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거 하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노홍철을 떠올리겠지만, 못지않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 서울대에 들어가게 한 시험공부에 질린 나머지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게 된 남자. 데뷔부터 지금까지 독보적인 영역을 지키고 있는 뮤지션. 바로 장기하다.
5월 7일, 영화 <바이러스>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갑자기 웬 영화 이야기냐고? 그야 주연이 장기하니까. 그를 스크린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질 장기하의 모습은 적잖다. 그저 특이한 음악인 정도로 여겼을 당신에게, 그 생각이 조금은 바뀔 그의 면모를 소개한다.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인디 신을 뒤집어놓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
2008년, 한 사내가 무대에 오른다. 음악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비주얼이다. 웃음기 하나 없이 타령 같은 노래를 뱉어낸다. 정체불명의 백댄서까지 대동하며 팔을 휘적휘적 흔든다. 그 이름은 ‘장기하와 얼굴들’.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처음 소개된 장기하와 얼굴들의 퍼포먼스는 온갖 패러디를 양산하며 순식간에 온라인을 장악했다. 말 그대로 센세이션이었다.

강렬한 시각적 요소는 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지만, 그들은 단순한 웃음거리로 소비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 그중에서도 가사는 확실히 남달랐으니까. 데뷔 싱글인 ‘싸구려 커피’는 한때 2000년 이후 발표된 가요 중 가장 노랫말이 아름다운 곡 2위로 뽑히기도 했다. 그 당시의 장기하는 자취 경력이 전무했다는 게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말의 소리에 대한 장기하의 고심은 가사에서 대번에 드러난다. 비비에게 선물한 곡 ‘밤양갱’의 ‘떠나는 길에 네가 내게 말했지’를 보자. 자음 ㄴ, ㄹ을 반복적으로 배치해 말이 유연하게 흐르게끔 의도하고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ㅋ’은 어떤가. 맨 끝 단어의 모음을 통일해 운율을 만드는 일반적인 작사법과 반대로, 맨 앞 자음을 맞추는 두운을 활용해 색다른 리듬을 그려낸다.

장기하는 첫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밴드 ‘눈뜨고코베인’에서 우리말의 멋을 접했다. 산울림, 송골매, 신중현은 그들의 교과서였다. 이후 자신의 팀을 꾸리고 나서도 그의 노랫말은 우리말로 채워졌다. ‘싸구려 커피’가 발매된 2008년은 빅뱅과 원더걸스를 필두로 외국어가 음악의 필수 요소처럼 여겨지던 시대. 하지만 그에게 주류 음악의 흐름이 어떤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뿐.
한국말 가사를 가장 한국말답게 쓰는 뮤지션. 어느덧 20주년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장기하의 기조는 그대로다. 그 기반은 우리말을 지킨다거나 아름다움을 전파한다는 식의 숭고한 목표 의식보다는, 본인이 멋이라고 느끼는 방향성을 그저 따라가는 것에 가깝다.
남들이 굳이라고 할지언정
그건 니 생각이고
2018년 어느 날, 장기하와 얼굴들이 5집 발표를 예고했다. 갑작스러운 해체 소식과 함께. 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0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장기하와 얼굴들은 여전히도 무수한 사랑과 관심 속에서 활동 중이었으니까. 해체 이유는 이러했다. “이번 음반은 장기하와 얼굴들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 될 거예요. 그건 다르게 말하면, 이제 장기하와 얼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누군가는 굳이 그래야 하냐고 물을 법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장기하와 얼굴들의 마지막 작품이 된 5집 <mono>. 앨범 작업 당시 장기하는 다시 한번 구태여 무언가를 계획하는데, 바로 사막에서의 녹음이었다. 전곡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혼자’를 구현할 최적의 장소라 판단했기 때문. 미국 캘리포니아 조슈아트리로 향한 그는 사막 한복판에서 노래를 불렀다. 결과는? 음향 문제로 쓰지 못했다. 모든 곡은 서울에서 재녹음했고, 사막에서의 결과물은 10초가량, 그마저도 더블링으로만 들어갔다.
행동은 결과를 수반한다. 삶에 어느 정도 공력이 쌓이면, 본인 행위에 대한 예상 도출 값이 대략 그려지기 마련이다. 그게 사람을 망설이게 만드는 요인일 테고. 장기하라고 해서 결과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굳이 무언가를 행하는 건, 굳이 해봐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도 발견할 수 있으니까. 그럴 필요 없던 모든 선택이 포개져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그는 말한다.

