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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의 인생책 시리즈 1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2023-02-27T14:09:17+09:00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우정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 대답할 것이다.

삶은 그냥 살아지지 않는다. 물에 내던져지면 팔을 젓고 발을 첨벙여야만 가라앉지 않듯,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는 몸짓, 발짓이 필요하다. 그러다 더이상 헤엄칠 힘이 없을 때 모든 것을 멈추고 그냥 저 물속에 가라앉고 싶단 생각을 한다. 그런 때였다. 이 책을 만난 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더 이상 도무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 살아야겠다는,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들어준 책이라고.

이 책은 칠레의 국민 시인이자 민중 문학의 세계적 거장 파블로 네루다와 그의 우편배달부였던 한 소년의 짙은 우정을 그린다. 여기서 알아둘 점은,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역사 속 실존 인물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책의 저자 안토니오 스카르메타(1940~)는 이 시인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 소설의 배경도 실제 시인이 거주했고 가장 사랑했던 마을, 그리고 지금은 시인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칠레의 이슬라 네그라다. 시대적 배경도 다르지 않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 1,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국내외로 정치적 혼란기였던 그 시기를 그대로 반영했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이 시기의 칠레 문학은 다소 진지하고 엄중한 성격의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작가는 달랐다. 비극적인 시기일수록 사회적 메시지 이외에 삶의 활력과 즐거움이 문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시대가 무색하듯 이 책은 밝고 경쾌하며 활기가 넘친다. 읽고 있으면 자연스레 주인공과 똑같은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분위기에 녹아든다.

주인공의 이름은 마리오 히메네스. 뺀질뺀질 빈둥대기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이다. 그러했다. 네루다를 만나기 전까진. 시인의 우편을 배달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시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네루다: 무슨 일 있나?
마리오: 네?
네루다: 전봇대처럼 서 있잖아.
마리오는 고개를 돌려 시인의 눈을 찾아 올려보았다.
마리오: 창처럼 꽂혀있다고요?
네루다: 아니, 체스의 탑처럼 고즈넉해.
···중략···
네루다: 온갖 메타포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건 부당한 일이야.
마리오: 뭐라고요?
네루다: 메타포라고!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메타포(은유)로 무장한 네루다의 시를 이미 줄줄 외우고 있던 마리오는 당시까지도 메타포의 개념을 모르고 있었다.

마리오: 예를 하나만 들어주세요.
네루다: 좋아. 하늘이 울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뜻일까?
마리오: 참 쉽군요. 비가 온다는 거잖아요.
네루다: 옳거니. 그게 메타포야.
···중략···
마리오: 선생님은 온 세상이, 즉 바람, 바다, 나무, 산, 불, 동물, 집, 사막, 비…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마리오의 눈엔 메타포란 렌즈가 장착됐고, 뻔하고 지루해만 보였던 일상의 면면은 모두 시가 되었다. 그의 뇌엔 모국어 외에 다른 한 가지 언어가 추가로 입력됐다. 바로 시의 언어다. 마리오의 시간은 BC와 AD가 아닌, 시를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주인공이 메타포를 깨닫게 된 순간 이후에 가장 시적인 장면이 있다면, 타국에서 향수병에 걸린 네루다를 위해 마을 곳곳의 소리를 녹음하는 장면이다. 다음은 바다와 새, 네루다의 집 정원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 파도 소리, 밤하늘의 침묵까지 테이프로 담아달라는 시인의 부탁에 마리오가 얼마나 절절하게 임했는지 느끼게 해주는 책의 묘사다.

“밀물과 썰물, 바람에 상큼하게 부서지는 파도를 쫓았다. 소니 녹음기를 줄에 매달아 게가 집게를 비벼대고 해초들이 달라붙어 있는 바위 틈새에 밀어 넣었다. 바다 한가운데 배를 타고 들어가 3미터짜리 파도가 투우사의 단창처럼 해변에 내리꽂히기 직전의 스테레오 음향을 잡아냈다. 어느 날에는 갈매기가 수직으로 하강해 정어리를 쪼는 소리와 물 위를 스치는 소리를 녹음하는 행운을 잡았다. 별들의 움직임을 녹음하려 아등바등했다.”

또 작가 특유의 해학적 성묘사와 유머 감각도 이 소설에 즐거운 공기가 흐르는 이유다. 마리오의 장모가 그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도 잘 느낄 수 있는데, 세상 이렇게나 인간미가 흐르다 못해 넘치는 주인공이 있을 수 없다. “가진 것이라곤 알량한 무좀균뿐인 작자라고.”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일 포스티노’에선 “가진 게 발가락 때밖에 없는 놈”이라고 표현한다.

적지 않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서 우리는 흔히 굉장히 역량이 뛰어나거나 준수하거나 배경이 화려한 주인공들을 마주한다. 그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심장, 그 속의 내면, 그리고 내면에서 솟아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학력, 스펙, 집안, 재산 그 모든 객관적 지표 속에서 자유로운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선 속에 위축된 당신의 어깨를 펴 줄는지 모른다.

이 소설이 대단한 진짜 이유는 가벼우면서 무겁다는 데 있다. 순수하면서도 섹시하고, 웃음이 터지면서도 동시에 눈물짓게 만든다. 감동과 활력을 선사하지만, 시대의 그늘도 간과하지 않는다. 작가는 서문을 통해 이렇게 밝힌다. “미지의 독자 여러분도 깨닫게 되겠지만 이 이야기는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며 끝을 맺는다”고. 작가의 예고처럼 그저 평화로울 것만 같은 소설의 흐름은 순식간에 돌변한다. 1973년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 시인이 실존했던 그 시대의 비극적 사건은 소설 속 결말까지 잠식하고,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살아본 적 없는 시대, 가본 적 없는 곳,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이야기. 내 눈 앞에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 속에서 잔잔하게 때로는 재기발랄하게 펼쳐진 그들의 우정은 시들시들한 마음과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마음에 인공호흡이 필요할 때 이 책을 펼치는 것이 하나의 대책이 된다. 지난한 시간 속 가슴에 피어나는 유머와 활력, 감동을 전하기를 포기치 않았던 작가의 신념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꽃을 피운다. 네루다가 작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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