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일어났던 어두운 사건들은 현재를 밝히는 빛이 된다고 믿는다. 허나 끈질긴 취재력을 바탕으로 만든 범죄 실화 다큐멘터리를 보노라면 우리는 과연 더 나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인가 머물러 있는 것인가 혹은 뒷걸음질 치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드라마보다 지독한 우리 주위의 이야기를 마주할 자신이 있다면, 이 리스트로 이 시대의 민낯을 밝혀보는 기회가 되길.
이카로스
순간의 유혹을 떨치지 못해 약물 복용이라는 마수에 걸려든 선수들. ‘이카로스’는 러시아 올림픽 도핑 스캔들의 전말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아마추어 사이클 선수인 감독 브라이언 포겔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그는 세계적인 사이클리스트 랜스 암스트롱의 도핑으로 인한 몰락을 지켜보며 이를 단순 선수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로 인식해 이 사안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500번이 넘도록 도핑에 걸리지 않은 건 우리가 모르는 어떤 구조의 문제일 수 있으니까.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감독이 선택한 방법은 직접 자신의 몸에 금지 약물을 투여한 후 아마추어 사이클 대회에 출전하는 일. 이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선 조력자가 필요했고, 그는 모스크바 올림픽 연구소장인 그리고리 로드첸코프와 만난다. 그와 함께 일을 진행하던 중 러시아 선수 약물 복용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고 이야기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며 긴장감이 고조된다. 이 밀도 있는 작품은 제90회 아카데미 최우수 장편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의 영광을 얻었다. 러닝타임 121분.
팀 폭스캐처
범죄 실화 다큐 중심에는 언제나 비극이 있다. ‘존 듀폰 사건’을 그린 이 영화도 마찬가지. ‘폭스캐처’는 미국 억만장자 존 듀폰이 서울 올림픽을 위해 결성한 레슬링팀으로 여기에 레슬링 선수 마크 슐츠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영입되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처음에는 마크가 존을 무한 신뢰하며 의지했지만, 실체를 드러내는 존의 모습에서 이 둘의 사이는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마크의 형, 국민들의 추앙을 받는 레슬링 영웅 데이브 슐츠가 이 팀에 들어오게 되면서 비극 속으로 처절한 걸음을 내디디고 만다. 날카롭게 신경을 건드리는 스티븐 카렐 연기가 압권. 러닝타임 91분.
위험한 이웃
‘위험한 이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잰 브로버그는 십 대의 나이에 두 번이나 납치를 당한다. 이웃인 로버트 버치톨드에 의해. 여기서 핵심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다. 이 다큐는 수많은 거짓말로 피해자 부모가 납치 혐의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도록 세뇌하는 데 성공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분히 충격적인데, 버치톨드와 소녀의 부모와 각각 맺은 내연관계, 외계인을 빌미로 한 협박 등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할 여러 가지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며 목덜미 잡게 한다. 러닝타임 90분.
아만다 녹스
세계 뉴스 1면을 장식한 사건 중 하나를 꼽자면 ‘아만다 녹스’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거다. 이는 미국인 교환학생 아만다 녹스가 이탈리아에서 유학 중 자신의 룸메이트인 메레디스 커쳐를 살해한 혐의로 두 번이나 기소된 사건을 말한다. 그녀는 두 번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그 이후 수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대중 사이에서도 위 사건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다. 이 작품은 아만다와 그녀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사건의 전모를 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다루고 있는데 너무 편향된 관점에서 제작된 것 아니냐는 비난도 받았다고. 러닝타임 92분.
제프리 엡스타인: 괴물이 된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 괴물이 된 억만장자’는 억만장자 엡스타인의 아동 성폭행 및 성매매의 추악한 진실을 내보인다. 아울러 이 사건이 가진 영향력 덕에 수면위로 드러난 미국 사법제도의 허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의미 있는 지점. 이 다큐를 통해 부와 권력으로 수많은 여성을 나락에 떨어트린 괴물의 민낯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잔혹한 만행에도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세상에 건넨 용기 있는 증언을 기억해야 한다. 총 4부작.
게이브리얼의 죽음: 누구의 책임인가?
얼마 전 공분을 샀던 사건이 오버랩되며,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마주하기 힘든 작품이다. 응급실에 실려 온 아직 작고 어린 8살 소년 게이브리얼 페르난데즈. 이틀 만에 숨을 거둔 소년은 그의 엄마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8개월 동안의 가했던 학대의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이 다큐의 부제목처럼 게이브리얼의 죽음은 비단 부모의 책임만은 아닐 터.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 존은 사회복지사 4명을 기소하며 헐거운 복지 시스템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하지만 몇 년 후 일어난 유사 사건이 소개되며 우리는 과연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씁쓸함을 더한다. 총 6부작.
오쇼 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
컬트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인도 영적 스승(Guru) 오쇼 라즈니쉬와 그의 추종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시리즈를 추천한다.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이 종교 지도자의 이름이 낯설다면 국내 출간되어 베스트 셀러에 이름을 올린 ‘배꼽’이라는 책이 그의 저서라는 점을 짚고 가자. 그가 가진 영향력에 대한 이보다 더 명확한 방증은 없을 듯.
미국 오리건주에 목장을 사며 유토피아 건립을 시작한 오쇼의 행보와 그가 추종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이유, 신도들의 약점을 악용한 정서적 학대 등 그의 만행을 드러낸다. 한편 이해할 수 없는 오쇼의 사상에 걸음을 보탠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정서적 결핍의 무서움을 다시 보게 된다. 총 6부작.
더 리퍼
영국은 미스터리 장르를 기막히게 잘 만든다고 알려졌지만, 실화 바탕 범죄 다큐도 그에 못지않게 훌륭하다. 그 중 ‘더 리퍼’는 1975년부터 1980년 사이에 걸쳐 웨스트요크셔와 맨체스터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을 조명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언론이 초창기 피해 여성들을 매춘부라고 발표하며 깊이 있는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던 것. 또한 여성 혼자 밤에 길을 다니지 말라는 주객전도 방침을 내세우기도 했다.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죽음 혹은 삶의 무게를 어떤 기준으로 나누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총 4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