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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다가 뭐냐면, 영화 속 이들에겐 숨 같은 거야
2023-02-22T18:58:41+09:00
바다

이번 여름, 당신은 어떤 바다를 보고 싶나요?

저기 너머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받기도 한다. 풍문처럼 떠도는 이야기와 미아가 된 마음이 모여드는 곳. 그곳은 한낮에 쌓아 올린 모래성이 거짓말같이 사라진다 해도 모두 무죄가 되는 기이한 공간이다. 어제를 흔적이라 발음하던 절름발이 당신이 자꾸만 숨을 고르던 바다 앞에 잠시 앉자. 지금 당신 앞에 놓인 세 개의 바다는 모두 개인이 가진 각자의 색으로 해석될 것이다. 이건 단지 필자의 사사로운 사담일 뿐이다.

안경 (Glasses, 2007)

얼마 전 통영에 다녀왔다. 시대의 흐름을 뼈아프게 새긴 텅 빈 건물들이 즐비하고, 관광지 특유의 활기도 없고, 사실 음식도 딱히 입에 맞지 않았다. 거주하는 서울과 굉장히 멀어졌다는 것, 이 사실 하나만이 위안이 되는 도시였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짊어진 삶의 여장을 풀어야 할 때가 있다. 잠시 멈춰 서야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을 둘러싼 배경을 바꿔보는 일, 혹은 지워내는 일이다. 그날, 통영 바다는 정박한 통통배의 사소한 움직임처럼 타인에게 덤덤한 뒷모습이 되어 주었고, 나는 그것으로 족했다. 도피가 필요할 때 바다를 떠올리며 통영행 버스표를 확인하는 건 내 방식의 자위행위가 되었다.

영화 ‘안경’ 속 주인공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도 일상의 테두리를 잠시 벗고 저쪽이 마을, 이쪽이 바다인 새로운 풍경으로 걸어 들어간다. 직진하다가 왠지 불안해지면 우회전하라는 기분 탑재 지도를 그려주는 민박집 주인, 귀여운 남학생이 없어 자꾸만 죽고 싶은 생물 선생님, 매년 찾아와 시원한 빙수 한 그릇 시원하게 말아주는 할머니. 관광지를 묻는 그녀에게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사색을 권하는 이들은 타에코에게 낯설고 불편한 주변이 된다. 하지만 같은 시간에 묶인 이들과 그녀는 사색에 잠기듯 자연스럽게 점점 같은 풍경 안에 묻어난다.

마치 세상의 끝에 놓인 것처럼 ‘안경’ 속 바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바다의 모습으로 그곳에 있다. 불안할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뜨개질로 천천히 메우며, 인물들은 각자의 지금을 환기한다. 덜어낼 것은 흘려보내고, 그러다 유실된 기억들은 다시 건져 올리면서. 우리가 지금 이 바다에서 할 일은 밀려오는 포말에 잠시 시선을 두는 일이면 충분하다.

로마 (Roma, 2018)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알려져 있다. 사뭇 담담한 어조로 일상을 스케치하는 장면들과 날 것의 소리 사이에 흑백의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가 있다. 그녀는 멕시코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아이들의 보모이자 가사 일을 책임지는 가정부로 일한다.

이 집의 안주인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와 클레오는 남겨진 사람들이다. 소피아의 남편은 외도로 가족을 버렸고, 클레오는 아이를 품었지만 남자는 그녀를 떠났다. 항상 그렇듯 모든 짐은 이렇게 버려진 이들의 몫이다.

소피아와 네 명의 아이들, 클레오는 바다로 여행을 떠난다. 잠시 클레오의 시야에서 벗어난 두 명의 아이가 파도에 휩쓸린다. 클레오는 존재의 비루함을 각인시키는 큰 파도를 거스르며 나아간다. 금방이라도 아이들을 삼킬 것 같은 너울 속에서 그녀는 두 아이뿐만 아니라 차마 뱉지 못했던, ‘사실 아이가 태어나지 않길 바랐다’는 자기 안의 말을 끄집어낸다.

관계에서 중요한 건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 두 명의 여자는 불안했던 1970년 멕시코라는 땅 위에, 여성의 몸으로 지금을 밀고 나가야 하는 숙명을 짊어졌다. 하지만 클레오의 이 읊조림은 더는 외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 혹은 바다 위에 표류하며, 서로를 끌어안은 그들의 견고한 유대가 물결 위 윤슬처럼 빛나기 때문이다. 우린 이 바다에서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목도한다.

싱글 맨 (A Single Man, 2009)

톰 포드가 감독을 맡은 ‘싱글 맨’은 뭍이 아닌 물속에서 장면이 시작된다. 디자이너의 작품인지라 몸이 가진 관능을 물의 속성을 통해 보여준다. 한 남자가 부유한다. 그는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조지(콜린 퍼스)다. 16년 간 연인 사이였던 짐(매튜 구드)의 갑작스러운 사고사에 그는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다.

조지에게 아침은 자력으로 이 허무를 채워야 하는 막막한 시간일 뿐이다. 마치 아가미를 잃어버린 물고기처럼 질식의 몸부림으로 시간을 버텨낸다. 그에게 미래와 죽음은 동의어이듯 의미 없음으로 가득한 삶을 정리하기로 한 그 마지막 날, 제자 케니(니콜라스 홀트)가 집으로 찾아온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어느 날 친구는 나에게 ‘너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유대 속에서 이탈해 있는 그 상태를 즐기는 거야’라고 말했다. 조지 역시 혼자가 된 채 자신을 방치하고 있었지만 케니와의 대화를 통해 상실로 얼룩진 공간에서 잠시 비켜섰다.

짐의 죽음 이후 정지되어 있던 그의 시간에 잔금이 간 듯, 그날 밤 조지는 알몸으로 케니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유영한다. 그의 내면처럼 어두운 밤바다 속에서 조지는 온전히 실재했다. 충동일지라도, 부력처럼 바다 위에 떠 올랐던 생의 기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