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은 분명 낭만적이고 설레는 단어지만, 정작 고르는 일은 글쎄. 약간의 즐거움과 고도의 피로함이 동반되는 일 아닐까.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선물 아이템, 향수만 봐도 그렇다. 포털에 뜨는 ‘베스트 향수’로 어느 정도 리스크는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것은 너무도 순진한 발상.
사람마다 각각 다른 취향의 이상형을 갖고 있듯, 이상적인 향수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수백 개의 브랜드, 수만 가지 옵션 앞에서 정답을 찾기란 미션 임파서블 수준. 인터넷에 떠도는 인기 향수 리스트가 아니라 맞춤형 향수 큐레이션이 절박한 이유다. 그래서 준비했다. 그녀의 인생향수로 안내해 줄 가이드, 노선 벗어나지 말고 잘 따라만 와 주길.
시트러스와 우디의 밸런스가 이 향수의 묘미. 블랙베리로 물든 입술, 끈적해진 손의 이미지가 그려지도록, 이제 막 수확한 월계수 잎의 신선함에 톡 쏘는 블랙베리 과즙을 가미했다는 제작 의도와 딱 들어맞는다. 실제로 시향해보면 제품 소개와는 동떨어져 기대를 무너뜨리는 향들이 태반인데 이건 진짜다. 생기발랄한 혹은 소녀스런 이미지에도 잘 맞지만, 우디 노트가 있어 세련된 인상에도 어울리는 향기.
우디하면서 스파이시한 중성적 느낌. 유자의 시트러스로 시작해 베티버와 바질, 클로버 등 풀 향으로 마무리된다. 무성한 풀밭에 한그루 유자나무가 있고 그사이를 거닐 때 날 것 같은 그런 향. 우디 계열을 선호하고, 바질향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이에게 추천한다. 자연스럽지만 개성이 강한 이유로 호불호가 갈릴 듯. 짙은 화장보단 투명 메이크업을 선호하고 정장보단 편안한 룩을 즐겨 입는 그녀에게 선물하자.
캘리포니아의 여름 햇살로부터 시작된 향기. 상큼달달한 귤 향의 오프닝은 사랑스럽고, 조금 지나면 크리미하면서 상쾌한 잔향이 슬며시 올라온다. 향의 기원은 여름이지만 왠지 모르게 겨울에도 어울리는 이유는 깨끗하고 포근한 눈밭과도 닮아있기 때문에. 가수 옹성우의 향수로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귀엽고 다정다감한 스타일에 찰떡. 그러나 터프하거나 쌘캐만 아니라면 두루두루 잘 어울릴 향이다.
에르메스 운 자르뎅 시리즈의 베스트셀러. 그린망고와 연꽃, 오렌지와 피오니, 아이리스와 머스크. 그들의 만남은 우아하고도 은은했다. 신선한 물향에 꽃향기와 풀내음이 어우러져 물기를 머금은 정원 같기도 하고, 오이꽃 무성한 오이밭을 바람이 지나갈 때 퍼지는 향 같기도. 귀엽고 발랄하기보단 우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에 잘 맞는다.
블랑쉬는 프랑스어로 화이트를 뜻한다. 이집트산 코튼으로 제작한 화이트 침구에 하얀 장미를 흩뿌려놓고, 그 이불에 얼굴을 파묻으면 피어오를 향기. 블랑쉬는 그 이름처럼 화이트로 시작해 화이트로 끝난다. 압축해서 표현하자면 신비롭고 극적으로 세련된 비누향. 누군들 갓 빨아 말린 보송보송한 냄새를 거부할 수 있을까. 선물할 때 취향 불문 성공확률 99.9%.
길가에 피어있는 장미꽃에 다가가 향기를 맡아본 적 있다면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 바로 그 향기를 이 병 속에 담아놨단 사실을. 이미 꺾여버린 장미가 아니다. 오롯이 살아있는 장미가 꽃잎을 살랑거릴 때 느낄 수 있는 내음이 싱그럽고 잔잔하게 코끝을 맴돈다. 장미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언젠간 시들어버릴 장미꽃다발 대신 언제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장미꽃 향기를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 단, 자연스럽고 은은한 만큼 지속력은 아쉬운 편.
장 폴 겔랑이 사랑했던 여인을 위해 만든 향수. 그녀가 좋아했던 샌달우드와 자스민을 주원료로 사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토록 강렬한 샌달우드가 느껴지는 향수는 겔랑에 없었다고. 달콤한 쟈스민과 일랑일랑이 첫 향을 열고, 샌달우드가 퍼져나온 후 통카빈과 바닐라가 따스하게 감싼다. 묘하고 관능적인 유혹의 향. 국내 연예인으로 예를 들자면 이효리 스타일. 단숨에 잡아끄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섹시함을 겸비한 그녀에게 선물하자.
‘메모아 뒨 오더’는 프랑스어로 추억의 향기라는 말. 16~17세기 로마의 정원에서 키우던 식물, 로만 카모마일에 인디안 코럴 재스민 꽃잎, 머스크 샌들우드, 노블우드 등의 향을 엮어 우수에 찬 듯 신비로운 향기를 완성했다. 오래된 책들이 가득한 서재의 냄새 같기도 하고, 추억의 잡동사니 가득한 다락방을 연상케 하는데, 빈티지하고 묘한 매력이 압권. 지적이고 차분한 여성에게 어울린다.
프리지아, 매그놀리아, 로즈 에센스 등의 플로럴 노트로 시작해 화이트 머스크의 깨끗한 베이스가 포근한 여운을 남긴다.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목련의 향기를 표현했다고.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화려하기보단 단아한 매력이 배어난다. 부드러운 느낌이 강한고로 차갑거나 중성적인 느낌만 아니라면 무난하게 녹아들 향수.
솔직하고 직관적인 라일락 향기.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여리여리한 여성이 떠오르는 향기다. 프레드릭 말의 스테디셀러 엉빠썽에서 물향을 쏙 빼면 이런 느낌 아닐까. 이 향수 뿌리고 오가는 곳마다 라일락 꽃향기 몰고 다닐 기세다. 꽃말은 젊은 날의 추억이라고. 푸르른 젊은 날을 함께했던, 혹은 이제 그 추억을 만들어나갈 그녀에게 향기로 고백해보는 건 어떨는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