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면 할 일이 많아진다. 두껍고 무거운 겨울옷들로 가득한 옷장도 싹 갈아엎어야 하고, 그 옷장을 새로 채울 봄옷도 몇 벌 마련해야 하고. 이제 날이 추워서란 핑계를 댈 수 없으니, 미뤄뒀던 운동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봄이니까 봄에 보면 좋은 영화 정도는 봐줘야 한다. 자, 네이버에 봄 영화 검색하면 우선순위로 나열되는 뻔한 영화들 말고, 임볼든 에디터들의 센스와 감성을 한껏 살려 선정한 봄 영화 7선을 만나보자.
공기인형 (Air Doll, 2009)
“생명은 혼자서는 채울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꽃도 암술과 수술만으로 부족하고 곤충이나 바람이 있어야 수정이 된다. 생명은 그 안에 빈 공간을 가지고 있고, 그 공간은 다른 사람만이 채울 수 있다. […] 나도 어떤 때는 누군가를 위한 곤충이었을까? 당신도 어느 때는 나를 위한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마음을 가져버린 섹스돌 노조미(배두나 분). 어쩌면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공기인형 노조미를 통해 도시 속에 외롭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공허함을 그려낸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영상, 여운 가득한 대사,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우리의 존재. 겨울은 갔지만 추위는 아직 남은 계절에 어울리는 잔잔하고 먹먹한 영화다. ‘아무도 모른다’(2004), ‘걸어도 걸어도’(2008)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한 편의 시 같은 작품. 러닝타임 116분.
룸바 (Rumba, 2008)
영화 속 그들의 사랑엔 많은 대화가 필요치 않았다. 몸의 말, 룸바면 족했다. 초등학교 영어 선생님 부인 피오나와 같은 학교 체육 선생님 돔은 룸바를 즐기는 유쾌한 부부다. 그들이 있는 곳이 무대가 되는 행복한 이들 앞에 언제나 우리에게도 느닷없었던 불행이 날아든다. 교통사고로 부인은 한쪽 다리를, 남자는 기억을 잃었다.
생의 색감들로 빼곡한 2008년 작 룸바는 이런 사고 따위에 세상을 원망하고, 처지를 비관하며 러닝타임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결국 직장을 잃고, 집도 불에 타 터만 남았지만 대수롭지 않다. 그녀를 지지하는 한쪽 다리와 의족으로 걸으며, 당신과 내가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충실히 행복하기에 바쁘다.
그러던 어느 날 기억을 잃어 집을 찾아오지 못한 돔은 피오나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둘은 영화 속 결말처럼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겨울의 조각에서 봄이 피어나듯, 그와 그녀는 서로의 조각 같다. 1950년대 쿠바, 푸에르토리코, 아프리카 음악들이 이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완성한다. 러닝타임 77분.
4월 이야기 (April Story, 1998)
감성의 대가 이와이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는 호불호가 갈리기 쉬운 작품이다. 고작 1시간에 불과한 짧은 볼륨과 기승전결 구조가 전혀 없는 플롯의 영화를, 그것도 극장에서 봤다면? 당연히 열에 여덟은 십중팔구 “이게 뭐야?”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4월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면 영화는 이전과 달리 보인다. 일본의 입학 시즌은 우리나라보다 한달 늦은 4월. 겨우내 잠들어있던 세상 모든 것들이 깨어나고, 벚꽃도 봄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카메라는 그렇게 만물이 생동하는 가운데 부푼 마음을 안고 대학 입학과 함께 도쿄로 상경한 니렌노 우츠키(마츠 타카코 분)의 떨리는 감정선을 관객에게 마이크로 단위로 전달한다.
그래서 영화는 진짜 이야기가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미련 없이 스태프 롤을 띄워버린다. 오로지 4월이 내포하고 있는 ‘시작’의 본질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췄다. 어리숙하면서도 풋풋한 대학생을 완벽하게 담아낸 마츠 타카코의 풍부한 표정이 진한 잔향을 남긴다. 러닝타임 67분.
족구왕 (2013)
2년여의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생이 되어 돌아온 봄의 캠퍼스. 대학 생활, 더 나아가 이 사회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갑갑하기만 하다. 하지만 동시에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막연한 핑크빛 로맨스를 기대하며 설레발에 잠 못 이루기도 한다. 아마 대한민국 남자라면 대부분 느껴봤을 이 감정을 ‘족구왕’은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충실하게 담아낸다.
