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업계가 뒤집어졌다. 대격변의 근원지는 컴퓨텍스 2019. 라이젠 3세대와 라데온 RX5700이 발표되며 전 세계 업계 관계자들과 마니아들의 이목이 다시 한번 AMD의 최고 경영자, 리사 수(Lisa Su)에게 쏟아졌다. 경쟁 회사들의 발표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질 정도였다.
과거 애플 스티브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이외에 이 정도로 대중의 주목을 받는 CEO가 있을까. 전 세계 컴퓨터 마니아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그녀, AMD CEO 리사 수를 소개한다.
공대 여신의 탄생
1969년 11월,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만 타이난에서 태어나 2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리사 수는 피아노보다 동생의 장난감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을 좋아했다. 떡잎부터 남달랐던 그녀는 1986년 MIT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반도체 제작 핵심 기술인 웨이퍼 제작 과정을 접했고 이는 그녀의 인생 방향을 결정지었다.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리사 수가 고안한 ‘실리콘 온 인슐레이터’는 웨이퍼 표면과 하층 사이에 절연막 층을 넣어 반도체 성능을 높이는 기술이다. 이는 IBM을 비롯한 산업 전반에 사용되었으니 리사 수가 IBM에 입사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절차다.
엔지니어와 경영자의 능력을 갖추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를 거쳐 IBM 반도체 연구 개발 부서에 자리 잡은 리사 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그녀의 능력을 한껏 펼친다. 지금은 업계 표준이 된 반도체의 금속 배선을 알루미늄에서 구리로 교체한 것도 그녀의 제안이다. 이 방식으로 데이터 처리 속도가 향상되었으며, 그 수혜자는 우리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업계 표준이 된 반도체의 금속 배선을 알루미늄에서 구리로 교체한 것도 그녀의 제안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의 질을 높여준 그녀가 기업 경영의 능력을 갖추게 된 것도 IBM 시절이다. 최고 경영자의 기술 자문을 맡으며 뼛속까지 엔지니어였던 리사 수는 경영자로서도 경험을 쌓기 시작한다. 그녀가 플레이스테이션 3의 CPU를 제작하며 콘솔 게임기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그녀를 성장시킨 두 가지 역할
연구 개발자와 경영자, 두 가지 롤을 경험하며 리사 수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로 성장했다. 그녀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이는 절망에 빠진 AMD에게 희망이 된다. 리사 수가 추구한 것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위기에서 기회를 찾고, 회사가 잘하는 것에 더욱 집중하며, 타협 없는 품질의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나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행동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치밀한 계획이 있었다. 리사 수가 AMD 부사장으로 취임한 2012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불도저 CPU는 그 이름답게 AMD를 폐허로 만들어 버렸고, 주가는 연일 최하점을 갱신했다. 누가 봐도 회생 불가한 상황에서 리사 수는 AMD에 큰 변화를 몰고 온다.
절망 속에서 찾은 희망
그녀가 AMD 부사장으로 위임해 가장 처음 한 일은 시장 영역을 확대한 것이다. IBM 시절 인연 때문일까, 콘솔 게임기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AMD가 개발한 중앙 처리 및 그래픽 처리 프로세서를 하나의 칩셋으로 통합한 APU는 PC에서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성능으로 썩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콘솔 게임기에는 매우 적합한 제품이었고 플레이스테이션 4와 엑스박스원에 채택되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한다.
이는 인텔이 장악하고 있는 PC 시장을 피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위기를 기회로’ 삼은 매우 훌륭한 판단이었다. 분기마다 적자를 면치 못하던 AMD의 매출은 흑자로 전환되었고, 리사 수는 공적을 인정받아 AMD CEO가 된다. 이제 한숨 돌리며 조용히 반격에 나설 채비를 시작했다.
반격의 서막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 활로를 찾은 리사 수는 이제 ‘회사가 잘하는 것’에 집중한다. 새로운 CPU 아키텍처를 개발하는데 회사의 모든 여력을 쏟아부었고 다른 계획은 가지치기 했다. 개발자들에게는 ‘훌륭한 제품’에 주력하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탄생한 라이젠은 훌륭한 성능과 뛰어난 가성비로 대결하며, 인텔이 독점하던 PC CPU 시장에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러나 연구 개발자 출신인 그녀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라이젠은 캐시 메모리 부족으로 지연속도가(레이턴시) 길어 게임 쪽은 인텔보다 좀 떨어지는 퍼포먼스를 보여줬었다. 하지만 라이젠 3세대는 이를 보완해 컴퓨텍스 2019에서 배틀 그라운드나 블렌더 같은 인텔 CPU에 유리했던 프로그램들을 시연했다. 이는 ‘게임용 CPU는 인텔’이라는 선입견을 박살 내기에 충분했다.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컴퓨텍스 2019는 리사 수와 AMD의 승리였다.
신념이 현실로
최근 인텔은 소비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CPU 게이트라고 불린 보안 문제와 CPU의 발열, 그리고 최근에는 하이퍼스레딩 보안 문제까지 터졌다. 이에 반해 AMD의 라이젠은 완벽한 설계는 물론 좋은 성능에 합리적인 가격까지 끼얹었다. 리사 수가 컴퓨터 마니아들에게 여신으로 추앙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도 리사 수와 AMD의 개발진이 우리에게 선보일 멋진 제품을 기다리며, 그녀의 건승을 빈다.