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nnovation Only(혁신만 입장 가능)’. 지난 9월 열린 아이폰11 신제품 발표회 초대장과 함께 애플이 내건 슬로건이다. ‘초대받은 사람만 입장 가능(by invitation only)‘이란 말을 재치있게 바꿨다. 재치가 화를 불렀을까. 발표회가 끝나자 비즈니스 인사이더의 데이브 스미스가 한마디 했다. “By Innovation Only가 아니라 By Iteration Only(반복만 입장 가능)였다”라고.
혁신이 없었다. 지루하다는 매체들의 논평도 이어졌다. 애플은 소년다운 호기심을, 반짝거림을 잊은 지 오래다. 물론, 연간 매출액이 250조 원이 넘고, 매년 100조 원이 넘는 아이폰을 파는 기업에 예전 같은 ‘원 모어 씽’을 바라는 건 무리다. 하품을 참아가며 매년 애플 이벤트를 보는 것도, ‘이젠 어떤 놀라움을 줄까?’ 같은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10억으로 추산되는 사용자를 가지고 있는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궁금해서 그렇다. 애플은 다윗이 아니라 골리앗이다.
만약 혁신이 기대를 배신하고 더 좋은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면, 애플은 이번에 ‘가격’을 혁신했다.
아이폰11은 애플이 나아갈 길을 보여줬을까? 글쎄. 안타깝게도 이벤트에서 가장 큰 박수는 애플 아케이드와 애플TV+가 월 4.99 달러에 제공된다고 언급하면서, 새로운 애플 기기를 사면 애플TV+를 1년간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말할 때 나왔다. 만약 혁신이 기대를 배신하고 더 좋은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면, 애플은 이번에 ‘가격’을 혁신했다. 아이폰11 가격을 699달러로 되돌린 건 덤이라고 치자.
가격을 혁신한 이유는 단순하다. 가격을 올렸더니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플도 처음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초고가 아이폰X과 일반 아이폰8을 동시에 내놨더니, 판매량은 줄어도 이윤이 급상승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에 애플은 투트랙 노선으로 행보를 바꿨다. 다음에는 아이폰 XR과 아이폰 XS, 아이폰 XS 플러스를 내놨다. 행여 고가폰이 팔리지 않을까 세심하게, 아이폰 XR에는 듀얼이 아니라 싱글 카메라를 달아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2018년 9월부터 2019년 6월까지 9개월간, 전년 같은 기간 대비 아이폰 판매량은 –1,911,400 만 달러 가량 감소했다.
여기서 사단이 났다. XS 형제는 비싸서 잘 팔리지 않았고, 판매량 절반을 가져가리라 생각한 XR은 고가의 보급형이라 여겨져 안 팔렸다. 미·중 무역분쟁 역시 한몫해서, 아이폰의 중국 판매량은 급감했다. 그제서야 애플은 부랴부랴 아이폰 XR은 보급형이 아니라고 홍보하며, 가격 인하나 중고값을 더쳐주는 마케팅을 펼쳐서 판매량을 조금 회복했다. 하지만 2018년 9월부터 2019년 6월까지 9개월간, 전년 같은 기간 대비 아이폰 판매량은 1,911,400 만 달러(한화 약 22조 원) 가량 감소했다.
다행히 아이폰 판매량 감소는 서비스 부문이 성장하고, 에어팟, 애플워치 등 액세서리가 잘 팔리면서 조금 메꿔주긴 했다. 애플도 빠르게 태세를 전환해 올 초 애플TV+, 애플 아케이드 등을 발표하면서 미디어 회사로 전환하는 척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다. 아이폰을 대신할 다음 제품을 찾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애플 세금을 더 걷으며 버티겠다는 속셈이다.
애플로서는 꽤 간절했던 모양이다. A13 프로세서를 발표할 때는 이전까지 보기 어려웠던 ‘다른 회사와 비교하는 표’까지 등장시켰다. 그리고 애플 중고폰 보상 프로그램인 ‘트레이드인’까지 이벤트 마지막에 친절하게 소개했다.
아이폰 11은 잘 팔릴까? 핵심은 중국에만 1억 명 이상 있다고 알려진, 아이폰7 이전 폰을 가진 사용자다. 특히 이제는 OS 지원이 끊긴 전 세계 아이폰6/6플러스 사용자가 얼마만큼 새로운 아이폰으로 기기를 변경하는가에 달려 있다.
50달러 떨어진 아이폰11을 중국에서만 1,000위안이나 인하한 것도 그렇고, 신제품 구매 시 애플TV+ 1년간 무료 제공, 애플 아케이드 시작, 트레이드인 프로그램 소개까지 모두 기변 사용자를 노렸다. 그래도 기기를 변경하지 않는 사용자는 내년 초 아이폰SE2를 투입해 유혹하리라 생각한다.
사실 애플TV+나 애플 아케이드가 딱히 기대되는 플랫폼은 아니다. 애플은 아직도 콘텐츠 사업을 잘 모르고, 생각보다 준비도 덜 되어 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아이폰11은 중국을 제외한 시장에서 아이폰 XR보다 잘 팔린다.
하지만 중국 시장은 여전히 어렵다. 정부 차원에서도 빠른 5G 이동통신 상용화를 밀고 있는데, 정작 아이폰은 5G를 지원하지 않는다. 내년에도 지원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한 영향도 있고, 화웨이는 다른 나라에 못 파는 만큼 중국 내수 시장에 집중할 것이다. 이런 흐름을 가격만으로 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조금 회복하기야 하겠지만, 결국 애플의 매출 감소 추세는 피할 수 없다. 아이맥-아이팟-아이폰으로 자연스럽게 불려온 몸집을 가눌 새로운 제품이 없다. 자율주행차는 이미 손 뗐고, 개발 중이라는 AR 안경도 언제 나올지 모른다. 스마트홈 시장은 이미 구글과 아마존이 대세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현재 애플은 스티브 잡스 같은 비저너리가 없는, 관리의 팀 쿡이 운영하는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장하는 시장이 없으면 더 성장할 수 없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세상에, 잡스가 세상을 떠난 게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다시 잡스가 그리워질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