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를 통해 피사체를 바라보고, 작은 기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셔터를 누르게 되는 카메라의 매력은 영화라는 장르를 만나면 배가 된다. ‘영화 속 카메라 이야기(1)’에 이은 두 번째 리스트를 보며 당신도 누군가와 같은 시간에 멎어 있는 몽환적인 기분을 느껴보시길.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 : 니콘 F3/T
맨몸으로 바다를 가르고, 사막의 모래알로 집을 짓고, 꿈속에서 만났던 당신과 내일 아침 눈인 사를 건네는 이런 상상. 오늘도 별일 없이 사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폐간을 앞둔 잡지 ‘라이프’에서 16년간 네거 필름 담당자로 일하는 월터 미티 또한 이 무한한 세계 속을 누비며 빌딩을 뚫고, 롱보드로 질주하며, 흠모했던 그녀와 오랜 사랑을 한다.
하지만 그에게 이 허구의 공간을 찢고 나올 기회가 주어진다. 유명 사진작가 숀 오코넬(숀 펜)이 그에게 보낸 25번 필름 사진에 삶의 정수가 담겨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표지에 사용해야 할 그 컷은 보이지 않는다. 월터는 필름의 행방을 알기 위해 여정을 시작하고, 그의 삶은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우여곡절 곡절 끝에 만난 숀 오코넬이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고 그저 그 순간에 머물고 싶을 뿐”이라는 명대사 내뱉으며 설원 위에 세워둔 카메라가 바로 니콘 F3/T다. F 시리즈는 니콘 플래그십 라인으로 그중 F3은 1980년부터 2000년까지, 꽤 오랜 시간 출시된 SLR 카메라다.
바디는 폭스바겐 골프, 부가티, 피아트, 포니 등 수려한 실루엣을 탄생시킨 조르제토 주지아로 (Giorgetto Giugiaro)가 디자인했고, 이 모델부터 니콘의 상징이 된 빨간 줄이 적용됐다는 사실. 뒤에 T가 붙은 이유는 바디에 티타늄 소재를 사용한 1982년 발매된 한정판 모델이라서다. 1984년에는 외장을 검은색으로 마감한 모델도 출시된 바 있다.
브랜드 최초 플래그십 모델에 TTL 측광 방식을 적용했고, 전자제어식 셔터를 도입해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전자 제어식 셔터의 최대 지원 스피드는 1/2000이지만, 배터리가 없을 때는 기계식 셔터로 작동하여 1/60의 속도로 촬영할 수 있다. T, B모드를 지원하여 잘만 사용하면 힙하기 그지없는 다중 노출도 사용 가능. 크기는 약 148.5 x 96.5 x 65.5mm, 무게는 약 740g 정도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2006) : 라이카 M6 Non TTL
보석보다 빛나는 아이들의 영혼을 갈아 넣은 다이아몬드의 채취 배경을 알게 된다면, 아마 영원을 말하며 이 보석을 건네기 쉽지 않을 수 있다.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을 두고 정부군과 반군은 무려 12년간 내전을 벌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지원금은 바로 이 다이아몬드를 판 돈으로 행해졌다.
이 싸움에서 희생되는 건 언제나 그랬듯 무고한 국민들, 특히 반군 측은 그들의 손과 발을 자르거나 마약을 이용해 아이들도 살인에 가담시키는 등 악행을 자행했다. 무자비한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한 ‘블러드 다이아몬드’ 속에서 이런 현실을 알리고자 카메라를 든 기자 매디 보웬 역 제니포 코넬 리가 셔터를 누른 카메라는 라이카 M6 Non TTL이다. RF 카메라는 소음이 적고, 블랙 아웃 현상이 없어 과거 스트리트 포토나 프레스용으로 널리 사용되었기에 적절한 소품으로 보인다.
라이카 M6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1984년부터 1999년까지 생산된 Non TTL과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나왔던 TTL이다. 외관과 성능 변화 탓에 Non TTL은 또다시 초기 버전을 클래식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크게는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Non TTL과 TTL은 같은 이름을 공유하지만 다른 지점이 있다. 일단 TTL이 바디 높이가 2mm 정도 높다. 아울러 셔터 다이얼의 크기도 더욱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은 Non TTL 외관을 더욱 예쁘다고 칭하기도.
배터리 필요 없는 기계식 셔터로 셔터 스피드는 1/1000초까지 지원한다. 크기는 138 x 77 x 33.5mm, 무게는 585g. 빨간 딱지가 처음 올라앉은 최초 제품이 M6인 만큼 의미 있는 모델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영화 ‘클로저’에서는 TTL 버전이 나와 구매 욕구 솟아 가슴을 뛰게 했고, 바로 위에서 소개한 장면 중 숀 펜 옆에 내려앉은 제품 또한 M6이다.
캐롤 (2016) : 아거스 C3
영화 ‘캐롤’은 두 여자가 나눈 사랑을 어루만지기 전,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용기에 대해 말하고 싶다. 때는 1950년대 뉴욕, 백화점 장난감 코너 직원 테레즈와 손님으로 들른 캐롤은 거의 모든 사랑의 시작이 그러하듯 스치는 눈빛에서 이미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결국 남편과 이혼을 원하는 캐롤은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지키고 싶은 딸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라 선언했고, 테레즈 또한 알맹이 없는 남자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테레즈는 줄곧 사물만 찍다가 캐롤을 만나고 그녀의 모습을 담는다. 그때 사용하는 카메라가 아거스 C3이다. 아거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눈이 100개 달린 거인의 이름인데, 절대 잠들지 않는 이 괴물의 특성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항상 감각을 깨우고 있으라는 의미처럼 느껴진다.
이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의 별명은 벽돌. 그도 그럴 것이 벽돌을 연상케 하는 네모반듯한 디자인에 크기는 물론 무게도 어마어마하다. 1939년부터 1966년까지 약 200만 대가 생산됐고, 시대적 배경처럼 1950년대 미국인들의 많은 선택을 받은 제품이라고. 일본에서는 도시락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기본 Cintar f3.5/50mm 렌즈가 장착되어 있지만, 렌즈 교환식 카메라다. 셔터 스피드는 B, 1/8~1/300초를 지원한다.
크기는 약 130 x 68 x 46mm, 무게는 769g 정도로 실제로 들어보면 이 묵직함이 깊게 전해져 올 거다. 캐롤이 이 카메라를 들어보고 놀랐나, 영화 중반부 테레사에게 캐논 신상 카메라를 선물해 주는 장면이 나온다.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과 ‘월드 오브 투모로우’ 등 다른 영화에도 등장했고, 빈티지한 디자인은 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빛을 발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