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영화의 구색 ‘사랑’에 초점을 맞추면서 상투적이지 않은 캐릭터로 관객에게 새로운 감각을 주입하는 작품들이 있다. 처음엔 낯선 캐릭터에 다소 당혹스럽겠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의 수 만큼, 딱 그만큼의 사랑법이 이 별에 잔류하고 있을 터. 지금 소개할 다섯 편의 영화는 어쩌면 용기가 부족했던 당신과 내가 한 번쯤 꿈꿔본 사랑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수면의 과학 (2006)
겨울만 되면 생각나는 ‘이터널 선샤인’으로 유명한 미셸 공드리 감독 작품 ‘수면의 과학’은 6살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어린아이 같은 사랑을 그렸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곁인 프랑스로 거처를 옮긴 그는 옆집으로 이사를 온 이름만은 천생연분 스테파니(샤를로뜨 갱스부르)를 만나 운명이라 믿으며 마음을 쏟는다.
이 영화는 스테판이 느끼는 감정을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모습으로 시각화한다. 셀로판종이가 흐르는 수도꼭지, 독심술 기계, 1초 타임머신 등 현실과 꿈의 경계를 부수며 환상을 직조하는 그의 능력을 넋 놓고 즐겨보자. 짝사랑에 심한 앓이를 했던 사람이라면 명랑해 보이는 이 영화가 꽤 씁쓸하게 다가올 수도.
미성숙한 그의 사랑에 살짝 지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상식을 가늠하며 행동할 뿐, 결국 어린아이처럼 자기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아니던가. 영화가 끝나면 여운을 느끼며 OST 중 ‘If You Rescue Me’는 꼭 다시 듣자. 러닝타임 106분.
김씨 표류기 (2009)
사랑 잃고, 빚은 얻고. 이런 상황에 내몰려 자살을 하기 위해 한강 물에 몸을 내던진 김 씨(정재영). 죽는 것 또한 사는 것만큼 녹록지 않은 일임을 보여주듯 서강대교 아래에 떠 있는 무인도 밤섬에 그것도 너무나 멀쩡히 당도했다. 구조를 요청하는가 싶더니, 그는 그곳에서 잘 자고, 잘 먹고, 안녕하다. 그런 그를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3년째 방에서 나오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 여자 김 씨(정려원)다.
인터넷상에서 다른 이의 삶을 마치 본인인 듯 전시하며 사는 그녀는 일 년에 두 번 민방위로 사람이 없는 달처럼 한산해진 창밖을 본다. 그리고 그녀의 망원렌즈 속에 들어온 김 씨가 ‘HELLO’라는 인사를 건넨다. 어쩌면 운명, 혹은 얻어걸린 이 인연은 모래 글씨와 병에 담긴 편지로 아주 아날로그적 소통을 한다. 그녀와 그, 두 개의 외로운 섬이 만나 상실했던 희망의 실체를 손에 쥔 모래알처럼 바스락, 느껴지게 하는 영화. 러닝타임 116분.
세크리터리 (2002)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해를 하는 리 할로웨이(매기 질렌할)가 강박증 변호사 에드워드 그레이(제임스 스페이더)의 비서로 일하게 되며 사건은 발생한다. 이 둘은 단순히 업무적인 파트너가 아닌 SM 플레이 메이트가 되어버린 것. 타이핑 실수를 한 리의 엉덩이를 때린 에드워드의 손길에서 자신도 몰랐던 취향을 발견한 그녀는 그에게 마음을 뺏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감정이 식은 듯 그녀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에드워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그녀의 고군분투, 그 끝을 주시하자. 소재는 같지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는 확실히 결이 다르니, 입김으로 가득 찬 격정 로맨스를 상상한다면 실망할 거다. SM 플레이도 아기자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희귀템같은 영화로 조금 특별한 ‘으른’의 사랑이 여기 있다. 러닝타임 104분.
퐁네프의 연인들 (1991)
낭만으로 가득한 파리 센강 아홉 번째 다리, 그곳에서 노숙 생활을 하는 알렉스(드니 라방)는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로 거리를 헤매는 화가 미셸(줄리엣 비노쉬)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마치 생의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듯 남루한 몰골로 파리를 누비는 그들의 모습은 여타 로맨스 영화에서 볼 수 없던 생경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의 압권은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 불꽃놀이 장면. 밤하늘에 맺히는 화려한 불꽃을 배경으로 추는 그들의 춤은 맨몸으로 하는 사랑의 아름답고 처연한 몸짓이다. 러닝타임 125분.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2017)
여기 편견 없는 여자 엘라이자(샐리 호킨스)가 있다. 미 항공우주 연구센터 비밀 실험실의 청소 노동자로 일하는 그녀는 들을 수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다. 불행할 것이란 고루한 편견과 달리 엘라이자는 함께 일하는 흑인 여성 젤다(옥타비아 스펜서), 게이 이웃 자일스(리처드 젠킨스)와 연대하며 삶을 꾸리고, 아침마다 욕조에서 자위를 하며 스스로의 욕구에도 충실히 반응할 줄 안다.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과 러시아의 냉전이 시작되고 우주개발을 두고 양국이 경쟁을 벌이는 때. 그녀는 시대의 희생양으로 남미 아마존에서 잡혀 온 물고기 인간과 첨벙 사랑에 빠진다. 겉모습, 언어, 심지어 머무를 수 있는 곳까지 물과 뭍으로 다른 이들이 하나의 감정으로 엮이게 되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는 말이 놓일 자리에 둘만의 기호들을 채워 넣는다. 우리는 미처 닿아보지 못한 새로운 사랑의 형태를 일궈내도록.
아울러 약자 혐오와 차별로 가득한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또 다른 서사가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하는 지점. 제90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13개 부문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작품상을 포함해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판의 미로를 만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으로 아름다운 영상미, 사운드를 느끼며 관능적인 감각의 물결 속에서 로맨틱한 유영을 하고 싶다면 과감히 재생하자. 러닝타임 12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