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편의점은 사케를 찾는 이들로 북적였다. 추성훈이 기획부터 제작까지 전반으로 참여한 ‘아키그린’의 출시 때문이었다. 유명인을 앞세운 반짝인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알고 보면 사케의 인기는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우상향 중이다. 소주와 맥주가 힘을 쓰지 못하는 와중에 수입액 최대치를 연이어 경신하는 데이터가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니혼슈 입문 가이드.
사케 이야기 한창 하다가 웬 니혼슈냐고 물으신다면, 그 질문이야말로 입문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흔히 사케라고 부르는 술의 정식 명칭은 엄밀하게 따지면 사케가 아니기 때문. 슬기로운 니혼슈 생활을 위한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요즘 뜨는 바이주 입문 가이드가 궁금하다면 여기로.
니혼슈, 명칭부터 정리하기
‘사케 주세요’는 틀린 말이다?
일본 이자카야에서 “사케 구다사이.”(사케 주세요.)라고 말하면 종업원은 어떤 뜻으로 이해할까?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에서는 눈치껏 의도를 파악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무슨 술을 달라는 건지 되물을 확률이 높다. 사실 사케(さけ)는 일본어로 ‘술’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생맥 주세요, 위스키 주세요도 아닌 ‘술 주세요’는 주문을 재차 확인할 수밖에 없는 요청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사케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술은 니혼슈(日本酒)라고 부름이 적합하다. 말 그대로 일본주. 주세법 등 공식적으로는 세이슈(청주)라고 칭하지만, 현지에서도 이를 구분하지 않고 니혼슈로 부르는 게 보편적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만 이를 사케라고 부르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일본을 제외한 세계적으로는 사케(sake)로 통용되니, 미국이나 유럽에서 니혼슈 달라고 하면 곤란하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일본 내에서 일본 쌀로 만든 청주만을 니혼슈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앞서 아키그린을 편의상 사케로 소개했지만, 국내에서 국산 쌀로 제작했기 때문에 개념적으로는 니혼슈가 아니다. 니혼슈 스타일의 리큐르 정도. 이와 비슷하게 닷사이가 뉴욕에 첫 해외 양조장을 세워 빚어낸 닷사이 블루 또한 니혼슈라 할 수 없다.
정종이라는 표현 또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일본식 청주가 들어오던 시절, 다수의 청주 브랜드 이름에는 정종(正宗)이 포함되어 있었다. 참고로 정종의 일본식 음독은 청주를 뜻하는 세이슈와 동일하다. 이렇다 보니 한국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청주와 정종이 동의어로 각인됐다. 호빵이나 대일밴드처럼 상표의 보통명칭화가 이루어진 것. 지금은 굳이 정종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제조 과정으로 알아보는 니혼슈 분류법
니혼슈를 가르는 세 가지 기준

니혼슈는 기본적으로 쌀, 누룩, 물로 만들어진다. 어떤 술이든 원료가 가장 중요한 법. 니혼슈의 맛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 역시 쌀이다. 와인 전용 품종 포도로 와인을 양조하듯, 니혼슈 또한 주조에 적합한 쌀 품종을 적극 활용한다. 이는 보통의 식용 쌀보다 낟알이 크고 단단하며, 물을 잘 흡수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와 같은 성질이 왜 주조에 유리한지는 ‘정미’라는 특유의 방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낟알의 겉면을 깎아내는 정미는 니혼슈를 나누는 첫 번째 기준이 된다. 쌀의 겉면에는 단백질과 지방이 많은데, 이를 많이 깎아낼수록 술맛이 잡미 없이 깔끔하고 향기로워진다. 이때 얼마나 깎고 남겼는지를 나타내는 수치가 정미율(정미보합)이다. 정미율이 60%라면 쌀의 40%를 깎아내고 60%만 남겼다는 뜻. 흔히 들어본 ‘긴죠’(60% 이하)나 ‘다이긴죠’(50% 이하)라는 명칭은 쌀을 얼마나 지독하게 깎아냈냐를 나타내는 증표가 되기도 한다.