겉으로 보면 족구를 소재로 한 평범한 청춘 코미디 영화 같지만, 이 작품은 의외성으로 넘쳐난다. 물론 가장 큰 줄기는 마음 가는 대로 뛰어들라며 파이팅을 불어넣는 청춘 예찬. 그러나 중간중간 우리 사회의 병든 곳을 날카롭게 찌르는 예리한 통찰력과 메시지도 담아냈다. 게다가 비슷한 장르의 작품들이 결정적인 장면에서 매번 반복하는 뻔한 클리셰도 보기 좋게 파괴한다.
지금이야 ‘응답하라 1988’ 덕분에 대중에게도 익숙한 배우가 된 안재홍이지만, 이 작품에선 소위 뜨기 이전의 그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연기력도 굉장히 자연스러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뻔한 속담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물론 함께 주연을 맡은 황승언의 연기가 다소 아쉽지만, 배역 자체가 매력이 넘치는 데다가 단점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역대급 비주얼이 남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뭐,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이 걸출한 연기로 사람들에게 각인된 건 아니니깐. 우문기 감독의 2013년 작품. 러닝타임 104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2006)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생각해 밥을 먹지 않고 도시락통에는 건전지만 싸서 다니는 신세계 정신병원 신입 영군(임수정 분), 그리고 남의 특징을 훔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또 다른 환자 일순(정지훈 분). 거식증으로 점점 야위어 가는 영군을 위해 일순은 싸이보그 따윈 없다고 설득하는 대신, 남의 요들 실력을 훔쳐 요들송을 불러 기분을 풀어주고, 할머니를 납치해간 ‘하얀맨’(의사와 간호사들)들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영군의 동정심을 훔쳐 가준다. 그리고 수술 놀이를 통해 밥을 소화할 수 있는 ‘라이스메가트론’도 설치해준다.
철저히 감정을 거부하던 싸이보그 마음에 봄이 찾아오는 순수하고 엉뚱한 로맨틱 코미디. 때론 너무 아기자기해서 이게 정말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 작품이 맞나 싶은 순간들도 있지만, 경쾌한 왈츠 음악에 맞춰 싸이보그 영군이 하얀맨들에게 손가락에서 나온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에서는 이게 박찬욱 영화가 맞구나 싶다. 러닝타임 105분.
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2000)
“둘은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온 차우(양조위 분)와 리첸(장만옥 분). 자신의 배우자들이 외도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리첸은 차우에게 이런 질문을 건넨다. 사랑의 시작은 알 수가 없다. 차우도 결국 자신이 뱉은 이 질문에 수렴하고 만다. 외로움의 자투리였는지, 서로에 대한 연민이었는지. 차우와 리첸의 사랑은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던 운명같은 거라고 대변해주고 싶을 뿐이다.
그들은 도덕적 금기를 깨지 못하고 감정의 주변에서 서성거린다. 표현할 수 있는 건 어깨가 부딪힐 만큼 좁은 계단, 택시 안, 문과 문 사이에서 나눈 눈빛들이다. 휘발되고 마는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보다 깊고 짙은 몸짓의 언어가 영화 속 공간을 지배한다.
‘화양연화’의 배경이 된 60년대 홍콩은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빈곤과 부패가 만연했던 시기다. 이는 주인공들의 심리와 덧대져 더욱 아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나고 나야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어두운 밤 목련 꽃처럼 환히 빛나던, 당신의 꽃같은 한 철이 지나간 자리가 허허롭다. 러닝타임 97분.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 (My So Has Got Depression, 2011)
첫 장면부터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우울하다. 잔뜩 찌그러지고 의기소침한 츠레의 얼굴이 이 영화의 타이틀을 그대로 전한다. 원인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우울증을 겪고 있는 한 남자. 그리고 그를 남편으로 둔 아내, 하루코의 일상을 담담히 풀어낼 뿐.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머리가 아파. 죽고싶어”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츠레는 극심한 감정기복을 겪는다. 하루코는 그런 남편을 탓하거나 재촉하지않고 잠잠이 옆을 지킨다. 이 영화는 우울증에 걸린 당사자 뿐 아니라 그곁에 사람이 겪어야 할 상실과 고충, 그리고 그 아픔을 헤쳐나가는 과정과 그들의 태도를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슬픔을 인정할 때에야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괴로웠으면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제까지로도 괜찮아요.” 이혼을 앞두고 힘겨워하는 지인에게 하루코가 건넨 말이다. 이는 각자의 힘겨움을 지고 있는, 그리고 때론 그 감정이 부끄러워 말 못 할 좌절감에 휩싸이는 모든 사람을 향한 감독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봄은 찬란하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계절 속에 섞이지 못하고 이질감과 씁쓸함을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잔인하게 느껴지는 계절, 봄에 꺼내 봐야만 할 것 같은 영화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다. 러닝타임 12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