정찰차량의 분류를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GP를 읽다 보면 ‘Jeep’로 발음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지프’라는 용어는 30년대의 트렉터와 40년대의 군함, 폭격기를 지칭하는 데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지프가 ‘충분한 필수 요소들(Just Enough Essential Parts)’의 약자라는 이론에 신빙성을 더해줬다. 사실 이 이야기조차도 결국은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지프의 뜻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바로 지프라는 브랜드가 곧 한 국가의 문화를 구성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지프는 그들의 풍부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가장 사랑받는 자동차 브랜드로 성장하게 되었다.
Edited by 조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