두 번째 기준은 양조 알코올의 첨가 여부에 있다. 오직 쌀과 누룩, 물로만 빚은 술에는 ‘준마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쌀 본연의 묵직한 감칠맛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반면 발효 과정에서 양조 알코올을 첨가한 술은 ‘혼죠조’ 계열로 분류된다. 준마이가 더 고급이라는 뉘앙스가 있긴 하지만, 어느 쪽이 무조건 더 좋은 술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향미를 끌어올리거나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일부러 알코올을 첨가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니혼슈의 성격을 결정짓는 마지막은 열처리 과정이다. 니혼슈는 효모가 살아있는 민감한 술이라 보통 숙성 전, 병입 전에 두 번의 살균 과정을 거친다. 이를 거친 니혼슈를 ‘히이레’라 부른다. 반면 살균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나마자케’(생주)도 존재하는데, 신선하고 화사한 맛이 일품이지만 보관이 까다롭다. 이 외에도 숙성 전에만 한 차례 살균한 ‘나마즈메’, 병입 직전 살균한 ‘나마쵸조’ 등 이 과정에서 여러 변주가 탄생하게 된다.

유명한 닷사이 23으로 예시를 들어보자. 이 제품은 준마이 다이긴죠로 분류되는데, 이로부터 알코올을 첨가하지 않은 정미율 50% 이하의 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품명의 숫자는 정미율로, 23%, 즉 77%나 깎아내 주조한 술이니 꽤 고급이라는 점을 유추 가능하다. 또한 이 술은 히이레 제품인데, 이를 통해 상온에 두거나 비교적 오래 보관해도 괜찮다는 특징을 인지할 수 있어 구매에 도움이 된다.
아는 만큼 보이는 니혼슈 문화
마시는 방법도 가지각색

됫병이 빚어낸 미학
이자카야나 주류 판매장에서 니혼슈를 찾으면 유달리 거대한 병을 발견할 수 있다. 무려 1.8L 용량, 한 되를 담을 수 있는 병이라는 뜻의 됫병이다. 요즘은 300ml, 720ml 등 작은 사이즈가 인기를 끌지만, 여전히 니혼슈의 기본 규격은 됫병. 이 때문에 니혼슈를 덜어 마시는 병인 도쿠리, 잔 단위로 판매하는 잔술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참고로 도쿠리는 한 홉이라는 의미이며 180ml에 해당한다. 원하는 양에 맞게 주문하자.
다채로운 온도 스펙트럼
니혼슈의 매력 중 하나는 온도에 따라 전혀 다른 술이 된다는 점이다. 0도에서 60도까지, 같은 술이라 할지라도 음용 온도에 따라 그 풍미와 매력이 확연히 달라진다. 차갑게 마시는 레이슈는 깔끔하고 청량한 특징이 두드러지고, 따뜻하게 데운 아츠캉은 알코올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부각한다. 상온 상태의 죠온은 쌀 본연의 맛과 질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넘치는 정을 담는 못키리
나무 컵(마스)을 받치고 술이 넘치도록 따르는 독특한 문화, 못키리. 정량을 채우기 힘든 작은 잔 아래에 접시나 마스를 받쳐 넘치게 따르던 관습이 그 시작이었다. 지금은 즐겁게 술을 마셔주길 바라는 호쾌한 인심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잔을 들어 술을 조금 덜어내고 마시거나, 고개를 숙여 잔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먼저 마시면 된다. 잔을 비운 뒤에는 마스에 담긴 술을 잔에 부어 마시도록 하자.
계절이 기다려지는 한정판
니혼슈는 계절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담아내는 술이기도 하다. 봄에는 벚꽃처럼 화사한 향이 매력적인 우스니고리가, 여름에는 청량한 탄산감으로 갈증을 달래는 나츠자케가 입맛을 돋운다. 가을에는 여름내 숙성돼 깊은 감칠맛을 내는 히야오로시를, 겨울엔 햅쌀로 갓 짜낸 시보리타테를 만날 수 있다. 시기에 맞춰 계절 한정판을 골라 마시는 것도 니혼슈를 즐기는 좋은 방법.
잔을 고르는 재미
니혼슈는 마시는 잔도 여러 가지다. 소주잔처럼 작은 사기잔인 오초코나 조금 더 큰 구이노미, 혹은 아주 얇은 유리컵인 우스하리 정도에 마시는 게 일반적. 최근에는 고급 니혼슈를 와인 잔에 마시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이는데, 보통의 잔에 비해 향의 깊이와 풍부함을 한층 더 섬세하게 음미할 수 있다.
니혼슈를 위한 최소한의 주도
일본에서 눈총을 피하는 법
술을 즐기는 방법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술을 마시는 예절, 주도다. 일본의 식당이나 이자카야를 방문할 때 몇 가지 사소한 규칙만 알고 있어도 훨씬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다. 꼭 일본이 아니더라도 일종의 유희로 주도를 지키며 마셔보는 경험도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일본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기에 앞서 음료나 식전주를 주문하는 게 일반적이다. “토리아에즈 비루”(일단 맥주부터)라는 말이 있을 정도. 특히 이자카야라면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인원수만큼의 음료 주문은 필수에 가까우니, 논알콜러더라도 우롱차 정도는 시키자.
술자리에서는 자작을 삼가고 서로의 잔을 채워주는 문화가 핵심이다. 이때 상 위에 올라온 잔이 비어 있지 않게 유지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원샷을 기본으로 깔고 가기 때문에 잔을 완전히 비운 후 채워주는 게 보편적이지만, 일본은 술이 3분의 1 정도 남았을 때 미리 채워주는 첨잔이 기본이다.