장기하는 여전히 의외의 순간을 이어가고 있다. <공중부양> 앨범을 선보이는 무대에서 와이어를 달고 실제 공중 부양을 한다든지, 100명 남짓의 관객만을 수용할 수 있는 소극장 전국 투어를 한다든지.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장면은 장기하라는 작품의 러닝타임을 성실히도 채워나가고 있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밴드 활동을 마무리한 그는 한동안 베를린에 머무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문득 책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거창한 명분은 없었다. 그저 마음속에 쏟아내고 싶은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말이 느려서인지 도무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답답함. 그 정도가 전부였다. 처음에 그의 집필을 막아선 건 ‘나 같은 게 무슨 책을 쓰냐’는 식의 자기검열. 하지만 그 고민을 헤집고 나온 그만의 해답은 의외로 단순했고, 그대로 책 제목이 되었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어쩌면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이 문장은 책과의 관계에서 태어났다. 그는 책을 빠르게 읽지도, 내용을 잘 기억하지도 못하는 터라 독서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어물거렸다고. 그러던 중 잘하지 못해도 좋아할 수 있다는 판단과 함께 머릿속을 채운 문장이 ‘상관없는 거 아닌가?’였다. 당당하게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그는 출판사에 직접 집필을 제안했고, 그렇게 한 권의 책을 펴낸 작가가 되었다.
보통이라면 그럴듯한 약력으로 채워져 있어야 할 저자 소개에는 몇몇 짤막한 문장만이 자리한다. 그중 중추를 꼽자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마음껏 자유롭게 살고 싶다’가 아닐까. 나름의 부를 쌓았을 장기하의 자동차가 오랜 시간 i30인 것도 어찌 보면 동일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장기하에게는 롤모델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음악을 비롯해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배철수와 김창완의 길을 따르고자 했으나, 결국 자신의 길을 제시하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마흔을 기점으로 롤모델이 없는 삶을 택했다.
그 결정은 자유롭고자 하는 그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남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잘하지 못해도 좋아할 수 있다는 믿음. 느리지만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용기. 그 모든 마음을 눌러 담은 문장, ‘상관없는 거 아닌가?’는 그가 삶에서 붙잡고 있는 태도 그 자체다.
삶을 유영하는 마음으로
능동적이지만 수동적입니다
누구의 삶에도 파랑은 밀려온다. 이는 기회의 손길일 수도, 위기의 도래일 수도 있겠다. 장기하는 몰아치는 물결 위를 서핑하는 사람에 가깝다. 수용성이 높다고 해야 할까.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외부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자유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메우는 유연하고도 실질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 테니.
‘눈뜨고코베인’으로 활동할 때만 하더라도 장기하의 역할은 드러머였다. 대학 생활 내내 연습에 매진하며 프로 드러머를 꿈꾸던 그는 드럼 스틱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발병한 국소성 이긴장증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연주가 어려워지면서 준비하던 군악대까지 포기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멋진 음악을 할 수 없을 거라 판단,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연기도 비슷하다. 뜬금없이 ‘감자별 2013QR3’으로 연기에 도전한 계기는 PD의 제안이었다고. 연기 경력이 전무했을뿐더러 본인의 성격과도 전혀 다른 캐릭터였지만, 이미 어울리는 역할이라고 판단한 감독의 안목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음악에서는 총책임자였던 그가 촬영 현장에서는 그저 남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했지만,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인간 장기하의 정체성을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라는 자신의 노래 제목이자 문장으로 대변한다. 팔자 좋게 게으름이나 피우라는 말이 아니다.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자, 너울에 몸을 뉘이듯 흘러가는 삶의 태도를 표상하는 문장일 것이다. 장기하의 오늘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주체적으로, 그리고 의존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