불투명한 도쿠리 특성상 아무 생각 없이 마시다 보면 술이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할 수 있다. 이때 주의 사항. 남은 술을 확인한답시고 도쿠리 병을 들어 흔들거나 안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금물이다. 자칫 무례하게 비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 술의 잔량은 병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무게감으로 가늠하도록 하자.
고민 없이 고르자, 필승 니혼슈 브랜드
아는 척하기도 좋다
니혼슈는 워낙 다양한지라 가게마다 갖춰두는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메뉴판을 펼칠 때마다 패닉에 빠지는 편이라면, 이 브랜드들을 기억하자. 취향을 조금 빗겨나갈 수는 있을지언정 적어도 실패하지는 않을 테니.

아라마사
쥬욘다이, 지콘과 함께 일본 현지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브랜드로 꼽힌다. 한국에서는 사실상 구하는 게 불가능하니, 일본 방문 시 발견하면 일단 주문하자. 화이트 와인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산미가 특징.
핫카이산
니혼슈로 유명한 니가타 지역에서 손꼽히는 명주로 불리는 핫카이산. 지명도로 닷사이와 호각을 다툴 만큼 유명하다. 물처럼 깨끗하고 뒷맛이 딱 떨어지는, 깔끔하고 드라이한 니혼슈의 상징과도 같다.
나베시마
국내에서도 알음알음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나베시마.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사가현에 양조장이 있어, 색다른 여행을 원한다면 양조장 투어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신선한 과일 향과 섬세한 기포감이 일품이다.
카미카와다이세츠
홋카이도 전역에서 가장 트렌디한 니혼슈. 2016년에 문을 연 후발주자임에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깔끔하고 부드러운 풍미를 지녀, 술 자체가 돋보이기보다는 요리의 맛을 살려주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자쿠
‘만들다’라는 이름답게, 마시는 사람과 함께 완성된다는 철학을 담아내는 자쿠. G7 정상회담에서 건배주로 선택받으면서 그 이름을 널리 알린 바 있다. 화려한 꽃향기와 완벽한 밸런스로 유명하다.
아카부
이와테현의 젊은 양조팀이 만드는 현대적인 니혼슈. 강렬한 사무라이 로고만큼이나 존재감이 확실한 맛을 선사한다. 잘 익은 사과나 딸기를 한입 베어 문 듯 신선하고 향긋한 산미가 인상적이다.
고쿠류
‘니혼슈계의 부르고뉴’라 불릴 정도로 최고급 사케를 생산하는 지역인 후쿠이현. 이곳을 대표하는 고쿠류는 명성에 걸맞은 부드러운 목 넘김과 탄탄한 구조감을 자랑한다. 중요한 자리를 위해 선택하기에 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